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23 - 찾아오는 사람

從心所欲 2018. 6. 11. 15:14

 

외롭고 괴로운 귀양살이였지만 기쁨과 반가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추사가 귀양 온지 넉달 만인 1841년

2월, 소치 허련1이 제주도 대정의 유배지로 찾아왔다.

 

 

[허영 <소치 허련 초상>]

 

소치는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를 월성위궁2에서 1838년 8월 처음 만났다. 주사는 그의 재주를 아껴 사랑채에

머물게 하면서 서화를 지도했다. 그러다 1840년 여름 추사가 정쟁에 휩싸여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소치가 추사를

모시고 지낸지 2년 만에 헤어지게 된 것이었다.

 

"경자년(1840) 7월, 재상 김홍근이 소(疏)를 올려 추사선생을 공격했습니다. 추사선생은 직첩(職帖)3

회수당할 지경에 이르러서 금호 별장으로 물러나왔습니다. 8월 초에는 예산의 조상 묘소가 있는 곳에 계셨는데

같은 달 20일 밤중에 붙잡혀갔습니다. 그날은 바로 내가 서울에서 내려가 선생을 찾아가 뵌 날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두려웠던 처지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어 나는 길을 잃고 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하릴없이 마곡사의 상원암을 찾아가 10여일을 머무르다가 .....(중략)....그 이듬해(1841) 2월에

나는 대둔사를 경유하여 제주도에 들어갔습니다. 제주의 서쪽 100리 거리에 바로 대정이 있었습니다. 나는

추사선생이 위리안치되어 있는 곳으로 찾아가 유배생활을 하시는 선생께 절을 올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메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소치실록』)

 

추사가 평생 가장 사랑한 제자가 소치였고 그로 인하여 추사는 사람을 편애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추사는 소치를 데리고 지내면서 매일 소치에게 그림과 글씨를 가르쳤다. 그런 중 뜻밖에 소치에게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날아와 소치는 대정에 온 지 4개월 만에 다시 육지로 올라갔다.

 

 

[소치 허련 '소치묵묘']4

 

추사에게 적출은 없고 서자인 상우(商佑)와 양아들인 상무(商懋), 두 아들이 있었다. 추사가 자신과 13촌이 되는

상무를 양자로 삼은 것은 제주도 유배중이던 1841년 이었다. 1842년 새해에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추사의

아내가 양자를 정했다는 글이 나오는데 추사 아내가 임의로 양자를 들인 것인지 아니면 추사가 먼저 양자를

들이기로 정한 뒤, 그 대상을 추사 아내가 골랐다는 얘기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즉시 듣건대 집사람이 양자 하나를 정했다고 합니다. 이 험난하고 불운한 가운데 또한 문호(門戶)의 기쁨을

얻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부자간에 서로 만나볼 수가 없으니 아비는 아비 노릇을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하는 도리가 여기에서 또한 막히게 되었습니다." (완당선생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6신)

 

추사는 양자로 들인 상무의 가정교육을 동생인 김명희에게 맡겼다. 그러면서 양아들 상무에게도 추사는 따로

편지를 보내어 집안의 가훈이 '곧은 도리로써 행하라(直道以行)'임을 일깨우고 선조를 받들고 웃어른 섬기는

도리를 다하라는 당부를 했다. 같은 편지에 '천륜(天倫)이 크게 정해져서 종조(宗祧)5를 의탁할 데가 있게

되었다'는 구절이 있어 양자를 들인 배경을 대략 짐작케 한다. 추사는 집안의 대를 잇게 하기 위하여 곧 며느리를

들이도록 했으며 집안으로 들인 며느리에게는 또 한글 편지를 써 따뜻한 마음을 직접 전하기도 했다. 양자가 된

상무는 곧 유배지로 와서 추사를 찾아뵈었다. 상무가 돌아간 뒤에는 다시 서자 상우가 제주도로 내려와 추사의

수발을 들었다. 예전에 추사의 부친 김노경이 고금도에 유배되었을 때 형제들이 찾아가 수발을 도왔듯이 추사의

두 아들도 자식된 도리를 그렇게 감당했다.

 

추사는 경주 김시 월성위의 후손이라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6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순조가 왕실의 친척이 과거에 급제하였음을 축하하여 음악을 내리고 예산의 월성위묘에

치제(致祭)7하게 할 정도로 권세가 있는 집안이었다. 이는 추사가 평생 벗어날 수 없었던 귀족주의와 선민의식의

뿌리였으며 한편으로는 명문가의 종손이라는 부담과 굴례를 안고 살아야 하는 생의 조건이기도 했다. 추사는

월성위 집안의 장손으로서 유배지에서도 집안일에 대하여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1842년, 추사가 유배온 지 3년째 되는 해, 경주 김씨 집안의 조상들을 모신 사당인 영모암(永慕庵)을 중수하게

되었다. 이때 편액 뒷편에 증조부 김한신이 쓴 글이 나왔는데 추사는 이 글을 새겨 걸게 하고 그 발문을 지어

보냈는데 그것이 『완당선생전집』에 실려있는 「영모암 편액 뒷면의 글에 대한 발문(永慕庵扁背題識跋)」이다.

 

 

[추사, 「영모암 편액 뒷면의 글에 대한 발문(永慕庵扁背題識跋)」부분]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본명은 허유(許維)이고 련(鍊)은 후명(後名)이다. 호는 소치(小痴)이고 진도 출생으로 벼슬은 지중추부사(일정한 직무가 없는 정2품 관직)에 이르렀고 문재와 서도, 그림이 뛰어나 삼절(三絶)로 이름이 높았으며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였다. 추사는 허유를 가리켜 “화법이 매우 아름다우며, 우리의 고유의 습성을 타파하여 압록강 이동에서 그에 겨룰 이가 없다.” 라고 극찬하였다. 글씨는 추사체를 많이 따랐으며 작품에는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등이 있다. (미술대사전,1998.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2.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1720~1758)이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혼인할 때 영조가 김한신 에게 ‘월성위((月城尉)’라는 작호를 내리고 지금의 통의동 백송 터 일대에 큰 집을 지어 살게 하며 ‘월성위궁’ 이라고 불렀다. 추사는 김한신의 장손 김노영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는데, 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할아버지 김이주(형조판서) 마저 세상을 떠나자 추사가 월성위궁의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3. 조선시대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 (문화원형 용어사전) [본문으로]
  4. 허련은 산수, 인물, 매, 죽, 노송, 모란, 파초 및 괴석 등을 모두 잘 그렸다. 산수에 특히 뛰어났고, 모란을 잘 그려 ‘허모란’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하였다 (향토문화전자대전) [본문으로]
  5. 조상을 모시는 사당 [본문으로]
  6.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는 추사의 11촌 대고모이다. 정순왕후는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신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1803년 말까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본문으로]
  7. 국가에서 고인이 된 왕족(王族)이나 대신(大臣)에게 제문(祭文)과 제물(祭物)을 갖추어 지내주는 제사. (한국고전용어사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