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27 - 세한도(歲寒圖) 1

從心所欲 2018. 6. 26. 17:25

 

<세한도(歲寒圖)>

 

 

추사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歲寒圖)>. 추사 나이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에 유배온지

5년째 되는 해에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제 온 국민의 상식이나 다름없다.

이상적은 대대로 내려오는 역관1 집안에서 태어나 그 자신 역시 역관이 되었다. 23세 때 역과2에 합격한 뒤 모두

열두 차례나 연경에 다녀온 중국통이었다. 그는 용모가 수려하고 문체도 아름다워 연경에서도 고관대작과 이름

있는 유학자들과 친교를 맺어 70여 명의 중국 문인들과 교류하였으며 학식과 시문에 능했다. 이상적은 추사가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책을 구해 보냈고 이에 추사가 <세한도>를 그려 그 따듯한

정에 답했다는 것 또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추사가 <세한도>를 그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세한도> 발문에 나와 있다. 귀양살이 4년째인 1843년 이상적이

계복(桂馥)3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4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庫)』을 구해 보내준데 이어 이듬해에는

하우경5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을 역시 북경에서 구해 제주도의 추사에게 보내준 일이었다. 

 

『만학집(晩學集)』의 저자인 계복은 추사가 옹방강, 완원과 교류할 때 익히 알고 그의 학예를 흠모해온 터였다.

더욱이 1841년, 전 8권으로 인출된 이 책에는 옹방강이 제명(題名0을 썼고 완원이 서(序)를 쓴 것이 들어 있어

추사로서는 더욱 감격스러운 책이었다. 운경에 대해서도 추사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의 글은 처음으로

대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추사는 절해고도의 유배지에서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

받은 『황조경세문편』은 자그만치 총 120권, 79책으로 엄청 방대한 양이었다. 이상적의 그런 정성에 추사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추사는 <세한도> 발문을 이렇게 적었다.

 

지난해에는『만학』과『대운』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문편』을 보내왔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 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고 여러 해가 걸려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일시에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태사공(太史公)6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凋也)"7고 하였다. 송백은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없고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송백을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시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붙였다는 글씨8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라. 아!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

 

연경으로 떠나려던 참에 스승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귀한 선물을 받은 이상적은 감격하여 추사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삼가 <세한도> 한 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너무나 분수에 넘치게 칭찬해

주셔서 감개가 진실되고 절절하였습니다. 아하!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 않고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김영호, 「추사 김정희, 추사의 붓을 따라 천리를...」『문학사상』50호)

 

이상적은 그 해 10월, 추사가 그려준 <세한도>를 가지고 동지사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1845년 정월 스무 이튿날 그의 벗인 오찬(吳贊)9의 장원(莊園)에서 벌어진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이 잔치는

8년 전 이상적이 오찬의 처남인 장요손(張曜孫)10과 시와 술로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 재회를 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잔치에는 주인 오찬과 주빈인 이상적 외에 장요손 등 17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상적이 추사의

<세한도>를 꺼내 좌객들에게 내보였다. 그러자 모두가 격찬을 아끼지 않으며 다투어 제(題011와 찬(贊)12을 시(詩)와

문(文)을 붙였다. 이것이 <세한도>에 붙어 있는 <청유 십육가(淸儒十六家)의 제찬>이다.

그 가운데 하나, 반증위(潘曾瑋)13의 글이다.

 

【추사는 외국에 있는 영민한 선비로 일찍부터 그 높은 이름을 들어왔네

높은 이름엔 비방이 들어오는 법이니 세상 그물에 걸리기 일쑤네

흘러가는 세속의 흐름을 보라. 누가 선비의 맑음을 알까 보냐.

깊은 감회를 지니고 생각건대 이 풍진 속에 일찍부터 어진 벗을 사귀었구나

높은 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터우니 추운 겨울에도 맹세가 변하지 않는다.

저 소나무처럼 본성이 다 같이 굳고도 곧구나

맨 나중 시드는 성질을 본받아 이것으로 두터운 정에 답한다

- 반증위(潘曾瑋) 쓰다 】

 

이렇게 청나라 학자 16인의 제찬을 받아 이상적은 한 권의 횡축으로 합장하고 표지에 붙이는 제첨14은 장목

(張穆)에게 부탁하여 표구를 완성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장대한 시화축(詩畵軸)으로 장정한 것을 추사에게

보여주었던가 보다. 추사가 <세한도>에 글을 쓴 16인 가운데 조진조라는 인물에 대하여 이상적에게 물어본

편지로 봐서 그렇다. 추사는 조진조의 집안내력까지 들춰가며 인물의 됨됨이를 물었는데 추사가 중국 학자들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는지를 편지 행간에 잘 드러나 있다.

 

[<세한도> 시화축 전체, 길이가 약 15m에 이른다]

 

현재의 <세한도> 시화축에는 청나라 16인의 제찬 말고도 1914년에 김준학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근세인물인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의 글이 보태져 있다. 위창 오세창15은 서화가로 추사 예술 연구의 일인자, 이시영은

당시 부통령으로 서예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며 위당 정인보는 추사, 성호, 다산에 대한 학술 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한학자이자 국학연구가였다.

오른쪽 상단의 가로로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라고 쓴 글씨는 김준학이라는 분이 쓴 글인데 밑에 작은 글씨로

그 내력을 이렇게 밝혔다.

 

 

갑인년(1914) 정월에 후학 김준학(金準學) 삼가 쓰다. 「세한도」시의 운을 빌려 악양16 객지에 있는 종숙

성년(星年)씨께 드리고 아울러 육십년 생신을 축하한다. 갑인년 2월 20일 둔암생(遯菴生)이 개성군 북산

채묵헌(彩墨軒)에서 쓰다. 내가 권 머리에 크게 다섯 글자를 쓰고 나서 아래쪽에 내 시를 덧붙여 적었는데

편수(編修) 풍경정(馮景亭)17의 시운(詩韻)을 빌린 것이다. 풍경정은 초서에 능한데 우선옹의「회인(懷人)」

에서 “거침없음이 비바람 몰아치듯 하여, 종이 가득 초성(草聖)18의 기운이 감도네.” 라고 평했다. 지금 내가

병든 팔로 붓을 들어 귀한 두루마리를 더럽히고 있어 대단히 부끄럽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조선시대 통역 업무를 담당하던 관리 [본문으로]
  2. 역과(譯科) : 조선시대 기술직을 뽑는 잡과(雜科)의 하나로 漢學, 蒙學, 女眞學, 倭學 네 분야의 역관을 뽑는 과거시험 [본문으로]
  3. 계복(1737 ~ 1805) : 후한(後漢)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연구에 전심했던 청나라 때의 학자 (두산백과) [본문으로]
  4. 운경(1757 ~ 1817) : 청나라 강소(江蘇) 양호(陽湖) 사람. 경의(經義)와 고문(古文)을 연마하며 산문 창작에 힘썼다. 문장이 간결하고 근엄하여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기풍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이회문화사) [본문으로]
  5. 본명은 하장령(賀長齡 1785 ~ 1848). 우경(耦耕)은 자. 청나라 호남(湖南) 선화(善化) 사람으로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를 지냈다.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은 청나라의 명공거경(名公鉅卿)과 석유기사(碩儒畸士)의 글 가운데 실용적인 것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이회문화사) [본문으로]
  6.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 [본문으로]
  7.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말씀. 세한, 연후지송백지후조야 [본문으로]
  8.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급암과 정당시, 적공의 이야기는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의 마지막에 사마천(司馬遷)이 논평한 부분에 관한 내용이다. 문전작라(門前雀羅)라는 고사성어에도 같은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who am i 카테고리에서 ‘문전작라’ 제목의 글 참조. [본문으로]
  9. 오찬 (1785-1849): 형부외랑(刑部外郎)을 역임했으며 장요손 의 매부이다. 이상적의 은송당집(恩誦堂集) 발간(1848년 1월)의 모든 업무를 주관했다 [본문으로]
  10. 장요손( 1808 1863) : 청대의 정치가이자 작가로 문학가 장혜언 의 조카 [본문으로]
  11. 제(題) : 서적(書籍), 비석(碑石), 서화(書畫) 따위에 적은 글로 앞의 것을 제(題)라 하고 뒤의 것을 발(跋)이라 한다. (한국고전용어사전) [본문으로]
  12. 찬(贊) : 인물이나 서화를 찬미하는 글체로 남의 좋은 점을 칭송할 때 사용하는 한문 문체로 원래는 산문이었다가 송나라 이후 운문으로 바뀌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13. 반증위(1818 ~ 1886) : 강서성 소주 출신으로 일생을 독서와 시문 저작에 치중해 ‘정학편(正學編)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본문으로]
  14. 제첨(題簽) : 표지에 직접 쓰지 아니하고 다른 종이에 써서 앞표지에 붙인 외제(外題) [본문으로]
  15. 오세창(吳世昌, 1864 ~ 1953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계몽 운동가, 일제 강점기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화가.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은거하며 부친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 槿域書畫徵’을 편술하였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이다. 그 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를 집성하였으며, 수집한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 槿域書彙’,·‘근역화휘槿域畫彙’ 등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본문으로]
  16. 경상도 하동 소재 [본문으로]
  17. 풍경정(馮景亭)은 풍계분(馮桂芬, 1809 ~ 1874)의 호이다.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이자 산문가 [본문으로]
  18. 왕희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