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32 - 추사체 성립론

從心所欲 2018. 7. 14. 18:33

 

유홍준 박사는 추사체가 단순히 추사의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보고, 추사체가 어떤 배경에서 출발하여

어떤 변천과정을 거쳐 어떻게 완성되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다가 추사와 동시대에 살았던 박규수가

당대의 안목으로 추사를 논한 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을 길잡이로 하여「완당평전」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박규수(朴珪壽. 1807 ~ 1876)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셔먼호사건1 때 평양감사를 지냈고 개화파의 선구이며

그 자신 명필이었다. 박규수는 추사체의 본질과 특징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였다.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 스물 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와 미불(米芾)을 따르고 이북해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蒼鬱勁健)해지더니

......드디어는 구양순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었고 .....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하며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다만 문장가들만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완당의 글씨를) 혹 호방하고 제멋대로 방자하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오히려 근엄의 극치임을 모르더라. 그래서 나는 후생(後生) 소년들에게 완당의 글씨를 가볍고 쉽게

배워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박규수전집』, 「유요선이 소장한 추사유묵에 부쳐」)

 

유홍준 박사는 또 추사체가 제주도에서 확립되는 과정과 한국 서예사의 흐름 속에서 추사체의 위치에 대하여는

청명 임창순2선생의 「한국 서예사에 있어서 추사의 위치」이상의 논문이 없다며 청명 선생의 글을 요약했다.

먼저 추사가 연경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이후의 추사의 서예를 이렇게 셜명했다.

 

".........추사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써보려는 의욕을 가졌는데 24세에 북경에 들어가서 여러 명가를

만나서 그 이론을 들었다' 했고.....'그들의 화법이 우리가 배우던 것과 크게 달랐으며 한나라, 위나라 이래

수천 종의 금석을 보았다'는 말을 썼다. 물론 여러 명가들을 만난 것은 사실이나 직접 지도를 받은 것은 첩학

(帖學)과 금석의 대가인 옹방강이다. 옹방강은 젊은 추사를 기특히 여기고 서법을 강론해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소장한 많은 법첩과 비본을 일일이 보이고 자신의 해박한 지식으로 서법의 원류를 설명하며 '글씨는

북비(北碑)부터 배워야 하며 북비를 배우기 위하여는 당의 구양순, 그 중에도 화도사비(化度寺碑)부터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자기의 경험과 주장을 설파해주었다.

추사는 그 주장의 풍부함과 식견의 탁월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곧 그의 제자가 되었고 학문과

서법에서 모두 옹방강을 따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가 글씨의 도(道)를 깨우치게 된 시작이다. 이렇게 하여

눈을 뜨게 된 추사가 후일 역사상 뚜렷한 고봉(高峰)을 차지하게 될 줄은 스승인 옹방강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에 돌아온 추사는 옹방강의 서법을 그대로 따르기에 힘썼다."

 

이것이 바로 추사가 "왕희지는 구양순을 통하여 들어간다"고 주장한 내력이다. 청명 선생은 이어 추사가 서한

시대의 예서를 본받으며 발전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러나 천재적 예술인인 추사가 여기에 만족할 리는 없다. 그는 서법의 원류를 거슬러올라가 당에서 남북조,

다시 위진(魏晉)에서 한예(漢隸)에 이르고 예(隸)의 근원이 전(篆)에서 왔다는 데까지 거슬러올라갔다.

마침내 추사는  예(隸)를 쓰기 시작하였고 동한(東漢)의 예가 파임과 삐침3으로 외형미(外形美)가 두드러진

데에 불만을 가지고 다시 서한예(西漢隸)에서 본령을 찾으려 하였다."

 

한(漢)나라는 기원전 206년에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세운 왕조로서 서기 9년에 왕망(王莽)이 정변을 일으켜

신(新)나라를 건립할 때까지 유지되었다가 서기 25년에 한나라 왕조의 후예인 유수(광무제光武帝)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다시 한나라를 건립했다. 역사에서는 전자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 후자를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으로 구분한다. 진(秦)나라 때 형리(刑吏)들이 문서를 쉽고 간단하게 작성하기 위하여 고안했다는

예서(隸書)는 계속 명맥을 유지해 오며 전한의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에 국가의 공식문자로 정착이 되었다.

예서는 진예(秦隸)인 고예(古隸)와 한예(漢隸)인 팔분(八分)으로 구분되는데 그 차이는 파법(波法)에 다. 

고예(古隸)는 전서(篆書)를 빠르게 쓰는 데서 시작한  것으로 전(篆)이 예(隸)로 변하는 과도기적 특징을 갖고

있는데 소전(小篆)4보다 곡선이 적고 획이 간결하지만 소전처럼 좌우대칭이며 글자 모양은 소전이 장방형인

반면 고예는 정사각형에 가깝다. 後漢 때는 초기 광무제로부터 중기까지는 진대인 前漢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문자양식에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 한나라 중기에 채옹(蔡邕)5이라는 인물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서체인 팔분(八分)이 등장한다. 팔분은 전서의 요소를 완전히 탈피하여 예서의 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고예를

미화하기 위하여 횡핵의 종부를 누르고 힘차게 삐치는 것이 파(波)인데 이것이 있는 것을 팔분이라고 한다.

팔분은 글자가 평평하면서도 장식미를 더한 서체로 고예에서 해서에 이르는 과도기 단계의 서체로 보기도 한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 석각된 글씨는 고예의 대표적인 예이다. 광개토대왕비가 만주 집안 지역에

세워진 것은 장수왕(長壽王) 2년인 414년이다. 높이 6.39m의 돌에 많이 가공하지 않아 울퉁불퉁한 표면에

바둑판처럼 선을 반듯하게 그은 뒤 14×15㎝ 정도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글씨는 비의 

면에 걸쳐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다.

 

[광개토대왕비 정탑본,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

 

정탑본이란 비석에 바로 종이를 대고 탁본을 했다는 의미로 광개토대왕비 정탑본은 매우 희귀하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마모되고 훼손되어 글자가 분명치 않다. 그래서 닳아 없어진 비면 글자의 윤곽이 확실히

드러나도록 원비에 석회를 발라 채탁 한 석회 탁본이 주로 유통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석회 탑본,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사이트]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는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로획은 수평이고 세로획은 수직이다. 선의 굵기도 일정하다.

애석하게도 추사 김정희는 이 광개토대왕비 글자는 보지 못했다.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된 것은 추사 사후 20여년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추사가 살아생전에 이 비문을 볼 수 있어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새롭게 발견하고

고증한 안목으로 광개토대왕비를 고증했더라면 이 비문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한일(韓日) 간의 논란은 시작도

되지 않았을 것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6

아래 <사신비(史晨碑)>는 서법이 후한의 예서인 팔분예법의 정통으로 꼽히고 있는 비문으로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사신비>7]

 

建자의 ⻌변 마무리, 二, 年, 三 자의 마지막 가로 획이 파책으로 처리되어 있다. 추사는 후한예(後漢隸)의

이런 장식성에 불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청명 선생의 글이다.

 

"그러므로 추사의 임서(臨書)는 옛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필법으로 쓴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이론적 근거는 옹방강, 완원을 위시한 중국인들에게서 얻은 것이나 작가로서의 발전은 그의 천품

(天品)과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예법(隸法)은 그대로 행·초(行草)에도 응용되었다."

 

이것이 곧 추사가 서한 시대 예서를 본받은 이유이며 추사체의 성립과정을 서법에 입각하여 분석한 것이다.

청명 선생은 이어 추사체가 보여주는 미적 특질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추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주로 간 이후의 글씨는 그가 평소에 주장하던 청고고아(淸古高雅)

서풍이 일변하여 기굴분방(奇崛奔放)한 자태를 보이기 시작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 전통적인 글씨가 의관을

단정히 차린 도학군자(道學君子)와 같다면 추사의 글씨는 예절과 형식을 무시한 장난꾼처럼 보였을 것이다.

곧 그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그대로 붓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작자의 개성이 살아 있고 붓을

잡았을 때의 작자의 감정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점과 획의 운용이 강철 같은 힘을 가졌고, 공간 포치에 대한 구상은 모두 다 평범을 초월한 창의력이

넘친다. 그대로 현대회화와 공통되는 조형미를 갖추었으니 이는 과거의 어느 작가도 시도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지이다. 그러므로 당시에도 전통만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반면에 그의 글씨를 구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고 세월이 흐를수록 심미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공감을 얻어 그의 진가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아래의 <창포익청(菖浦益總)>은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는 기이함이 있는 파격적 예서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추사가 의도적으로 이런 파격을 취했다는 의심이 든다. 추사는 말미에 이런 자기 주장을 밝혔다.

 

"우리들은 예서를 쓸 때 한나라 비문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 글자라는 것과 어찌 백의 하나라도

방불하겠는가. 당의 예서체를 써서 한택목(韓擇木)과 제유린(薺有隣)의 풍미가 있으면 만족스럽다. 노완(老阮)"

 

[ 김정희 <창포익청(菖浦益總)>, 규격·소장자 미상]

 

청명 선생은 청조 학예가 어떻게 하여 추사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되고 왜 추사체가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청조의 학문이 수입된 이후 박제가, 신위 같은 사람이 일으키지 못한 서법의 혁신을 완당은 어떻게 대담한

시도로 성공하기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첫째, 앞 사람들에 비하여 추사는 보다 더 풍부한 자료와 그 원류에 대한 깊은 연구를 쌓은 동시에 끊임없는

임모에서 배태된 것이니 곧 서학(書學)의 길을 터득해 가지고 거기에 그의 천부적 창의력이 합해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다음으로 또 중요한 것은 그의 사회적 불우이다. 그의 새로운 스타일의 서체는 유배생활 중에 완성되었다.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면서도 일변 해학적인 면을 갖춘 그의 서체는 험난했던 인생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조정에 들어가서 높은 지위를 지키며 부귀와 안일 속에서 태평한 세월을 보냈다면 글씨의 변화가 생겼다

할지라도 꼭 이런 형태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1866년(고종3년)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 정박하고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자의로 행동하면서 평양성 내의 관민을 자극하여 상호간 충돌이 일어났다. 결국 셔먼호는 화공(火攻)에 의하여 전소되고 셔먼호를 타고 왔던 24명이 모두 죽었다. 훗날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져 미국이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2. 임창순(任昌淳, 1914년 ~ 1999년) : 한학을 익힌 뒤 평생 독학으로 학문연구에 진력하여 한학, 금석학, 서지학, 서예 등 한국 전통문화에 통달했다. 호는 청명(靑溟).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 4·19혁명이 일어나자 ‘4·25 교수데모’를 주도했거 5·16군사쿠데타 직후 구속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해직되었다. 1964년에는 ‘인민혁명단’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63년 한문교육기관인 ‘태동고전연구소’를 창설하고, 1974년에는 경기도 남양주시 에 한문 서당인 지곡정사(芝谷精舍)를 세워 1979년 태동고전연구소를 이곳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태동고전연구소는 국학을 전공하는 인재양성소로 변모해 1998년까지 총 5,000여 명이 수강하였고, 40여 명의 대학교수가 배출되었다. 1985년에는 태동고전연구소 부지와 서적 등 일체를 한림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3. 파임은 예서에서 가로획이나 영자8법의 마지막 획인 ‘책(磔)’의 마무리 부분을 오른쪽으로 뻗어 흐르게 하는 것으로 ‘파책’ 또는 ‘파’라고도 한다. 삐침은 영자8법의 여섯 번째 획인 ‘략(掠)’처럼 우상에서 좌하로 비스듬히 내려쓰는 것이나 또는 그 획(丿)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4. 서주(西周)의 금문(金文:청동기에 주조되거나 새겨진 문자)으로부터 파생된 자체(字體)로 중국의 고대 서체의 하나인 대전(大篆)에 대칭되는 말로 대전의 자형이 복잡하였기 때문에 진시황제 때 간략화하여 소전을 만들었다. 소전은 그 때까지 지역마다 달랐던 한자를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본문으로]
  5. 채옹(133 ~ 192)은 동한시대의 문학가이며 동시에 서예가였다. 그의 글씨는 결구가 엄정하고 점과 획이 서로 조화되면서 다양한 형세를 나타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만주는 청나라의 금지(禁地)였다가 1870년대 후반부터 개간지로 풀리면서 농부들이 먼저 이 대왕비를 발견하였다. 이후 사코 가게노부라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 첩보장교가 이 지역을 누비다가 1883년 광개토대왕비를 발견하고 탁본을 입수해 참모본부에 제출했고 일본군 소속 학자들은 비문을 판독하여 1888년 그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그들의 해석은 이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비문의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로 인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본문으로]
  7. 사신비는 노국(魯國)의 의 재상인 사신(史晨)이 공자묘(孔廟)의 제사를 성대히 치룬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새긴 것이다. 사신비는 하나이나 양면에 글을 새겼기 때문에 이를 또한 ‘사신전후비(史晨前後碑)’라고도 한다. ‘전비’는 169년에, ‘후비’는 168년에 각각 썼으나 모두가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후한의 환제와 영제가 즉위했던 2세기 후반은 고예(古隸)를 일변시킨 팔분 예서의 문자양식을 마음껏 뽐낸 시기라고 하는데 사신비는 그 시대의 정점에 있는 비석중의 하나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