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34 - 강상시절 1

從心所欲 2018. 7. 26. 19:27

추사의 일생은 보통 다섯 단계로 나눈다.

①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②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의 학예연마기

③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향가는 55세까지 중년의 활동기

④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⑥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의 만년기

 

추사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지 3년 만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 때문에 북청 유배까지를

추사 유배기의 연장으로 보고 북청에서 돌아와 과천에서 만년을 보내는 마지막 4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흔히 '추사의 과천시절'이라고 한다.그런데 추사가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의 2년 반과 북청 유배 1년간은 추사

일생의 만년(晩年) 중 거의 공백으로 비어있고 조사된 것도 알려진 것도 없다. 심지어는 어디에 살았는지조차

확인된 것이 없다.

추사가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곳은 서울의 월성위궁이 아니라 예산의 향저였다. 그리고 그 몇

달 뒤 '삼호(三湖)'라는 곳에 집을 마련했다는 편지 구절이 있으나 '삼호'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없다. 다만 그 시절 권돈인이나 초의스님에게 보낸 편지에 "아직도 강상(江上)에 머물고 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강변인 것만은 알 수 있다. 유홍준 박사는 여러 자료를 비교한 끝에 '삼호'의 강상이라는 곳이

서울의 한강 노량진이 건너다보이는 용산의 강마을임을 주장했다.

유홍준 박사는 노호(鷺湖), 묘호(泖湖), 삼묘(三泖) ,삼호(三湖) 같은 호나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 ,

'삼십육구초당(三十六鷗草堂)' 같은 당호가 있는 작품들을 강상시절 작품으로 보고 있다. 추사는 이 시절에

수많은 명작을 남긴다. 추사 글씨 최고 명작의 하나로 꼽히는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거의 신품(神品)의

경지로 일컬어지는 <불이선란不二禪蘭>, 추사 행서의 명작 <석노시石砮詩> 등이 모두 이 시절의 소산이다.

추사체가 제주도에서 정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정작 추사체다운 본격적인 작품이 구사되는 것은 오히려

이때부터이다.

 

[추사  <殘書頑石樓>]

 

 

추사의 강상시절 글씨로 확인되는 것은 간찰이 20여점, <계첩고(稧帖攷)>1 같은 서첩이 서너 점 있으며 그외에

강상시절로 추정할 수 있는 도서 낙관을 사용한 작품이 10여점으로 모두 30여점을 헤아린다. 이러한 작품들을

기준으로 강상시절 추사 글씨의 특징을 보면 추사체의 파격이나 개성미, 이른바 '괴(怪)'가 완전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한다. 특히 글자의 구성에서 대담한 디자인적 변형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제주도 유배 이전은 물론이고

유배 중의 글씨와도 완연히 다른, 그야말고 능수능란한 추사체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추사<계첩고> 부분, 33.9 x 27 cm, 간송미술관]

 

추사의 강상시절 아호인 '삼묘(三泖)'라고 낙관한 추사의 명작 현판으로는 <단연··시옥 端硯竹爐詩屋>

이 있다. 내용은 그 유명한 단계벼루,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았는 작은 집, 그것 만으로

자족하겠다는 조촐한 선비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이 현판 글씨는 기본은 예서체로 되어 있지만 자획의 운용에는 전서기(篆書氣)가 많이 들어 있다. 글자의

구성미, 즉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이때부터 추사는 글씨의 구성에서

점점 대담해지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보정산방寶丁山房>이나 <조화접藻華艓> 같은 작품

에서도 잘 나타난다.

 

[강진 다산초당의 동암에 걸려있는 현판]

 

 

보정산방이란 '정약용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용방강이 소동파를 존경하여 자신의 서재를

보소재(寶蘇齋)로 이름 짓고, 완당이 또 담계 옹방강을 사모하여 보담재(寶覃齋)라고 했듯이 세상 사람들이

정약용의 18년 유배지를 '보정산방'으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을 것이다.

<寶丁山房>은 예서체 중에서도 전서의 단정한 멋을 그대로 살려낸, 정말로 아름답고 사랑스런 글씨이다.

글자의 구성에서도 변화가 구사되어 낱낱 글씨에 현대적인 디자인의 멋이 들어 있는데, 현판 전체를 마치

그림의 구도를 잡듯이 글자 배치의 묘를 살려 고무래 정(丁)자는 아래 획을 길게 늘어뜨려 운치 있게

꼬부렸으면서도 뫼 산(山)자는 위쪽으로 바짝 올려 납작하게 자리함으로써 그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

진실로 추사체다운 멋과 특징이 구사된 글씨다.

 

[김정희 <藻華艓> 33.0 x 127.0 cm, 개인소장]

 

 

추사는 강상시절에 권돈인의 옥적산방을 위하여 <조화접藻華艓>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이 작품은 강상에

사는 추사가 옥적산방 산속에 살고 있는 권돈인에게 보낸 것으로 그 제작 경위를 이렇게 적었다.

 

"산에 살고 있지만 또한 강호의 뜻을 갖추고 있으니 표구해서 옥적산방의 벽에 거십시오."

 

그래서 산에는 없고 강호에만 있는 것,마름풀[藻], 꽃[華], 배[艓] 세 글자를 썼다는 것이다.

'조화'란말에는 문장이라는 뜻도 있어 상징성도 있다. 글씨의 구성을 보면 藻자는 마름풀이 떠다니는 모양이고

華자는 꽃이 피어나는 모양이며 艓자는 또 떠 있는 배 모양이다. 

 

또 다른 현판 글씨로 '칠십이구초당주인'이라는 낙관이 들어있는 <소창다명사아구좌小窓多明使我久坐>라는

작품이 있다.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안다 있게 하네"라는 뜻이다.

 

[김정희 <소창다명>, 38.5 X 136.5 cm, 소장자 불명이고 유홍준박사가 모각본 소장]

 

 

이 현판 글씨 역시 구성미가 뛰어나다. 그 내용이 조용하고 편안한 만큼이나 글씨 또한 예서이면서 행서의

운필을 구사했기 때문에 매우 경쾌한 느낌이 일어난다. 그런 중 글자에 유머와 파격을 주어 추사체의 '괴'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측히 밝을 명(明)자의 획을 비뚜로 쓴 것이나 앉을 좌(坐)자를 土자 위에 네모 두 개를

그려 마치 땅에 앉은 엉덩이처럼 썼다. 그것도 한쪽 궁둥이를 슬쩍 들고 비스듬히 앉은 듯 네모의 양감이

다르게 표현되었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왕희지의 ’난정첩(蘭亭帖)‘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고(論告)로, 난정첩이 임모에 임모를 거듭하면서 변형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 누구의 임모본을 실제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논구한 것이다. 추사가 64세 때인 1849년 작품으로 위작 논란이 있으나 유홍준박사는 진적으로 보고 있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