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38 - 추사체의 특질 “怪”

從心所欲 2018. 8. 16. 16:45

청명 임창순 선생은 추사체가 보여주는 미적 특질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제주로 간 이후의 글씨는 그가 평소에 주장하던 청고고아(淸高古雅)한 서풍이 일변하여 기굴분방(奇崛奔放)한 자태를 보이기 시작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전통적인 글씨가 의관을 단정히 차린 도학군자(道學君子)와 같다면 추사의 글씨는 예절과 형식을 무시한 장난꾼처럼 보였을 것이다. 곧 그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그대로 붓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작자의 개성이 살아있고 붓을 잡았을 때의 작자의 감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점과 획의 운용이 강철 같은 힘을 가졌고, 공간 포치에 대한 구상은 모두 다 평범을 초월한 창의력이 넘친다. 그대로 현대회화와 공통되는 조형미를 갖추었으니 이는 과거 어느 작가도 시도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지이다. 그러므로 당시에도 전통만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반면에 그의 글씨를 구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고 세월이 흐를수록 심미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공감을 얻어 그의 진가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서법에 충실하면서도 또 그것을 뛰어넘는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우스갯소리로 “못 쓰면 추사체라고 우긴다”는 말이나 “누구나 추사체를 쓸 줄 안다”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것을 추사 동시대 사람들은 “괴(怪)”라고 했다. 추사는 자신의 글씨를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추사는 김병학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마침 ‘봉래(蓬萊)’ 두 글자의 대자(大字) 편액이 있는데 제가 걸기에는 너무도 무미하고 또 전해 보관할만한 자도 없기에 만들어 영감께 부치오니 이 뜻을 깊이 살피어주실는지요? 근자에 들으니 졸서(拙書)가 세상 눈에 크게 쇠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이 글씨를 혹시 괴하다고 헐뜯지나 않을지 모르겠소. 이는 영감이 결정할 일이외다. 웃고 또 웃으며 이만 갖추지 못하옵니다.“ (전집 권4, 김병학에게 제 2신)

 

본래 괴(怪)하다는 것은 좋은 소리가 아니다. 더욱이 추사는 글씨가 고(古)하고 졸(拙)할지언정 기(奇)하거나 괴(怪)하면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대개 예서의 법은 차라리 졸(拙)할지언정 기(奇)가 없고, 고(古)해도 괴(怪)하지는 아니하여........사람들은 예자(隸字)에서 옛 법을 보지 못하고 흔히 괴를 범하곤 하지요. 이는 예체(隸體)에 대해 미처 널리 보거나 많이 듣지를 못하고서 자기 의사로 만든 것이니 아무리 천변만화(千變萬化)해도 괴이한 글자는 깊이 금절(禁絶)해야 될 것이외다.” (전집 권4, 심희순에게 제30신)

 

추사 자신이 평소 이렇게 주장해왔는데 사람들마다 자신의 글씨를 괴하다고 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 곤혹스러움을 추사는 이렇게 말했다.

 

“요구해온 서체는 본시 처음부터 일정한 법칙이 없고 뜻이 팔목을 따라 변하여 괴(傀)와 기(奇)가 섞여 나와서 이것이 금체(今體)인지 고체(古體)인지 나 역시 알지 못하며, 보는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것은 그들에게 달린 것이외다.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怪)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걸 어떡하겠소?” (전집 권5, 어떤 이에게)

 

그리하여 추사는 마침내 괴의 가치를 역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추사의 대련 <주광단전(珠光丹篆)>이라는 작품의 협서에 추사는 이렇게 당당히 말했다.

 

“구양순은 괴하고 저수량은 아름답다(歐怪褚娥)”

 

[김정희, <주광단전珠光丹篆> 125.5 x 26.8cm, 호암미술관]

일찍이 청명선생은 이 구절을 지적하여 “대체로 구양순은 강방엄정(剛方嚴正)하다고 보는 것이 상식인데

추사가 구양순의 글씨에서 괴를 발견한 것은 특이한 관점으로 추사체 연구에 매우 중요한 말”1이라고 했다.

추사는 나아가서 구양순2도 안진경도 괴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역설적 괴론(怪論)을 폈다.

 

【구양순도 역시 怪를 면치 못했으니 구양순과 더불어 힘께 괴하다고 불린다면 사람의 말을 두려워할게 

있으리까. 절차고니 탁벽혼이니 하는 것은 다 괴의 극치이며 안진경 역시 괴이하니 왜 옛날의 괴는 이와 같이

많기도 한 것인지요. 다만 그 괴한 것이 마치 옛날에 굴원이 온 세상이 다 취한 속에 홀로 깨어있었다는 격이니

누가 깨어있고 누가 취해 있나를 잘 분별할 일이요. 아! 본시 괴를 가식하고자 한다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지요.】

(전집 권5, 어떤 이에게)

 

 

유홍준박사는 우리가 추사체의 괴를 그냥 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며 역사상 예술가의 개성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괴(怪)’로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성(聖) 가족성당(Sagrada Familia)3'를 예로 들었다.

바르셀로나는 사실상 가우디의 건축으로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그의 대표작이면서도

아직 미완성 건축물인 파밀리아 성당은 외형뿐만 아니라 그 디테일에서까지 보통 사람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도깨비 솜씨 같은 기발하고 괴이한 건축물이라고 운을 뗀 뒤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이 성당의

특이한 외형적 모습에만 관심을 갖게 마련이지만 사실 가우디의 본질은 형태가 아니라 구조이다. 이 성당

구조의 견실성이란 어느 건축도 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가우디 건축의 고전으로 살아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완당의 글씨 또한 가우디의 건축에 비유하여 말하자면, 추사체의 본질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과 글씨 구성에 있는 것이다. 예술은 그렇게 예술로서 통하고 대가는 대가로서 통하는 것이다”라고

추사체가 갖는 괴(怪)의 가치를 설명했다.

 

     

[여전히 건축 중인 Sagrada Familia, 스페인 바르셀로나]

 

개인적인 얘기로 사족을 달자면 오래전, 지금보다도 미술에 더 무지했던 때에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을 방문했다가 피카소의 유소년시절 데생과 스케치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림 실력이 없어 되지도

않은 그림을 그려놓고 ‘피카소 그림’이라고 우겨대던 어린 시절의 식견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아둔함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그림만 그리는 피카소가 그런 정상적인 스케치와 데생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무지의 소치로 너무도 당연한 일에 충격을 받은 사실은 지금도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는 바와 같이 피카소는 청색시기, 장밋빛시기, 원시주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를 거쳐 다시 고전주의로

갔다가 초현실주의와 큐비즘을 거쳐 입체주의로 돌아왔다. 남들이 다 그리는 전통적 화풍을 따라갈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화풍을 가지려는 피카소의 노력이고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해괴함이란 느낌 밖에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 진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억만금도 아깝지 않은

그림이 되어 경매에서는 늘 사상 최고액을 경신하는 작품들이 되었다.

 

[피카소, <게르니카(Guernica)> 4  349 x 776cm, 1937, 유화, 스페인 마드리드 소피아 국립 미술관 소장]

 

어찌 피카소만 그랬을까?

만일 서양의 모든 화가가 고전주의 화풍만을 쫓았다면 그 후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같은 말과 그림들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만의 새로운 것, 새로운 방식을 찾아 절치부심하고 고뇌하는

일은 예술가라는 이름의 창작자 모두의 숙명이다. 추사 김정희가 ‘팔뚝 아래 309비를 갖추고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든’ 사연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怪’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추사체가 탄생되었으리라.

중국 북송 시대에 뛰어난 화론서 「임천고치(林泉高致)」를 남긴 곽희는 “선배 대가들을 본받아, 받아들이고

관찰하며 폭넓게 연구해서 스스로 일가를 이룰 것"을 주장했었다. 또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화가는 다른

화가 작품 중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들을 직접 그려 수집을 완성하는 수집가다. 나도 처음에 그렇게 시작했다.

그러다 나중에 다른 것이 되었지만....”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한국의 미 - 서예, 계간미술, 1986) [본문으로]
  2. 구양순(歐陽詢, 557 ~ 641) : 중국 당(唐)나라 초의 서예가. 처음 이왕(二王), 즉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후에 일가를 이루어 그의 서예명은 고려에까지 알려졌다. 모든 서체를 다 잘하였으나 특히 가지런한 형태의 해서에 훌륭하여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칭송했다. 우세남, 저수량, 설직과 함께 “초당 4대가”로 꼽힌다. (미술대사전, 두산백과) [본문으로]
  3. 파밀리아 성당으로도 불리는 Sagrada Familia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야 1852 ~ 1926)가 설계하고 서른 살 때인 1882년 3월 19일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6월 그가 죽을 때까지 지하의 크리프타와 네 개의 특이한 탑을 세웠다. 그후 공사가 거의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하여 현재까지도 계속 작업 중에 있다. 전체가 완성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지 못한다. [본문으로]
  4. 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 ~ 1973)의 대표작. 비극성과 상징성에 찬 복잡한 구성 가운데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극적인 구도와 흑백의 교묘하고 치밀한 대비효과에 의해 죽음의 테마를 응결시켜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된다. (두산백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