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39 - 불이선란(不二禪蘭)

從心所欲 2018. 8. 23. 15:03

 

추사는 강상시절에 그 동안 뜸했던 난초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추사의 난초그림은 <불이선란>이

워낙 유명하고 또 <난맹첩>1에 갖가지 형상의 난초그림이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정법(正法)으로 그리지 않고

모두 파격적으로만 그렸다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추사의 글씨가 아무리 괴(怪)해도 <반야심경>과 같은 반듯한 해서, <雲外夢中>과 <一琴十硏齋>처럼

예서의 법도에 충실한 작품이 있으며, 또 그처럼 법도에 기반을 두고 변화를 구했기 때문에 추사의 묘(妙)가

살아 있듯이 추사의 난초그림 역시 정도(政道)에서 그린 것이 있다.

 

오세창이 편집한 「근역화휘(槿域畫彙)」2에 들어 있는 <묵란>이란 그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농묵의 잎에 담묵의 꽃, 난잎 굵기의 다양한 변화, 가지런한 가운데 각기 다른 방향으로 필세가 뻗어나간 점 모두가 그렇다.

특히 난초그림은 잎이 오른쪽으로 퍼지는 것보다 왼쪽으로 펼쳐지는 좌란(左蘭)이 더 어렵다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것이 아주 능숙히 구사되어 있다. 다만 위로 꼿꼿이 올라간 긴 두 가닥에 붓이 약간 끌린 기가 있어 명작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김정희, <묵란>, 30.1 x 25.5cm, 서울대 박물관]

 

한편, <산심일장란(山深日長蘭)>은 해방 전부터 유명했던 작품이다. <산심일장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역화휘(槿域畫彙)」의 <묵란>과 거의 똑같은 방향으로 붓이 뻗어나간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난초 치는 사람의 습관으로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 한다. 다만 <산심일장란>은 화폭이 넓어 난엽이 한껏 멋있게 뻗어나갔다는 점에서 훨씬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난을 칠 수 있는 추사였기에 <불이선란(不二禪蘭)>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난초그림을 받았다는 정음거사(庭陰居士)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화제는 아주 간결하고 쉬우면서도 내용이 그윽하다.

 

산이 깊어 날이 길고                                                         

인적은 고요한데 향기는 넘쳐나네

山深日長  人靜香透

 

[김정희, <산심일장란>, 28.8 x 73.2cm, 일암관] 

 

추사의 난초그림 중 정법(正法)이 아니라 파격의 묘가 근대적 세련미로 나타난 작품으로는 단연 <향조암란(香祖庵蘭)>을 들 수 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서 대각선으로 한 줄기 난엽이 삼전법으로 뻗어내리고, 소략하게 잎 몇 가닥과 꽃

두어 송이만 그린 이 담묵의 난초그림은 여백의 미가 일품이고 또 오른쪽에 짙고 강한 금석기의 해서체로 쓴 화제가

그림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참으로 현대화가가 그린 작품보다도 더 현대적인 감각이다. 화제의 내용은

동기창의 향조암에 대한 내력이다.

 

난초는 모든 향기의 원조다. 동향광(董香光, 동기창)은 그가 거주하는 집에 향조암이라고 써붙였다.

蘭爲衆香之祖 董香光 題其所居室 曰香祖庵

 

[김정희, <향조암란>, 26.7 x 33.2cm, 개인소장]

 

추사 글씨의 파격적인 아름다움과 통하는 파격의 난초그림이라 할만하다는 평이다.

이런 추사의 난화(蘭畫)가 거의 입신의 경지로, 또는 거의 극단적인 파격으로 추구된 작품이 <부작란(不作蘭)>

이라고도 불리는 <불이선란(不二禪蘭)>이다. 그림의 첫 화제(畵題)가 “不作蘭畫....”로 시작되어 <부작란>이라

불렀지만 이 말이 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근래에는 화제의 내용을 좇아 <불이선란>으로 부르고 있다.

 

[김정희 <불이선란>, 55 × 30.6 cm, 개인소장]

 

이 작품은 오른쪽 하단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뻗어오른, 꺾이고 굽고 휘고 구부러진 담묵(淡墨)의 안엽 열두어

줄기에, 화심(花心)만 농묵으로 강조한, 아주 간결한 구도이다. 땅을 나타내는 풀이나 돌도 그려 넣지 않았고,

오직 거친 풀포기 같은 조아한 멋과 그로 인한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뿐이다.

그런데 추사는 오히려 바로 이 그림에서 자신이 추구했던 난초그림의 이상을 비로소 구현한 대만족을 느꼈다.

그는 그런 기쁨과 자랑을 한껏 담아 제시(題詩)를 썼다. 이 제시는 글씨 자체도 파격이 넘치지만 내려쓰기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는 장법도 특이하고 파격적이다.

 

난을 치지 않은 지 스무 해인데 우연히 난을 치니 천연의 본 모습이 드러났네

문을 닫고 찾고 찾고 또 찾은 곳 이게 바로 유마거사의 불이선이라네.

不作蘭畵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유마불이선(維摩不二禪)이란 『유마경(維摩經)』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에 있는 이야기이다. 모든 보살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을 설명하였으나, 최후의 유마거사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모든 보살들이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 감탄했다는 내용이다. 즉 이 작품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난초그림이 됐다는 것이다. 추사는 그렇게 자화자찬을 하고서도 성이 다 안 찼던가보다.

그래서 다시 또 덧붙였다.

 

만약 누군가가 (난 치기를) 강요한다면 또 구실을 만들어 비야리성에 있던 유마의 말없음(침묵)으로 거절하련다. 만향.

若有人强要 爲口實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그리고는 그 아래 난 잎이 꺾이면서 만들어진 여백에 또 이렇게 적었다.

 

초서와 예서의 기자(奇字) 쓰는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를 어찌 알겠으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漚竟)이 또 제하다..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漚竟又題

 

얼마나 기뻤으면 이렇게 글을 쓰고 또 썼을까! 그러나 추사의 이런 말들은 추사를 이해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입장에서 보면 오만으로 비쳤을 것이고 바로 그래서 많은 적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이어서 왼쪽 하단에 화제를 달았다.

 

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 번은 안 될 일이다. 선객노인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그런 뒤 나중에 시기를 달리해서 또 제(題)를 달았다.

 

오소산이 이를 보고선 얼른 빼앗아가니 우습다.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이쯤 되면 이 작품에 대한 추사의 자부심과 희열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여기서 말하는 달준은 추사를

가까이서 모시던 인물로, 혹자는 먹을 갈아주던 ‘먹동이’였다고 한다. 추사가 달준에게 글씨를 써준 것이 몇 전하는데

공경의 뜻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랫사람으로 보인다. 소산(小山)은 추사의 제자  오규일(吳圭一)의 호이다.

전각을 잘하여 추사 도장의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 훗날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갈 때 추사의 하수인으로

지목되어 오규일 역시 귀양살이를 갔을 만큼 긴밀한 사이였다.

 

<불이선란>은 많은 화제만큼이나 낙관도 많아 마치 명작이라는 징표를 더 얻은 듯한 감도 있다. 이 작품에

찍힌 인장 중 秋史. 고연재(古硯齋), 金正喜印, 묵장(墨莊), 낙문유사(樂文儒士) 등은 추사의 도인으로 추사가

직접 찍은 것이다. 그러나 오른쪽 아래에 찍혀 있는 9개와 왼쪽 위편의 호리병 도장의 신품(神品)은 소장자의

소장인 또는 감식가들의 감상인(鑑賞印)이다.

 

<불이선란>은 제작 배경, 화제의 글씨, 화제 속 인물의 활동, 화제가 문집에 편집된 위치 등 제반 사항을 고려할

때 강상시절의 작품으로 추정되어 추사의 예술체계에서 강상시절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완당평전』(유홍준著, 2002, 도서출판 학고재)을 근간으로 하여 다른 자료들을 참조, 가필, 재구성한 글입니다.

 

 

  1. 정식명칭은 ‘김정희 필 난맹첩 (金正喜 筆 蘭盟帖)’으로 보물 제1983호이다. 추사의 묵란화(墨蘭畵) 16점과 글씨 7점을 수록한 서화첩으로, 김정희의 전담 장황사(粧䌙師, 그림과 고서적을 복구하고 보존하는 직업) 유명훈(劉命勳)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글씨 뿐 아니라 사군자(四君子)에도 능했던 김정희는 관련 작품을 여럿 남겼지만 난맹첩처럼 묵란만 모은 사례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난의 형상을 다양한 구도와 모습으로 구현했으며 김정희가 추구한 사란법(寫蘭法)에 입각해 개성적인 필묵법(筆墨法)을 구사한 대표작으로 꼽힌다. 화면에 쓰인 제시(題詩) 역시 난(蘭)에 관한 고사(故事)와 난 그림에 능했던 중국의 인물들, 난의 속성 등에 관한 것으로, 문사철(文史哲)에 해박했던 김정희의 학술적 경지를 보여준다. 서예적 필법으로 난을 다양하게 잘 그렸던 김정희의 화풍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며, 후대 화가들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문화재청) [본문으로]
  2. 근역화휘(槿域畵彙)는 천(天), 지(地), 인(人) 3첩(帖)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역화휘에는 천첩(天帖)에 25점, 지첩(地帖)과 인첩(人帖)에 각 21점, 도합 67점의 그림이 실려 있다. 시기별로는 조선 초기 2점, 중기 8점, 후기 30점, 말기 이후가 27점이며, 주제별로는 산수 18점, 인물 4점, 사군자 14점, 화조 10점, 동물 5점, 물고기와 게가 7점, 초충이 9점이다.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집시기는 알 수 없다. 서울대학교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