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42 - 과천시절

從心所欲 2018. 10. 3. 18:15


지세로 설명하면 과지초당은 청계산 옥녀봉 남쪽자락의 아랫마을이다. 그래서 추사는 과천집을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의 집이라고 하여 종종 ‘청관산옥(靑冠山屋)’이라고 부르곤 했다. 청관산옥이라고 낙관한 대표적

작품이 ‘먹동이’ 달준에게 써준 시첩이다. 앞부분의 오른쪽부터 4줄은 이백(李白)의 <추포가(秋浦歌)> 中

16수(首)로 강촌의 고요한 정경을 읊은 시이다.


秋浦田舍翁 採魚水中宿

妻子張白鷴 結罝映深竹

추포의 시골 노인장

고기를 잡느라 강 속에서 자네.

아내가 백한(白鷴)을 잡으려고

쳐 놓은 그물이 깊은 대숲에 어른대네1.



[김정희 <시첩> 앞부분, 전체 29.0 x 1445.5cm, 정관재]



[[김정희 <시첩> 마지막 부분]


글씨는 금석기가 완연한 반듯한 해서체다. 마지막 구절에 “청관산옥에서 여름날 한가하게 운자(韻字)도 없이

아무렇게나 읊어 팔을 한번 시험하며 달준(達俊)에게 써주다”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현재 이 시첩은 ‘一, 士’

등의 획이 추사의 획과 격이 다르다는 등의 이유로 위작시비에 휘말려 있다.


권돈인은 추사와 평생 지기였다. 추사와 함께 유배에서 풀려난 권돈인은 경기도 광주 퇴촌(退村)에 새 집을

마련하고 거기서 말년을 보냈다. 추사는 권돈인이 퇴존에 새 별서를 마련하고 자리 잡은 것을 축하하며 <退村>

두 글자를 쓴 현판을 권돈인에게 보내면서 자신의 글씨에 대하여 이렇게 글을 적었다.


“退村. 두 큰 예자(隸字)를 팔을 억지로 놀려 써서 바치오니 글씨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필획의 사이에

굴신(屈伸)의 뜻을 붙였으니, 이해하여 받아들여 주시고 공졸(工拙)을 또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일반적인 사소한 문자일지라도 군자가 서로 주고 보답하는 데에나 친구 사이에 서로 경계를 하는 데에

모두가 반드시 경계를 붙이는 것이 있었으니, 옛사람들은 원래 맹목적으로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바로 하나의 노리개를 완상하는 일이며 하나의 천박한 선생[俗師], 글자쟁이[字匠]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억지로 꾸미겠습니까? (왕희지가 글씨 하나와 거위 한 마리를 바꾸었다는데) 비록 거위 백 마리와 바꾼다

하더라도 또한 속서(俗書)일 뿐입니다. 제 글씨가 매우 졸렬하기만 하더니 이제야 속서는 면했음을 알겠습니다.“

(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27신)


추사가 이렇게 스스로 명작이라고 자부했던 작품이 없을 만큼 추사는 자신의 글씨가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退村>이라는 작품은 현재 소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추사가 이 무렵 쓴 글에 <만수기화万樹琪花>라는 작품이 있다. ‘부탁하신 글입니다. 이재 상국(권돈인) 대가

께서 바로 잡아주시길 바랍니다.(書應 彛齋相國方家正之)’ 라고 정중하게 관기를 쓰고 과산(果山) 김정희라고

낙관한 행서 대련이다.


万樹琪花千圃葯

一莊修竹半牀書

만 그루 기이한 꽃에 천 이랑의 작약

대나무 두른 집 한 채 평상의 반은 책


[김정희 <万樹琪花> 각폭 127.4 x 31.2cm, 간송미술관]


고급 종이에 윤기 나는 먹으로 거침없이 씩씩하게 써 내린 이 대련은 행서는 행서이되 획의 운용에는 예서의

필법이 간간이 들어있어 변화가 무쌍하다.


추사의 과천 생활은 독서하고,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글씨를 쓰고, 벗을 찾아가고 벗이 찾아오는, 지극히

담담하고 조용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귀공자로 태어나 빼어난 기량으로 학문과 예술에서 명성을 날리고

가문에 힘입어 출세가도를 달리며 ‘완당바람’을 일으키던 중년이나 제주와 북청으로 귀양살이 가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유배시절과는 또 다른 만년의 고적한 생활 속에서 추사는 오히려 삶의 평범성과 보편적 가치를

몸으로 깨달으며 자신의 인생과 예술 모두를 원숙한 경지로 마무리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과천시절 추사의

시를 보면 담담하면서도 삶의 관조가 은근히 배어있다. 추사는 어느 날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자적(自適)하는 생활을 이렇게 적었다.


“.........간혹 옛 벗을 만나면 그윽하고 먼 데를 마음껏 구경하고.......낮에는 역사책을 읽고 새벽에는 경전을

공부하며 해가 기울도록 벗을 붙들고 밤중이면 귀신과 얘기하며 밤낮의 구경을 다하여 흠뻑 젖어드는 흥취를

실컷 푼다면 그 즐거움이 거의 죽음을 잊은 만도 하지 않겠소.” (전집 권5, 어떤 이에게)


유홍준 박사는 <시골집 봄날(전사춘일田舍春日)> 시축(詩軸)을 추사의 과천시절 시와 글씨의 대표작으로

꼽았다. 폭 30여cm, 길이 약 350cm의 장권(長卷)으로 유려한 필치와 능숙한 행간 구성 그리고 점·획 하나하나

에서 쇳조각을 오려낸 듯한 강한 기상과 삭풍이 몰아치는 듯한 매서운 필세를 느끼게 하는 명작 중의 명작이라

고 칭찬했다.


[김정희 <시골집 봄날(田舍春日)> 첫 면, 전체 27.6 x 357.0cm, 간송미술관]


[김정희 <시골집 봄날(田舍春日)> 마지막 면]


헌데, 불행하게도 이 작품 역시 위작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추사의 취미는 독서였다. 술은 젊었을 때는 즐기다 나중에 끊었다. 추사 자신이 “나는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조금 마셔도 기분이 울적해 이로써 술을 끊었다”고 했다. 또한 잡기로 장기와 바둑도 좀 두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박보(博譜)2장기 책은 추사의 필사본이라는 주장도 있다.『완당선생전집』에는

바둑에 관한 시가 세 편 실려 있는데 그 중 <자연기(自然碁)>라는 시에서 자신은 바둑을 둘 줄 몰라 곁에서

구경이나 했다고 하는데 사실 재미있게 구경했다면 바둑을 모를 리가 없는 일이다. 아마도 바둑을 즐기기는

했어도 거기에 빠져 지내지는 않았던 듯 하다.

이런 추사가 칠십이구초당 시절에 서첩과 나무현판으로 아주 특이한 작품을 남겼다.


[김정희, <一讀二好色三飮酒> 21.0 x 73.0cm, 개인소장]


‘일독(一讀) 이호색(二好色) 삼음주(三飮酒)’. (세상사는 맛의) 첫째는 독서(공부)이고, 둘째는 여자요, 셋째는

술이라는 뜻이다. 유홍준 박사는 추사 글씨의 전서기와 글자 구성에서 멋이 느껴지고 단아한 가운데 흥취가

엿보인다고 했다. 추사 작품의 위작(僞作) 시비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이 작품은 내용의 파격성 때문에

위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반면 오히려 그 호방함 때문에 진품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완당평전』(유홍준著, 2002, 도서출판 학고재)을 근간으로 하여 다른 자료들을 참조, 임의 가필, 재구성한 글입니다.



  1. 고풍 악부 가음(2014. 도서출판 역락) [본문으로]
  2. 장기 두는 법을 풀이한 책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