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43 - 노과시절의 졸(拙)과 허(虛)

從心所欲 2018. 10. 6. 14:30

과천시절 추사는 글씨를 무수히 써서 지금 남아있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과천시절에는 낙관을

할 때 명백히 이 시절 작품임을 알려주는 노과(老果), 과파(果坡), 과형(果兄), 과산(果山), 청관산인(靑冠山人),

과칠십(果七十), 칠십일과(七十一果) 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실수 없이 가려낼 수 있다. 여기에 간찰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자못 방대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원숙한 노경의 명작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으니 추사의 예술은

과천에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추사는 과천시절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 허물을 벗었다고

권돈인에게 자신감을 표하였다. 그 경지를 ‘잘되고 못 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고 했다.

이 말이야말로 추사체의 본령을 말해주는 한마디이다.

강상시절 추사가 글씨에서 새롭게 발견한 경지는 ‘괴(怪)’의 가치였다. 즉 개성의 구현이었다. 그런데 과천으로

돌아온 추사는 ‘졸(拙)’함을 말하고 있다. 기교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교를 감추고 졸함을 존중하는

것이니, 이는 곧 노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즉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는 의미의 ‘졸’이다. 후세 사람들이

추사의 글씨는 꾸밈이 없다고 한 얘기는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추사 글씨의 본질은 괴와 졸의

만남이라고 할 만하다. 추사가 사용한 ‘불계공졸’과 ‘수졸산방(守拙山房)’이라는 도장도 혹시 이때부터 사용된

것일지도 모른다.

 

[김정희 도인 '수졸산방']

 

추사는 이렇게 졸의 가치를 찾으면서 괴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해내었다. 본래 추사 글씨의 ‘괴’란 ‘괴’ 자체를

추구해서 나타난 것이 절대로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작위적인 ‘괴’를 오히려 경멸하며 추사는 이렇게 말했다.

 

“요새 사람들이 속된 글씨를 보면 모두 객기를 부려 비양(飛揚)하는 것만을 숭상하여 초서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하나의 부적을 만들과 마는 실정이다.” (전집 권7, 김석준1에게 써서 보여주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추사는 그 “괴‘가 결코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개성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추사는 이를 "허화(虛和)’라고 했다. 어떤 이는 추사체의 특징을 ‘기(氣)’의 글씨로 말하기도

한다. 기는 기로되 뒤에 운(韻)이 따르는 주기후운(主氣後韻)이라고도 했다. 유최진2이 추사체를 설명하여

괴상하다고 한 것은 ‘기’를 말함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한 것은 ‘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경지가 곧 ‘허화’이다. 추사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 사람들이 써낸 글씨를 보니 다 능히 허화하지 못하고 사뭇 악착한 뜻만 많아서 별로 나아간 경지가

없으니 한탄스러운 일일세. 이 글씨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허화한 곳에 있으니 이는 인력으로

이르러 갈 바가 아니요, 반드시 일종의 천품(天品)을 갖추어야만 능한 것이며, 심지어 법을 갖추고 기(氣)가

이르러 가면 한 경지가 조금 부족하다 해도 점차로 정진되어, 스스로 가고자 아니해도 곧장 뼈를 뚫고

밑바닥을 통하는 수가 있게 마련이라네.” (전집 권4, 김석준에게, 제4신)

 

추사는 ‘허화’의 경지를 늘 동경해왔다. 추사는 옛날에 왕헌지가 벗 대규를 만나러 갔던 고사(古事)3를 빌려

허화로움의 가치를 적절하게 설명했다.

 

“옛사람이 글씨를 쓴다는 것은 바로 저절로 쓰고 싶어서 쓴 것이다. 글씨 쓸만한 때는 이를테면 왕헌지의

산음설도에서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는 그 기분인 것이다. 때문에 가고 머무는 뜻에 따라

조금도 구애받는 것이 없으며, 서취(書趣) 역시 천마(天馬)가 공중을 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지금 글씨를

청하는 자들은 산음에 눈이 오고 안 오고를 헤아리지 않고 또 왕헌지를 강요하여 곧장 대규의 집으로 향해

가는 식이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전집 권8, 잡지)

 

추사가 만년에 이르러 강조하는 그 허화로움과 고졸함의 가치는 그의 글씨에 반영되었다. 그래서 추사의

‘괴(怪)’는 아무 잘못이 없는 천연스러운 경지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추사의 과천시절 글씨 중 <산숭해심(山崇海深)>과 <유천희해(遊天戱海)>는 추사의 대표작으로도 꼽힐 만큼

유명한 작품들이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라는 山崇海深이란 글귀는 옹방강이 ‘실사구시’정신을 풀이한 

속의 한 구절이다.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遊天戱海 구절은 원래 양무제(梁武帝)가 종요4의 글씨를

평한 ‘구름과 학이 하늘에서 노닐고 갈매기 떼가 바다에서 노닌다(雲鶴遊天 群鴻戱海)’는 글에서 유래된 것이다.

특히 이 구절은 청나라 건륭황제가 만든 『삼희당법첩(三希堂法帖)』5의 맨 첫머리에 황희지보다도 1세기 반

앞선, 서예사의 종장격인 종요의 진적으로 실려 있어 서가(書家)들은 대개 알고 있고 또 즐겨 써온 글귀이다.

 

[김정희  <山崇海深>, 42.0 x 207.0cm 삼성미술관]

 

[김정희   <遊天戱海> , 42.0 x 207.0cm 삼성미술관]

 

<山崇海深>과 <遊天戱海>는 본래 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글씨의 모양이나 내용 그리고 종이의 질과

크기로 보아 그렇게 추정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작품 두 점 값을 받기 위하여 이를 따로 떼어 팔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山崇海深>에 낙관이 없는 것도 그 까닭으로 본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삼성미술관에서 두 점을

함께 소장하고 있다.

이 글씨는 각기 폭 42cm, 길이 207cm의 크기로 합치면 무려 420cm에 이르는, 먹으로 종이에 쓴 글씨로는 추사

작품 중 최대 크기로 전서, 행서, 예서체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글씨의 균형감과 안정감 그리고 움직임을

포함하여 갈필을 사용해 속도감과 힘을 담은 추사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유홍준박사는 이 글씨를 불계공졸의 명작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위작 논쟁의 중심에 있다.

 

유홍준박사는 『완당평전』서장(序章)에서 “추사의 글씨는 당대부터 위작이 많았다. 속설에 시중에 나도는

추사 글씨의 9할이 가짜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추사 작품에 대한 위작 논란은 끝이 없다. 추사 작품 사진 가운데 빨간 색 동그라미나 별도의

표시가 있는 획이나 글자들은 모두 위작 논란이 제기되었다는 의미다.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들이 없는

상태에서 심미안에 입각한 추론을 바탕으로 한 논란이 대부분이라, 위작이든 진품이든 어느 한쪽의 의견이

우세하더라도 논란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 현실이다,

 

[김정희 <시골집 봄날(田舍春日)> 첫 면]

 

[김정희, 칠언절구 <청성초자>]

 

 

<山崇海深>에 대한 최근의 의혹은 탁본을 임모한 것이라는 요지이다. 일반적으로는 ‘산해숭심(山海崇深)’으로 쓰는

구절인데 海자와 崇자의 위치가 엇바뀐 것에서부터 결구와 붓의 속도, 덧칠 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완당평전』(유홍준著, 2002, 도서출판 학고재)을 근간으로 하여 다른 자료들을 참조, 임의 가필, 재구성한 글입니다.

 

  1. 김석준(金奭準, 1931 ~ 1915) 과천시절 추사가 가장 사랑한 제자였다. 특히 손가락으로 쓰는 지두서(指頭書)를 잘 써서 스스로 묵지도인(墨指道人)이라고 하였다. 김석준은 본래 동갑인 역매 오경석과 함께 우선 이상적의 문하생이었는데 선생을 따라 추사의 과천집을 드나들며 추사로부터 글씨와 시를 직접 지도받았다. [본문으로]
  2. 유최진(柳最鎭, 1791년 ~ 미상) : 서화가로서 조희룡 등과 교유가 깊었으며, 김정희를 따라 명승지를 편력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3. 산음설도(山陰雪棹)라는 고사로 중국에서도 전하는 책에 따라 주인공이 왕희지, 왕휘지(왕희지의 다섯째 아들), 왕헌지(왕희지의 일곱째이자 막내아들)로 일정치 않다. 완당평전에서는 왕헌지의 일화로 소개되었다. 왕헌지가 산음(山陰)에 살 때 하루는 밤눈이 개자 친구인 대규(시문서화에 능하고 고금에 탁월하였던 것으로 전해짐)가 보고 싶어 달빛을 타고 대규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대규의 집이 바라보이는 강가에 다다라서는 굳이 대규를 만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냥 돌아와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흥(興)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을 뿐이다. 어찌 꼭 만나봐야 그 흥이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고사이다. [본문으로]
  4. 종요(鍾繇, 151 ~ 230)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정치가이자 서예가로 팔분(八分)과 해서, 행서를 잘했으나 후세에는 오로지 해서의 명수로 알려졌다. 왕희지(王羲之)가 특히 그의 글씨를 존경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술대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5. ‘삼희당석거보급법첩(三希堂石渠寶笈法帖)’.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칙찬(勅撰)의 법첩(法帖) 32책. 삼희당은 북경 고궁의 양심전(養心殿) 서실(西室)인데, 건륭제가 그 초년에 왕희지(王羲之)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왕헌지(王獻之)의 ‘중추첩(中秋帖)’, 왕순(王珣)의 ‘백원첩(伯遠帖)’등 삼희(三希)를 손에 넣고 그것을 돌에 새겨서 보존하기 위해 지은 당으로, 법첩의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미술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