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46 - 병진년(丙辰年)

從心所欲 2018. 10. 28. 20:08

병진년 5월, 그러니까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 어느 날, 전혀 모르는 스님이 추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에 자신은 호운(浩雲)이라는 중으로 해붕(海鵬)대사의 문도(門徒)인데 스님의 영정을 만들었으니 거기에

화상찬(畵像贊)1을 하나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편지를 받고 추사는 까마득한 옛날 같은 40년 전 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추사의 나이 30이 되던 1815년 겨울,

해붕스님이 수락산 학림암에 있을 때 추사는 산사로 스님을 찾아가 하룻밤을 지새며 공각(空覺)에 대해 일대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때 마침 초의가 해붕스님을 모시고 있어 두 사람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추사는

이때부터 해붕대사의 높은 경지를 존경해왔었다.

이에 추사는 ‘평생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홀연 서신을 보내오니 대단히 기이한 일이나, 해붕대사는 자신의

옛 벗으로 그 뒤를 잇는 제자가 없다고 들었는데 영정을 만들어 공양하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놀라며 영정을

만드는 일이 자신의 뜻에 맞지는 않으나 신병을 무릅쓰고 글을 써 보낸다는 편지와 함께 <해붕대사 화상찬>을

직접 짓고 써줬다.

 

[김정희 <해붕대사 화상찬>, 28.0 x 102.0cm, 청관재]

 

[<해붕대사 영정>2, 비단에 채색, 77.0 x 116.2cm, 선암사]

 

【海鵬之空兮 非五蘊皆空 卽空卽是色空......

해붕대사가 말하는 공(空)은

오온개공(五蘊皆空)3의 공(空)이 아니라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空)이다......】

 

‘해붕대사 영정에 제(題)하다’라고 한 이 글은 선게(禪揭)를 방불케 하는 오묘한 선미(禪味)가 느껴진다.

특히 이 글은 한문 원문으로 읽을 때 “공(空)......공(空).......공(空)......공(空)....” 소리를 내는 리듬감 때문에 더욱 절묘하게

들린다. 현재 전하는 해상찬 원문에는 훗날 초의선사가 이 화상찬을 보고 깊은 감회에 젖어 지은 발문이 함께 붙어있다. 

 

<해붕대사 화상찬>은 추사의 해서체 글씨 중 최고의 명작일 뿐만 아니라 추사의 예술이 어느 높이까지 올랐는가를

말해주는 기준작이 될 만하다고 한다. 혹자는 추사의 만년 글씨가 졸(拙)한 맛이 강한 것은 그가 제주도 시절부터

눈꽃[眼花]이 피었다며 고통을 호소한 백내장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는데 그런 의심을 단숨에

벗겨주는 정교하고 치밀한 글씨이다.

반면 호운스님에게 보낸 편지는 추사의 행초(行草) 중 가장 휘갈겨 쓴 글씨로, 어떤 거리낌도, 어떤 욕심도

없으면서 필법의 달인만이 보여주는 능숙함이 구현되어 있다는 평가다.

 

[김정희, 호운대사에게 보내는 편지, 28.0 x 56.0cm, 청관재]

 

추사가 만년에 과천 집과 봉은사를 오가며 어떤 생활을 하였는가는 권돈인이 칠순을 넘긴 고령에 금강산을

다녀온 뒤 보낸 장문의 편지 속에도 담겨있다.

 

“달포 전의 절 행차 때에는 이미 재차 합하를 방문하지는 못하고 절을 향해 용감하게 곧바로 가니,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금상(金像)을 환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때 향등(香燈)을 켜고 포갈을 입은 승려 서넛이 있어

충분히 먹을 갈고 종이를 펴고 하는 일을 도와줄 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시간 써서 가득 쌓인 병풍서

(屛風書)와 연구(聯句) 등을 다 수습하고 보니, 크고 작은 양목(洋木, 唐木)이 수백 척이나 되고 지판(紙版)의

편액서(扁額書)도 이와 같았습니다. 이렇게 3 ~ 4일 동안 멋대로 마구 붓을 휘둘러 답답함을 일체 시원하게

풀었습니다. 또 풍문을 듣고 와서 농지거리하는 산승(山僧) 약간의 무리가 있어 오는 대로 수응수답을 하다

보니, 먹이 다하여도 팔의 힘은 아직 남아 있어 퍽 일소(一笑)를 느꼈습니다.” (전집 권3, 권돈인에게 제21신)

 

[일제 강점기 때의 봉은사 모습]4

 

추사의 살아생전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글은 아주 드물다. 그런데 정말 진기하게도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에 상유현이라는 분이 쓴「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가 있어 추사의 고고한 마지막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 글은 김약슬5 선생이 인사동 고서점에서 필자 미상의 상태로 처음 발견하여 수소문과

후손의 확인을 거쳐 1955년 「도서」라는 잡지에 소개함으로써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상유현은 평생 관직을 가진 적은 없으나 본래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조선 팔도와 중국을 유람했던

인물이다.  『전수만록(顫手漫錄)』이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그 속에 「추사방현기」가 들어 있다. 그는

글머리에 추사 선생을 찾아가게 된 경위부터 밝혔다.

 

“내가 젊었을 때 병진년(1856) 봄과 여름 사이에 간암(磵菴), 어당(峿堂), 단번(檀樊) 세 어른이 과천의

반곡(盤谷)에 계신 식암(寔庵) 선생 댁에 와 주무시고 봉은사에 가셨다. 추사 선생을 뵈러 간 그때 선생은 절에

머무르고 있었다. 식암공도 같이 갔고 나도 모시고 따라갔다.”

 

여기서 어당은 이상수로, 그는 이미 북청으로 유배가 있는 추사를 찾아간 적이 있는 인물로 침계 윤정현의

문인이다. 단군 이래 최고의 금강산기행문으로 꼽기도 하는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의 저자이다. 그의 『동행산수기』에이런 대목이 있다.

 

【백탑동(白塔洞)이 금강산에서 뛰어난 구경거리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들었다. 그러나 길이 너무 험하여 찾기가 어려웠다. 흔히 승려에게 속는다고 하였다. 돌에 ‘백탑동천’이라는 글씨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근거로 백탑동을 찾았다고 오해한다....(중략)...

후에 추사 김정희를 만났다. 금강산에 갔을 때 백탑동을 구경했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추사가 웃으며 그곳은 백탑동이 아니라고 하였다. 결국 나는 백탑동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추사의 말을 듣고 탄식하였다. 인생살이도 갈래가 많구나. 그 심오한 경지는 보통사람은 찾기가 어려운 법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름붙여 무슨 장한 것을 본 듯이 꾸며댄다. 후대 사람들을 그르친 것이 또한 적지 않다. 내가 백탑동이라고 본 것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단번, 간암, 식암은 어당의 시문에 자주 나오는 벗들로 윤정현의 제자들이다. 그러니 상유현은 추사의 손자 제자쯤 되는 것이다.

 

 

이 글은 유홍준著『완당평전』(2002, 도서출판 학고재)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 초상화 속 인물과의 만남을 글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림이 다 전하지 못하는 초상화 속 인물의 인품을 소개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어 초상화의 의미를 더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본문으로]
  2. 초상화에 씌어 있는 화상찬은 추사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추사의 글씨체로 옮겨 적은 것이다. [본문으로]
  3. 오온(五蘊)은 불교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색온(色蘊)과 정신요소인 4온을 합쳐 부르는 말. 온(蘊)이란 곧 집합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데, 오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이다. 처음에는 오온이 인간의 구성요소로 설명되었으나 더욱 발전하여 현상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오온설의 철학적 의미는 모든 인간계가 실체가 없는 가화합(假和合), 개공(皆空)으로 이루어진 현상적 존재이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 오온개공(五蘊皆空) 등의 말뜻이 그것이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4. 1933년 刊 '조선사랄 31본산 사진첩'에 실린 봉은사 전경. 당시 봉은사는 경기도 광주의 산사(山寺)였다. [본문으로]
  5. 김약슬(金約瑟, 1913 ~ 1971) : 서지학자, 장서가. ‘추사의 선학변’이라는 논문으로 추사 연구에 크게 기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