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48 - 절필(絶筆)

從心所欲 2018. 11. 6. 15:26

1856년 10월. 추사는 그때도 봉은사에 있었다. 당시 봉은사에서는 남호(南湖), 영기(永奇)스님이「화엄경」,

정확하게는「화엄경수소연의본(華嚴經隨疎演義本)」80권을 직접 손으로 베껴 쓰고 이를 목판으로 찍어

인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화엄경판이 마침내 완성되어 경판전을 짓고 보관하게 되어 그 현판

글씨를 추사에게 부탁하였다. 그때가 9월말이었다.

추사는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글자 하나의 크기가 어린아이 몸통만한 대자(大字)로 <版殿(판전)> 두 글자를

완성했다. 그리고 옆에 낙관하기를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 病中作)’이라고 했다.

 

[김정희 <版殿>, 77.0 x 181.0cm, 봉은사]

 

 

이 글씨는 결국 추사의 절필(絶筆)을 고하는 작품이 되었다.

유홍준 박사는 이 글씨가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에 달한 것이라 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 있어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러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봉은사 <版殿> 현판 액틀에는 작은 글씨로 누군가가 써놓은 오래된 글씨가 하나 있는데, 추사가 이 글씨를

쓰고 난 사흘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라 한다. 사흘 뒤 그 날은 병진년 10월 10일이다.

유홍준 박사는 이 글씨가 아무리 봐도 사흘 뒤 세상을 떠날 노인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대작이라고 했다. 하지만

또 역으로 생각하면 생의 마지막 기력을 <版殿> 두 글자를 쓰는 데 다 바쳤다는 얘기도 된다고 해석했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 창조적 열정을 알뜰히 모아 일구어낸 마지막 불꽃인 셈이고, 그렇다면 추사의 최후는 전장에서

쓰러진 장군의 죽음처럼 장렬한 것이라고 했다.

 

병진년(1856) 10월 10일.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이 추사를 장사지낸 곳은 예산 용궁리 지금의 추사 고택

왼쪽 옆이다.

 

[추사고택 옆의 김정희 묘소]

 

 

추사 사후 30년이 지나 『철종실록』이 편찬될 때 사관(史官)들은 1856년 10월 10일 기사(記事)를 쓰면서

추사에 대한 ‘졸기(卒記)’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철종 7년, 10월 10일 갑오, 전(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해서·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없었으며, 그의 작은아우 김명희와 더불어

훈지처럼 서로 화답하여1 울연히 당세의 대가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

(家禍)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에선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

 

권돈인은 추사의 제자인 화원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추사의 초상을 그리게 하여 1년 뒤인 1857년 초여름에

예산 향저 재각(齋閣)에 봉안했다. <화상찬(畫像贊)>과 <秋史影室(추사영실)>이라는 현판도 직접 쓰고 새겼다.

 

[이한철 <김정희 초상>, 1857, 비단에 채색, 131.5 x 57.7cm, 국립중앙박물관]

 

 

[권돈인 <秋史影室> 2  원본 간송미술관 소장]

 

 

권돈인은 추사의 영정을 추사영실에 모셔놓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는데, 옛 친구를 생각하는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8수의 시를 써서 추사의 아들 상무에게 주었다. 권돈인은 <그대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했으나 그리기가

어려워 이렇게 시로 읊는다>며 이렇게 읊었다.

 

 【고요한 가운데 그대 생각하며 불러본들 어이하리!

  경전을 배운 집, 그림 그리던 곳은 옛적에 배회하며

  노닐던 곳.

  천년, 만년토록 끝없이 이어지는 일은

  모두 한순간의 꿈같은 일로 보내버린다

  산해숭심은 옛것을 연구하는 데 들어가는 대문

  경전을 연구하고 진실을 밝히는 일을 누가 다시 할거나!

  예림(藝林)에는 이때부터 나루터가 없으리니

  슬프다. 하늘 끝에서 예전에 준 말씀이로다.】

 

추사 사후 2년이 되는 1858년, 철상하기 직전에 초의선사는 홀로 추사의 묘를 찾아와 통곡의 제문을 바쳤다.

 

【무오(戊午)년 2월 청명일에 방외(方外)의 친구 초의는 한잔의 술을 올리고서 김공 완당선생 영전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좋은 환경에 태어나서 어찌 굳이 좋은 때를 가리려 했나이까. 신령스런 서기로서, 어두운

세상에 따랐으면 그게 곧 밝은 세상이었을 텐데, 이를 어기고 보니 기린과 봉황도 땔나무나 하고 풀이나 베는

나무꾼의 고초를 겪은 것입니다....

 슬프다! 선생은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닦아 여러 학문을 체득하시고, 글씨 또한 조화를 이루어 왕희지·

왕헌지의 필법을 능가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나 세월의 영화를 휩쓸고, 금석(金石)에서는 작은 것과 큰 것을

모두 규명하여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치셨나이다. 달이 밝으면 구름이 끼고, 꽃이 고우면 비가 내립니다.....

 슬프다! 선생이시여. 사십이 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 세상에서는 오랫동안 인연을 맺읍시다. 생전에는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도에 대한 담론을 할 제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제면

그대는 실로 봄바람이나 따스한 햇볕 같았지요.

 손수 달인 뇌협(雷莢)과 설유(雪乳)의 차를 함께 나누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대는 눈물을 뿌려 옷깃을

적시곤 했지요. 생전에 말하던 그대 모습 지금도 거울처럼 또렷하여 그대 잃은 나의 슬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나이다.

 슬프다! 노란 국화꽃이 찬 눈에 쓰러졌는데 어쩌다 나는 이다지 늦게 선생의 영전에 당도했는가. 선생의 빠른

별세를 원망하나니, 땅에 떨어진 꽃은 바람에 날리고 나무는 달그림자 끝에 외롭습니다.

선생이시여! 이제는 영원히 회포를 끊고 몸을 바꿔 시비의 문을 벗어나서 환희지(歡喜地)에서 자유로이

거니시겠지요. 연꽃을 손에 쥐고 안양(安養)을 왕래하시며 거침없이 흰 구름 타고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가벼운 몸으로 부디 편안히 가시옵소서. 흠향하소서.】 (『초의선집』)

 

[허련, <완당선생해천일립상>3 종이에 담채, 51.0 x 24.0cm, 개인소장]

 

 

 

이 글은 유홍준著『완당평전』(2002, 도서출판 학고재)을 근간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1. 훈지상화(壎篪相和) : 훈(壎)은 흙으로 만든 나발이고, 지(篪)는 대로 만든 횡적의 일종이다. 형이 질나발을 불면 아우는 이에 화답하여 지를 불어 합주한다는 뜻이다. 형제가 서로 화목함을 이르는 표현으로 시경(詩經) 소아(小雅)에서 유래한다.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 이담북스) [본문으로]
  2. 권돈인은 추사의 아들 상무가 추사영실 세우는 일을 도왔고 그 현판을 직접 썼다. 추사체를 따른 글씨로 글자 오른편 위쪽이 올라가는 특징을 보인다. [본문으로]
  3. 소치가 추사의 유배시절 모습을 소동파의 입극도(笠屐圖)를 번안하여 그린 것으로,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모습으로 유배객의 처연한 자태를 나타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