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49

추사 김정희 38 - 추사체의 특질 “怪”

청명 임창순 선생은 추사체가 보여주는 미적 특질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제주로 간 이후의 글씨는 그가 평소에 주장하던 청고고아(淸高古雅)한 서풍이 일변하여 기굴분방(奇崛奔放)한 자태를 보이기 시작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전통적인 글씨가 의관을 단정히 차린 도학군자(道學君子)와 같다면 추사의 글씨는 예절과 형식을 무시한 장난꾼처럼 보였을 것이다. 곧 그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그대로 붓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작자의 개성이 살아있고 붓을 잡았을 때의 작자의 감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점과 획의 운용이 강철 같은 힘을 가졌고, 공간 포치에 대한 구상은 모두 다 평범을 초월한 창의력이 넘친다. 그대로 현대회화와 공통되는 조형미를 갖추었으니 이는 과거 어느 작가도 시도..

추사 김정희 2018.08.16

추사 김정희 37 - 추사의 별호(別號)

우리는 늘 ‘추사 김정희’로 기억하고 ‘추사 김정희’로 부른다. 그러나 김정희의 호가 ‘추사’만 있었던 것은아니다. 30세 이후에는 오히려 추사보다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더 즐겨 썼다. 뿐만 아니라 김정희는 항상 그때의 상황, 그때의 심정, 그때의 서정에 따라 새로 아호를 짓고 그것을 관지1로 나타내곤 했다. 강상시절에 쓴 호만 하더라도 노호(鷺湖), 묘호(泖湖), 삼묘(三泖), 삼호(三湖) 등이 있다. 김정희가 그런 식으로 사용한 아호, 관지, 도인(圖印)에 씌어있는 글귀는 무려 200개가 넘는다. 혹자는 이를 두고 추사의 멋이라고 하고 또 혹자는 일종의 변덕이라고 비웃지만, 역시 추사만이 가질 수 있었던 ‘怪’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자신의 거처나 글과 연관지어 예당(禮堂), 시암(詩庵), 실사구시..

추사 김정희 2018.08.10

추사 김정희 35 - 강상시절 2

추사의 글씨가 강상시절에 점점 더 파격적으로 대담해지고 있음은 그가 생질서(甥姪壻)1인 이당(怡堂) 조면호에게 써준 대련 을 보면 더 잘 나타나 있다. 은 첩(帖)의 이름이고 '천지석벽도(天池石璧圖)'는 원(元)나라 화가인 황공망이 그린 명화의 제목으로, 파격적이고 어지러운 획이 많지만 글씨의 리듬과 강약의 변화가 있는 작품이다. '학위유종(學爲儒宗)'은 '학문은 유학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추사는 고급 냉금지2에 고급 먹으로 이 글씨를 썼다. 서체가 예사롭지 않고 괴이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글씨는 획법(劃法)과 자법(字法)에서 나무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괴이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김정희 , 131.5 x 35.0cm, 호암미술관] 그런데 이 작품에는 추사의..

추사 김정희 2018.07.27

추사 김정희 34 - 강상시절 1

추사의 일생은 보통 다섯 단계로 나눈다. ①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②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의 학예연마기 ③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향가는 55세까지 중년의 활동기 ④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⑥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의 만년기 추사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지 3년 만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 때문에 북청 유배까지를 추사 유배기의 연장으로 보고 북청에서 돌아와 과천에서 만년을 보내는 마지막 4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흔히 '추사의 과천시절'이라고 한다.그런데 추사가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의 2년 반과 북청 유배 1년간은 추사 일생의 만년(晩年) 중 거의..

추사 김정희 2018.07.26

추사 김정희 33 - 영영백운도, 시우란

추사와 같이 정쟁에 휘말려 유배를 가는 경우는 유배 생활 자체가 고통스럽다기보다는 권력의 중심에서 추방되어 정치·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따르고 고립되는 데 따른·심리적 고통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배생활의 육체적 고통도 신체의 억압에 따른 것 보다는 낯선 풍토와 식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질환에 의한 고통이 대부분이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갇혀 두문불출하며 혼자 외롭게 책을 읽거나 글씨를 썼을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 달리 추사는 제주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제주도로서는 뛰어난 유배객을 맞는다는 것은 뛰어난 선생을 얻는 셈이었다. 유배객들 또한 그들을 교육시키면서 학자로서의 보람과 삶을 유지하는 활력을 얻었을 것이다 추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추사의 제자이기도 한 민규호1는 자신이 쓴 「완당..

추사 김정희 2018.07.16

추사 김정희 32 - 추사체 성립론

유홍준 박사는 추사체가 단순히 추사의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보고, 추사체가 어떤 배경에서 출발하여 어떤 변천과정을 거쳐 어떻게 완성되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찾다가 추사와 동시대에 살았던 박규수가 당대의 안목으로 추사를 논한 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을 길잡이로 하여「완당평전」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박규수(朴珪壽. 1807 ~ 1876)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셔먼호사건1 때 평양감사를 지냈고 개화파의 선구이며 그 자신 명필이었다. 박규수는 추사체의 본질과 특징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였다.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 스물 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을 좇..

추사 김정희 2018.07.14

추사 김정희 31 - 30년만에 쓴 글씨

추사는 제주도 유배시절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탁을 받아 많은 글씨를 써주었다 한다.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아래로는 제주도 관리까지, 멀리는 중국 연경으로부터 가까이는 집안의 형제와 벗의 요구까지 추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써야하는 글빚, 글씨빚을 지고 귀양살이를 헸디. 종이와 먹이 넉넉지 않아 마음껏 시필(施筆)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고 몸이 아파 편지조차 못 쓸 때도 있는데, 부탁한 사람들은 그런 사정을 모르고 재촉만 하니 추사로서도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남이 부탁한 글을 쓰는 경우에는 그 문장이 사리에 맞는지, 고전에 어긋남이 없는지를 가려야 했지만 확인해볼 문헌자료가 곁에 없었다.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추사..

추사 김정희 2018.07.11

추사 김정희 30 - 지필묵(紙筆墨)

추사는 지·필·묵(紙筆墨)에 대하여 무척 까다로웠다. 귀양살이하는 어려운 중에서도 완벽한 조건이 아니면 붓을 대지 않았다 한다. 추사는 특히 붓의 종류와 성질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쓰고자 하는 글씨의 성격에 따라 붓을 골라 쓰는 섬세함이 있었다. 흔히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만 추사는 그것이 옳은 얘기가 아니라며 이렇게 말하였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구양순이 1이나 2 같은 글씨를 쓸 때 정화(精毫)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완당선생전집」권8, 잡지) 추사는 붓의 성격에 대하여 대단히 박식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이나 비단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글씨를 쓰는 바탕의 재질에서 오는 문제를 극복해낼 수 있었다. 먹과 벼루에도 섬세하..

추사 김정희 2018.07.07

추사 김정희 29 - 세한도(歲寒圖) 3

서양화의 구도(構圖)에 상응하는 말로 동양화에는 '포치(布置)' 라는 것이 있다. 그림을 그릴 때 주위(主位)로 가져올 것과 옆으로 돌릴 것, 점경(點景)1 등의 위치, 전후 또는 원근 관계, 전체적 균형 등을 정하는 것으로 동양화의 구도법인 셈이다. 를 처음 접하고 그 가치를 전혀 모르는 상태라도 보는 순간 표구해서 집안 거실에 걸어두고 싶을만큼 는 지금의 감각으로 봐도 디자인적으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안정적이고 차분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물론 끝까지 의 가치를 모르는 경우라면 그림이 좀 아쉽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말은 역설적으로 를 그린 추사의 심정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2008년 학술지 '미술자료' 76호..

추사 김정희 2018.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