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49

추사 김정희 9-1 - 개안(開眼)

추사체의 변천과정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셔먼호사건 때 평양감사를 지냈고 개화파의 선구이면서 그 자신 명필이었으며, 추사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박규수(1807 ~ 1876)는 당대의 안목으로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완옹(阮翁 :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基昌)1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연결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 (骨氣)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2와 미불3을 따르고 이북해4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 드디어는 구양순의 신수(神髓)를 얻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 2017.11.17

추사 김정희 8 - 추사의 위상

동양 서예사에서 추사의 위치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추사의 업적이란 낡은 법첩(法帖)을 따르는 매너리즘과 향토색에 젖어있던, 어딘가 촌티나는 조선의 글씨를 비문 글씨의 고졸하고 준경한 기품을 간직한 개성적 서체로 구현하여 국제적 감각의 신풍을 일으켰다는 점이라 한다. 그러나 추사체의 미술사적 의의는 우리나라 서예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중국 서예사를 포함하여 어쩌면 일본과 한국까지 포함한 동양 서예사, 사실상의 세계 서예사라는 틀에서 봐도 크다는 것이다. 추사가 살아생전에 활약한 시기는 19세기 전반기로 크게는 청나라, 좁게는 청나라 가경(嘉慶: 1796 ~ 1820), 도광(道光: 1821 ~ 1850) 연간이다. 이때는 청나라 서예가 딜레마에서 벗어나 남북조,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로 이..

추사 김정희 2017.11.14

추사 김정희 7-2 - 안평대군, 양사언, 한호

안평대군 이용 조선 초기의 글씨는 고려 말기에 받아들인 조맹부1의 서체가 약 200년간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고려 충선왕 때 직접 조맹부를 배운 서가(書家)기 믾았고, 또 조맹부의 글씨와 그의 법첩2이 다량으로 흘러 들어와서 그것을 교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의 송설체(松雪體)를 가장 잘 쓴 사람이 고려의 이군해와 안평대군 이용이었다 한다. 안평대군은 예술적인 천분을 타고나서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모두 능하였고, 궁중에서 성장하여 궁중에 수장된 많은 진적3을 보았으며, 진지하게 수련을 쌓아 그림도 잘 그렸다. 그의 글씨는 송설을 모방하는 한편, 자기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된 독자성도 나타내었다. 그의 진적은 현재 일본의 덴리(天理)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견의 의 발문4이 있고, 그외 국내에 몇 점의 진..

추사 김정희 2017.11.05

추사 김정희 5 - 서체의 종류 1

서예의 역사 붓글씨를 우리는 서예(書藝)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부른다. 서예라는 호칭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정부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가 처음 열리면서 붓글씨 부분이 다른 미술품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을 때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고, 1945년에 손재형이라는 분이 조선서화동연회의 창립을 주도하면서 단체의 발족을 계기로 일제 강점기 때 사용하던 '서도'라는 말 대신, 글씨의 예술이란 뜻의 '서예'라는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그저 서(書)로 불렸다고 한다. 붓글씨는 한자를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한자는 상형문자의 특성을 갖고 있어서 태생적으로 조형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데..

추사 김정희 2017.10.30

추사 김정희 4 - 금강안 혹리수

금강안(金剛眼) 김정희에 대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가 가장 잘한 것은 글씨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글씨에 덮여 그가 지은 시가 뛰어남을 모른다는 이도 있다. 그런가하면 김정희는 시와 글씨 같은 예술이 아니라 금석학·고증학에 더 뛰어났다고도 하고,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은 모두 선학(禪學)에서 연유한 것이니 그것이 참모습이다 라고도 한다. 이렇듯 논자에 따라 김정희를 보는 시각이 다를만큼 김정희는 여러 분야에 뛰어났다. 그런 중 홍한주는 『지수염필』1에서 또 다른 시각으로 김정희를 말하고 있다. 【추사의 재능은 감상(鑑賞)이 가장 뛰어났고, 글씨가 그 다음이며, 시문이 또 그 다음이다.】 여기서 감상이란 미술품 감식(鑑識)을 의미한다. 완당은 스스로 미술 감상법을 이렇게 말했다. 【서화를 감상하는 데서는 금강..

추사 김정희 2017.10.30

추사 김정희 3 - 문인화와 난초그림

화인(畵人)으로서의 秋史 추사는 그림도 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그의 제자들 중에는 서화가, 특히 화가들도 여럿 있었다.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소당 이재관, 소치 허련, 희원 이한철, 해산 유숙, 학석 유재소, 북산 김수철 등이다. 이들 중에는 도화서 화원도 있었지만 고람 전기처럼 한약사로 서화에 능한 중인 묵객도 있었다. 이들이 사실상 19세기 중엽 완당일파의 문인화풍을 펼쳐 나간 주역들이었다. 추사는 문인화풍으로 '완당바람'을 일으키며 19세기 전반기 회화사를 장려하게 장식한 문인화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추사의 고매한 문인화의 세계를 심도있게 이해한다는 것 또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대표작인 나 같은 작품을 보면서 예술적 감흥을 얻는다는 것은 그의 글씨만큼이나 어려운 일..

추사 김정희 2017.10.28

추사 김정희 2 - 추사의 진면목

추사의 넓고 깊은 학문세계 추사를 함부로 논하기 힘든 이유는 그의 글씨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추사는 단순히 서예가로만 일생을 살아간 분이 아니었다. 그는 당당한 한 사람의 사대부로서 벼슬이 규장각 대교(待敎),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었고, 시와 문장, 학문에서도 대성한 분이었다. 정옥자 교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적활동을 오늘날의 대학문화에 비유하여 文·史·哲을 전공필수로 하고 詩·書·畵를 교양필수로 삼았다고 했는데, 추사는 이 모든 분야에서 'all A'를 받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었다고 하였다1. 추사는 무엇보다도 시와 문장의 대가였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고 10여년이 지나서 그의 제자인 남병길(1820 ~ 1869)이 추사의 시를 모아 「담연재시고 覃揅齋詩藁」를 편찬..

추사 김정희 2017.10.27

추사 김정희 1 - 추사체의 정체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 김정희(1780 ~ 1856)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서예가로 흔히는 우리나라 4대 명필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추사가 활동했던 19세기 전반기에는 청나라에도 추사 김정희에 견줄만한 서예가가 없을 정도였고, 그의 글씨는 당대 청나라 학예인들의 상찬을 받았다. 추사는 서예가일 뿐만 아니라 당시 절정에 달해있던 청나라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의 성과를 모두 아우르는, 말하자면 실학(實學) 중에서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우리끼리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일본의 동양철학자인 후지즈카 지카시도 "추사는 청조학(淸朝學)연구의 제일인자"라고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추사는 금석학과 고증학에 대한 연..

추사 김정희 2017.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