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2 - 추사의 진면목

從心所欲 2017. 10. 27. 12:48

<소치 허련作  추사 진영> 

 

추사의 넓고 깊은 학문세계

 

추사를 함부로 논하기 힘든 이유는 그의 글씨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추사는 단순히 서예가로만 일생을 살아간 분이 아니었다. 그는 당당한 한 사람의 사대부로서 벼슬이 규장각

대교(待敎),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었고, 시와 문장, 학문에서도 대성한 분이었다.

정옥자 교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적활동을 오늘날의 대학문화에 비유하여 文·史·哲을 전공필수로 하고

詩·書·畵를 교양필수로 삼았다고 했는데, 추사는 이 모든 분야에서 'all A'를 받고도 남음이 있는 분이었다고 하였다1.

추사는 무엇보다도 시와 문장의 대가였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고 10여년이 지나서 그의 제자인 남병길(1820 ~ 1869)이 추사의 시를 모아 담연재시고

覃揅齋詩藁」를 편찬했을 때 당대의 시인인 신석희는 그 서문을 쓰면서 이렇게 안타까워했다.

 

"추사는 본디 詩文의 대가였으나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이 천하에 떨치게 됨으로써 그것이 가리워지게 되었다."

 

또한 추사의 학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금석학2, 고증학3의 대가이다.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이 분야에 관한한 추사는 전무후무한 대가이자 권위이다.

그 뿐이 아니다.

위당 정인보는 1933년에 다시 편찬한 『완당선생전집』의 서문을 쓰면서 추사의 학문은 금석학·고증학 같은

부차적인 학문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경학(經學)4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성리학의 正道였음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公(추사)이 약관시절에 사신 가는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가서 옹방강, 완원(阮元)과 교유하고 그 후로는

그들과 서신 왕래를 한 것이 매우 빈다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그 사실만 보고서 마침내 그의 학문이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일찍부터 가정과 사우들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요, 그들을 힘입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대체로 학문의 본원을 깊이 터득한 公에 대하여 한갓 서예의 고증학만을

중시하는 것은 또한 얕은 생각이다.

 

일찍이 추사의 제자인 黃史 민규호(1836 ~ 1878)가 「阮堂金公小傳」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 것을

보면 위당이 추사의 학문적 근원이 경학에 있다고 한 것 역시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추사 선생이 진심으로 공부한 것은 13經, 그 중에서도 『주역(周易)』이었다."

 

실제로 추사가 쓴 「實事求是說」, 「역서변易筮辯」같은 논문이나 다산 정약용에게 경학에 대하여

진지하게 물음을 구한 글, 또는 그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이재 권인돈과 『주역(周易)』에 대하여 깊이 토론한

서찰 같은 글은 경학자로서 추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불교학자 신암 김약슬(1913 ~ 1971)은 「추사의 禪學辨」이라는 장문의 논문을 쓰면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그 핵심이 모두 불교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추사는 당시 해동의 유마거사(士)라 불릴 정도로 불교 교리에 밝았고, 초의(草衣)를 비롯한 많은

스님들과 교유했으며 백파(白坡)같은 당대 대선사와 한 차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詩·書·畵에는 불교의 정신이 매우 깊이 서려있다. 그래서 김약슬은 추사는 "유(儒)를

학(學)하고 석(釋)에 입문한 진실한 애불(愛佛)의 제일인자" 였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추사의 모든 저술과 예술은 기운생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음이 없고 또 통선(通禪)된 선지(禪旨)가  표상화된

 것을 굳세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추사를 인식하려면 불교를 통해서 있을 것이니 불교와

 추사는 불가분의 논제인 동시에 禪林에 대한 일대공안(一大公安)이 될 수 있는 진리가  많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사는 시인으로, 혹은 금석학과 고증학의 대가로, 혹은 경학의 대학자로, 혹은 불교의 선지식(善知識)

으로 각 분야에서 높은 학식을 칭송 받았다.

 

하지만 유홍준박사의 이런 평가와는 달리 추사 김정희 자신이 서예를 제외한 분야에 대해 특별히 남겨놓은

족적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추사의 학문세계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시각도 있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발간한

유홍준 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일부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글입니다.

 

  1. 정옥자, 조선후기의 문풍과 진경시,진경시대 1998 [본문으로]
  2. 동기(銅器),철기(鐵器),석비(石碑) 등에 새겨진 명문(銘文)을연구하는 역사학의 보조학문 [본문으로]
  3. 중국의 明末, 淸初에 일어난 실증적 고전 연구의 학풍 또는 방법으로 중국에서는 고거학(考據學), 또는 박학(朴學)으로 많이 불린다.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게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을 밝히되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확실한 실증적 귀납적 방법을 택함으로써 종래의 경서 연구방법을 혁신하였다. 고증학은 훈고학, 음운학, 금석학, 잡가,교감학 등 5가지 분야로 분류한다. [본문으로]
  4. 중국 儒家 경전의 글자, 구절, 문장에 음을 달고 주석하며 연구하는 학문. 유가의 경전은 처음 6經으로 부르다가 이후 9經, 13經으로까지 늘어났다. 공자를 정치가로 보고 육경을 정치학설로 인식하고 경전자구(字句)의 연구보다는 경전에 담긴 숨은 뜻인 이른바 미언대의(微言大義)를 주석하는 금문학파에서는 공자의 편성으로 보는 6경만을 경으로 지칭하나, 공자를 사학자로 보고 경서를 고대의 종합적인 史料로 인식하여 명물(名物), 훈고(訓詁)에 편중하고 고증을 일일이 거치는 고문학파에서는 모든 고전을 범칭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