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4 - 금강안 혹리수

從心所欲 2017. 10. 30. 09:07

금강안(金剛眼)

 

 

김정희에 대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가 가장 잘한 것은 글씨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글씨에 덮여 그가 지은 시가 뛰어남을 모른다는 이도 있다.

그런가하면 김정희는 시와 글씨 같은 예술이 아니라 금석학·고증학에 더 뛰어났다고도 하고,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은 모두 선학(禪學)에서 연유한 것이니 그것이 참모습이다 라고도 한다.

이렇듯 논자에 따라 김정희를 보는 시각이 다를만큼 김정희는 여러 분야에 뛰어났다.

그런 중 홍한주는 『지수염필』1에서 또 다른 시각으로 김정희를 말하고 있다. 

 

【추사의 재능은 감상(鑑賞)이 가장 뛰어났고,

글씨가 그 다음이며, 시문이 또 그 다음이다.】

 

여기서 감상이란 미술품 감식(鑑識)을 의미한다.

완당은 스스로 미술 감상법을 이렇게 말했다.

 

【서화를 감상하는 데서는 금강역사와 같은 눈(金剛眼)과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酷吏手)과 같아야 그 진가를 다 가려낼 수 있습니다.】 (전집 3권, 권인돈에게, 제 33신)

 

이것이 그 유명한 '금강안·혹리수'이다.

미술 감상은 결코 한가한 여흥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김정희의 눈은 정말로 금강안이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 회화사와 서예사를 완전히 꿰뚫고 있었으며

낱낱 작품의 질을 실수 없이 가려내는 무서운 눈을 갖고 있었다.

위의 같은 간찰에 권돈인이 감정 의뢰해온 원나라 황공망의 <천지석벽도天地石壁圖>에 대하여 작품의 질, 내력, 문헌자료와의 비교, 그리고 자신의 소견을 명쾌하게 밝힌 내용이 있는데 그 엄청스런 눈썰미와 철저한 감정, 지독스런 추궁은 징그러울 정도라고 한다.

 

김정희는 자신이 감정한 작품에는 '추사상관(秋史賞觀)', '추사심정(秋史審定)', '추사진장(秋史珍藏)' 등의 감상인을 찍었다. 그 중에는 심지어 아마도 가짜에 찍었을 '오(誤)'라는 도장도 있다.

그 중 '동경추사동심정인(東卿秋史同審定印)'이라는 것이 있다. '동경과 추사가 함께 살펴 감정한 도장'이라는 뜻으로,

동경은 청나라 섭지선의 자(字)이다. 섭지선은 글씨와 감정에 뛰어났던 옹방강의 제자로 옹방강 사후에 석묵서루(石墨書樓)2의 뒷일을 감당했던 사람이다. 바로 그런 사람과 함께 보증한다는 뜻이니 완당의 감식한이 멀리 연경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는 현대적 의미의 뛰어난 미술사가였다. 그것도 국내가 아니라 중국, 당시로서는 세계미술사에 통달한 금강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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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로 가필, 재구성한 글입니다.

 

  1. 홍한주는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만년에 지수(智水)에 귀양 가있을 때 지은 책으로, 정조 조에서 현종 조에 이르는 시기의 문단동향과 일화들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2. 담계 옹방강(1733 ~ 1818)은 추사가 스승인 박제가를 통해 듣고 흠모하던 청나라의 당대 석학으로,24세이던 때의 추사가 생부 김노경이 1809년 중국 사신으로 갈 때 따라가 그 다음 해에 옹방강의 거처인 石墨書樓에서 만나게 된다. 이때 두 사람은 서로 글로 써서 대화를 했는데 옹방강은 추사의 박식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 극찬을 한 후 그 자리에서 사제의 연을 맺는다. 당시 석묵서루에는 8만점이 넘는 수장품이 있어 옛 작품들의 진적을 접하며 추사의 안목을 넒히는 계기가 되었다. 추사는 또 당시 연경에 머물고 있던 대학자 운대 완원(阮元, 1764 ~ 1849)을 만나 사제의 연을 맺고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게 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