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3 - 문인화와 난초그림

從心所欲 2017. 10. 28. 08:43

 

화인(畵人)으로서의 秋史

 

추사는 그림도 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그의 제자들 중에는 서화가, 특히 화가들도 여럿 있었다.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소당 이재관, 소치 허련, 희원 이한철, 해산 유숙, 학석 유재소, 북산 김수철 등이다.

이들 중에는 도화서 화원도 있었지만 고람 전기처럼 한약사로 서화에 능한 중인 묵객도 있었다.

이들이 사실상 19세기 중엽 완당일파의 문인화풍을 펼쳐 나간 주역들이었다.

추사는 문인화풍으로 '완당바람'을 일으키며 19세기 전반기 회화사를 장려하게 장식한 문인화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추사의 고매한 문인화의 세계를 심도있게 이해한다는 것 또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나  <불이선란不二禪蘭> 같은 작품을 보면서 예술적 감흥을 얻는다는 것은

그의 글씨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추사의 다른 그림들은 어떠했을까?

추사의 산수인물도는 현재 남아있는 것이 아주 드물다.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산수화들은 대개가 원나라 문인화풍 이래의 간일한 필치와 문징명, 동기창1 등이 즐겨 쓴

수지법(樹枝法)2으로 그려졌다.

그 중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는 그래도 추사의 그림다운 일격(逸格)의 명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歲寒圖>

 

<不二禪蘭>

   

<高士逍遙圖>

 

그러나 화면에 감도는 고고한 품격이 추사가 지향하던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券氣)를 나타낼 뿐,

그림에 사용된 수지법과 암석법이 화법에 상당히 어긋나 있고 묘사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화가들이 대상을 그리면서 격조를 풍긴 것과는 달리, 추사는 격조 그 자체를 그린 것이다.

손으로 그리지 않고 머리로 그리려니 그림다운 그림이 될 수 없었다.

손보다는 머리와 눈이 너무 엎서 있어서 손의 일이 더 중요한 화가는 되기 힘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완당은 화가가 아니었다.

 

 

추사의 난초그림

 

추사를 굳이 화가로 본다면, 난초 그림에 한해서는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럴 정도로 추사는 난초그림에는

깊은 정성과 자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는 산수화에 대해서는 그런 적이 없지만 난초 그림에 대해서는 당당한 화론을 제시하면서 끊임없는 장인적 연찬과 수련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추사는 난초그림을 그림의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추사는 그것을 글씨의 영역으로 보았다.

아들 상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난초를 치는 법은 또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또 蘭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식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약 그러한 법식으로 쓰려면 일필(一筆)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추사는 그림 중에서 난초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산수·매죽·화훼·물고기 등은 각 장르마다 대가를 낳았지만 유독 난초만은 특별히 소문난 이가 없고,

이름난 문인화가도 난초를 잘 그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원나라의 정소남과 조자고가 난초에서 이름을 얻은 것도 따지고 보면 인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추사는 아들 상우에게 난초 그리는 비법 두 가지를 가르쳐주었다. 우선 삼전법(三轉法)을 쓰라고 했다.

 

"난초 치는 데는 반드시 붓을 세 번 굴리는(三轉) 것을 묘로 삼는데, 지금 보건데 네가 한 것은 붓을 한 번에 죽

 긋고는 바로 그렸다.  그러니 모름지기 붓을 세 번 굴리는 데에 공력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

 

여기서 삼전법이란 난초 잎을 곧장 긋지 말고 세 번 꺾으라는 뜻으로 대개 이해한다. 그러나 삼전법의 정확한

의미는 서예에서 붓을 쓸 때 평입평출(平入平出)하는 것이 아니라 역입평출(逆入平出)3하여 세 번 굴리라는

뜻이다. 이는 청나라 시대 서예에서 중요한 운필법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그러면 남은 하나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품과 교양이라고 하였다.

요컨대 인품과 교양과 지식과 필법,

그리고 끊임없는 수련.

이것이 추사가 말하는 난초 치는 비결이다.

추사가 흥선대원군에게 난초그림을 얘기하면서

"천재도 결국은 노력이다"라고 말한 것은 난초그림에 대한 그의 지론이었다.

 

"난초그림의 뛰어난 화품(畵品)이란 형사(形似)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화법만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다.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었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석파 난권에 쓰다)

 

추사는 난초그림도 그의 글씨와 마찬가지로 고전을 통하여 새로운 창출로 나아가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자세를 견지했다.

대원군으로 알려진 석파 이하응은 이런 추사에게 난초그림을 배웠고, 스승을 뛰어넘어 결국 단군갑자이래 조선의

최고가는 난초그림의 대가가 되었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글입니다.

 

 

  1. 문징명은 중국 明代 중기의 문인, 서가, 화가로 산수화는 조맹부와 원말 4대가를 배웠다고 알려져있다. 동기창은 중국 명대 후기의 서예가. 화가이며 또 화론가(畫論家)로 그 화풍 ᆞ 화법과 함께 명말 청초 이후 남종화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본문으로]
  2. 작은 점들을 이용하여 산의 나무들과 바위틈 사이의 이끼와 잡초들을 표현하는 방식. 점의 크기와 농담의 차이에 따라 공간 구성과 그 속에 담겨진 풍경화면의 효과가 달라진다. [본문으로]
  3. 기필(起筆: 붓을 들어 글씨를 쓰기 시작함)할 때 진행하는 방향의 역으로 뭇끝을 감추어 눌러 시작하고 수필(收筆: 뭇을 거둠)할 때 붓 끝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렇게 함으로써 필봉이 점획의 중심을 통하게 하여(장봉) 필획을 힘있게 하려는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