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1 - 추사체의 정체

從心所欲 2017. 10. 26. 15:17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 김정희(1780 ~ 1856)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서예가로 흔히는 우리나라 4대 명필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추사가 활동했던 19세기 전반기에는 청나라에도 추사 김정희에 견줄만한 서예가가 없을 정도였고, 그의 글씨는 당대 청나라 학예인들의 상찬을 받았다.

추사는 서예가일 뿐만 아니라 당시 절정에 달해있던 청나라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의 성과를 모두 아우르는, 말하자면 실학(實學) 중에서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우리끼리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일본의 동양철학자인 후지즈카 지카시도 "추사는 청조학(淸朝學)연구의 제일인자"라고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추사는 금석학과 고증학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자신의 서체를 발전시켜 나갔다.

‘추사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말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추사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정작 '추사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추사체라는 기괴한 글씨"

 

추사의 글씨는 오래전부터 난해의 상징으로 되어있다. 즉, 추사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추사체는 대단히 개성적인 글씨이다. 전문가들은 ‘일반적인 아름다움, 평범하고 교과서적인 미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추사의 글씨에서 괴이함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며, 그런데 그 괴이함이 바로 추사체의 예술적 개성이자 높은 경지의 아름다움’이라는 식의 어려운 해설로 추사체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한다.

 

아래는 추사의 대표작으로로 꼽히는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선게비불禪偈非佛>, 그리고 <판전板殿>이다.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선게비불禪偈非佛>]

  

[<판전板殿>]

 

세 작품이 모두 추사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하지만, 일반인들이 서체상 서로간의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殘書頑石樓>는 전서·예서·해서·행서의 필법이 다 갖추어졌고 경쾌한 운필이 아니라 오히려 중후한 맛을 풍긴다. 글씨 전체의 구도를 보면 위쪽은 가로획을 살려 가지런함을 나타냈고, 하부는 여러 가지 형태의 세로획을 들쭉날쭉하게 써서 고르지 않지만 전체의 조화를 잘 이루었다. 이런 구도는 일찍이 다른 서예가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모양이라고 한다.

<禪偈非佛>은 추사의 행서 글씨 중 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추사체다운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板殿>은 봉은사에서 화엄경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은 건물의 현판인데, 글자 하나의 크기가 어린애 몸통만한 대자로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 쓴 글씨이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 욕심 없는 필치의 글씨이지만, 졸(拙)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있어 추사체의 졸(拙)함의 극치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외형상,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 세 작품의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개성이 강한 글씨라는 점뿐이다. 즉, 파격의 아름다움, 개성으로서의 괴(怪)를 나타낸 것이 추사체의 본질이자 매력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설이다.

이 어려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추사체’는 어떤 정형화된 글씨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추사체’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명조체, 고딕체, 궁서체 등과 같이 서체의 모양이 정해진 바가 없다는 것이다. ‘추사체’는 추사가 쓴 글씨체라고 이해하는 편이 빠르다. 그런데 그 글씨체는 세월 따라 변하여 일정하지도 않다. 다만 한결 같은 것은 추사의 글씨가 이전에 남들이 써온 글씨와는 달랐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서예의 법도를 벗어나 정말로 기괴망측한 글씨를 쓴 것이 아니라, 남들이 쓰던 방식대로 안 쓰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괴(怪)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창작자나 예술가들은 남들과 다른 독창적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렇다면 추사도 그런 노력을 한 것일까?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추사가 자신의 글씨가 괴(怪)하여 지는 것에 대해 쓴 글을 보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추사가 금석학과 고증학의 학식이 높아진 것은 옛 서법(書法)을 궁구(窮究)한 결과였다. 추사는 후대에 오면서 모양 위주로 변한 서법을 따르는 대신 고졸(古拙)한 옛 법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 옛 법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글씨를 썼다. 거기에 이전 사람들과 다른 추사의 미적 감각이 가미되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괴한 글씨가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추사의 글씨는 계속 변했다.

 

‘추사체의 완성’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과연 추사에게 그런 목표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추사 본인이 더 나은 글씨를 쓰기 위해 노력하고,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쓴 글씨에 대한 만족감도 높아졌겠지만, 추사가 어떤 글씨체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추사체의 완성’이라는 표현은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다만 더 높은 경지의 추사 글씨만 있을 것이다. 추사가 젊었을 때 쓴 글씨나, 노년에 쓴 글씨나 비록 그 외형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추사 본인이 지향하는 바가 특징으로 나타난 그의 글씨는 모두 추사체인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의 인물인 초산 유최진(1791 ~ 1869)은 「추사 글씨 편액에 부쳐(題秋史楹扁)」라는 글에서 추사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추사의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怪奇)한 글씨라 할 것이요, 일단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妙)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면,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져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추사선생이 소사(蕭寺)에서 남에게 써준 <영어산방穎漁山房>이라는 편액을 보니 거의 말(斗)만한 크기의 글씨인데, 혹은 몸체가 가늘고 곁다리가 굵으며, 혹은 윗부분은 넓은데 아래쪽은 좁으며, 털처럼 가는 획이 있는가 하면 서까래처럼 굵은 획도 있다. 마음을 격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를 따져본다는 게 불가하다. 마치 머리를 산발하고 의복을 함부로 걸쳐서 예법으로는 구속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감히 비유해서 말하자면 佛家·道家에서 세속을 바로잡고 훌쩍 세속을 벗어남과 같았다고나 할까?" (유최진, 「초산잡지」)

 

이런 시각에서 <殘書頑石樓>, <禪偈非佛> 같은 작품을 보면 추사체의 파격적인 특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板殿> 같은 글씨는 그 사정이 또 다르다. <板殿>은 파격의 글씨라기보다는 차라리 어수룩한 글씨라고 할 정도로 기교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어찌 보면 어린아이 글씨 같은 천연스러움이 있을 뿐이다. 추사는 평생 많은 글자도장을 새겨 작품 첫머리에 찍는 두인(頭印)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 중에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는 것이 있다. '잘 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경지의 글씨를 일반인들이 평범한 눈으로 어떻게 따지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감격이나 할 뿐, 감히 평하고 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추사는 일찍부터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신비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이다.

게다가 추사의 글씨는 당대부터 위작(僞作)이 많았다. 속설에 시중에 나도는 추사 글씨의 9할이 가짜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 가짜까지 감별할 능력을 갖춘 눈은 더욱 드물 것이다.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발간한 유홍준 著 「완당편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일부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