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7-2 - 안평대군, 양사언, 한호

從心所欲 2017. 11. 5. 09:27

안평대군 이용

 

조선 초기의 글씨는 고려 말기에 받아들인 조맹부1의 서체가 약 200년간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고려 충선왕 때 직접 조맹부를 배운 서가(書家)기 믾았고, 또 조맹부의 글씨와 그의 법첩2이 다량으로

흘러 들어와서 그것을 교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의 송설체(松雪體)를 가장 잘 쓴 사람이 고려의 이군해와 안평대군 이용이었다 한다. 

안평대군은 예술적인 천분을 타고나서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모두 능하였고, 궁중에서 성장하여

궁중에 수장된 많은 진적3을 보았으며, 진지하게 수련을 쌓아 그림도 잘 그렸다.

그의 글씨는 송설을 모방하는 한편, 자기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된 독자성도 나타내었다.

그의 진적은 현재 일본의 덴리(天理)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夢游桃源圖>의 발문4이 있고,

그외 국내에 몇 점의 진적이 있으나 소품 뿐이다.

 

[안견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발문 中 부분]

 

봉래 양사언

 

양사언(1517 ~ 1584)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40년간 관직에 있었으면서도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유족에게도 재산을 남기지 않은 청렴한 관리였다.

널리 알려진 "태산이 높다 하되...."라는 시조의 작가이기도 하다.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고 한다.

자연을 좋아하여 금강산에 자주 가 경치를 감상했는데, 회양의 군수로 있을 때 만폭동()의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이란 글씨를 새겼고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양사언의 초서  <학성기우인鶴城寄友人>]

 

조선 중기의 서예

 

조선왕조 수립 200년이 지나면서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조선의 서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유행했던 송설체가 외형의 균정미에 치중한 나머지 박력이 없이 나약한 데로 흐르는 데 대한

싫증이 일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변혁을 원하는 요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변혁에 부응할만한 터전이 없었고, 밖에서도 자극을 받은 것도 없고 학문적인

새로운 원리를 발견함이 없이 다만 성리학적인 견지에서 송설체에 대하여 깊이가 없고 저속한 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싫증을 낸 것 뿐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유학의 복고사상에 의하여, 천고의 서성(書聖)인 왕희지의 서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론적 근거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왕희지의 법첩으로 전해지는 것들 모두는 위작이거나 

아니면 수 차례의 복각을 거쳐서 진적과는 거리가 멀어진 것들이었다.

이러한 체본을 모방하거나 이러한 체본을 가지고 공부한 훈장으로부터 체본을 받아 쓴 글씨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맹부는 연대가 가깝기 때문에 진적도 있고 진적에서 직접 모각한 법첩도 있었으나,

천년도 지난 왕희지의 서체는 그 원형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의 글씨가 갑자기 후퇴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한다.

 

 

석봉(石峰) 한호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서가(書家)가 한호이다.

방안에 불을 끄고 어머니가 떡을 썰고 아들은 글씨를 써 자신의 실력을 깨우치게 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는 사자원(寫字員)5 출신으로 글씨를 잘 써서 선조의 사랑을 받았고. 임진왜란중에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써서

중국인들에게까지 절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왕희지의 위서(僞書)를 임모(臨模)6하여 배웠으며, 많은 훈련을 쌓아 원숙한 경지에 달하였다.

그러나 품격이 낮고 운치와 기백이 부족하여 외형미만을 추구하는 것에 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호의 서체는 그대로 관부의 양식을 이루어 중국에서 말하는 간록체(干祿體 : 직업적인 서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의 서체는 '석봉체'라고 불리며 후대에까지 전승되어 많은 사람들이 배웠는데 그 뒤 100년간 조선의 글씨는

기백과 품격이 저하되고 속기(俗氣)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한호 글씨]

 

 [한호의 도산서원 편액]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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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중국 원(元)대의 관료이자 서화가. 전서 ∙ 문예 ∙ 진 ∙ 행 ∙ 초서 등 각체에 능통했고 특히 왕희지로의 복귀에 힘써서 그 서풍은 이후의 시대 및 한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2. 법첩 [法帖] : 옛 사람들의 유명한 필적을 돌 또는 나무(판목)에 새기고 탑본하여 글씨를 익히거나 감상할 목적으로 만든 책 [본문으로]
  3. 진적(眞跡) : 친필(親筆) [본문으로]
  4. 발문(跋文): 책이나 서화작품의 앞부분에 해당 작품에 대해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글을 제(題)라 하고, 맨 뒷부분에 느낀 감상을 써넣는 것을 발(跋)이라고 한다. 원래 제(題)는 해당 책이나 서화가 처음 제작되었을 때 앞부분에 작자 본인이 쓰든 남이 쓰든 한 두편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발(跋)은 당대(當代)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이어지면서 그 작품의 소유자가 바뀔 때마다 소유자 자신이 써붙이기도 하고 함께 감상한 인물들이 종이를 이어가며 써붙이기도 한다. [본문으로]
  5. 고려와 조선시대에 역관·의관·천문관·지관(地官)·산관(算官)·율관(律官)·화원(畵員)등과 같은 중인들이 당당하던 전문기증직 관원의 하나 [본문으로]
  6. 서화 모사(模寫)의 한 방법. 서(書)의 경우, 임서(臨書)라고 한다.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베끼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7. 선조가 도산서원에 사액을 내리면서 한호가 쓰게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