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8 - 추사의 위상

從心所欲 2017. 11. 14. 17:46

 

 

[<육우묵사일칙(陸 友 墨 史 一 則)> 부분] 

 

 

[제난설기유십륙도시(題 蘭 雪 紀 遊 十 六圖 詩)]

 

 

동양 서예사에서 추사의 위치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추사의 업적이란 낡은 법첩(法帖)을 따르는 매너리즘과 향토색에 젖어있던,

어딘가 촌티나는 조선의 글씨를 비문 글씨의 고졸하고 준경한 기품을 간직한 개성적 서체로 구현하여

국제적 감각의 신풍을 일으켰다는 점이라 한다.

그러나 추사체의 미술사적 의의는 우리나라 서예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중국 서예사를 포함하여

어쩌면 일본과 한국까지 포함한 동양 서예사, 사실상의 세계 서예사라는 틀에서 봐도 크다는 것이다.

 

추사가 살아생전에 활약한 시기는 19세기 전반기로 크게는 청나라, 좁게는 청나라 가경(嘉慶: 1796 ~ 1820),

도광(道光: 1821 ~ 1850) 연간이다. 이때는 청나라 서예가 딜레마에서 벗어나 남북조,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로 이어지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바야흐로 문화적 개성으로서의 청나라 서예를 만들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양헌(梁巘)1은 『평서결』에서 중국 서예사를 다음과 같이 극명하게 요약하였다.

 

【晉尙韻, 唐尙法, 宋尙意, 元明尙態

 진나라는 운(韻)을 숭상하고

 당나라는 법(法)을 숭상하고

 송나라는 의(意)를 숭상하고

 원·명나라는 태(態)를 숭상했다.】

 

사족을 달면 진나라 왕희지의 글씨에는 신운(神韻)이 있었고, 당나라의 구양순과 저수량의 글씨에는 법도가 있었으며, 

송나라 소동파 때는 작가의 의지가 중요했고, 조맹부와 동기창 때는 글씨의 자태를 중히 여겼다는 것이다.

이 논리를 청나라에 적용하면, 청나라 사람은 학(學)을 숭상했고, 그들이 지향한  글씨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이며,

개성으로서의 괴(怪), 즉 고전에 입각한 근대정신의 감성적 표현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청나라 시대 서예의 과제를 가장 훌륭히 수행해낸 서예가로는 

정판교, 유용, 등석여, 이명수, 강유위, 오창석, 하소기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하나만로는 청대의 서예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한다.

입고(入古)가 강한 이는 출신(出新)이 약했고, 출신(出新)이 강한 이는 입고(入古)가 약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입고출신의 개성적인 글씨.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서예가는 오직 완당 김정희뿐이었다는 주장이다.

다만 그가 조선 땅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중국 서예사에 빠져 있을 뿐, 동양 서예사와 세계 서예사 차원이라면

당연히 추사가 그 위치를 차지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지츠카 지카시(藤塚隣)2가 "淸朝學 연구의 제1인자는 완당 김정희이다"라고 갈파한 것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여 동양 서예사의 대맥에서 말한다면,

남북조시대에는 왕희지·왕헌지가 있고,

당나라에는 구양순·저수량이 있고,

송나라에는 소동파·미불이 있고,

원나라에는 조맹부가,

명나라에 동기창이 있다면

청나라 시대에는 추사 김정희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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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중국 청나라 중기의 서예가 청나라 건륭-가경(1736 ~ 1820)연간에 서명이 높았고 양국치, 양동서와 함께 '3양'으로 불리웠다. [본문으로]
  2.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한 역사학자(1879 ~ 1948)로 '청조문화동전(淸朝文化東傳)의 연구'라는 책을 펴낸 전문적인 추사연구가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