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9-2 - 옹방강과 완원

從心所欲 2017. 11. 18. 13:51

 

추사는 1809년 10월 28일 자제군관(子第軍官)의 자격으로 동지부사1로 선임된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으로 떠났다. 자제군관이란 외교관의 아들이나 형제가 개인적으로 사행을 따라가서 외국견문을 익히게

하는 제도였다. 공식수행원이 아닌 만큼 연경에서 자유롭게 그곳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추사는 연경에서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며 견문과 학식을 넓혀갔으며 특히 평생 잊지 못 할 두 사람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담계 옹방강(翁方綱 : 1733~1818)이고 또 한 사람은 운대 완원(阮元 : 1764~1849)이다.

옹방강은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이며 경학의 대부로 자부하는 연경학계의 원로였고,

완원은 '청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일인자'라는 평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추사는 옹방강으로부터는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堂號)를 얻었고, 완원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훗날 추사는 제주도 유배시절에 자신의 초상화에 스스로 제(題)하여 두 선생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 담계는 '옛 경전을 즐긴다'고 말했고 운대는 '남이 그렇다고 말해도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지를 않았다.'고

 하였으니 두 분의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한 것이다."

 (전집 권6, 다시 소조에 자제하다)

 

청명 임창순 선생은 「한국 서예사에 있어서추사의 위치」라는 논문에서 추사가 연경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이후의 추사 글씨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완당은 '내가 어렸을 적부터 글씨를 써보려는 의욕을 가졌는데 24세에 북경에 들어가서 여러 명가를 만나서

 그 이론을 들었다'고 했고, '그들의 화법이 우리가 배우던 것과 크게 달랐으며 한나라·위나라 이래 수천 종의

 글씨를 보았다'는 말을 썼다. 물론 여러 명가들을 만난 것은 사실이나 직접 지도를 받은 것은 첩학(帖學)과

 금석의 대가인 옹방강이다. 옹방강은 젊은 완당을 기특히 여기고 서법을 강론해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소장한

 많은 법첩과 비본을 일일이 보이고 자신의 해박한 지식으로 서법의 원류를 설명하벼 '글씨는 북비(北碑)부터

 배워야 하며 북비를 배우기 위하여는 당의 구양순, 그 중에서도 화도사비(化度寺碑)2부터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자기의 경험과 주장을 설파해주었다.

 완당은 그 주장의 풍부함과 식견의 탁월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곧 그의 제자가 되었고

 학문과 서법에서 모두 옹방강을 따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가 글씨의 도를 깨치게 된 시작이다."

 

[옹방강 <임사독서 대련>]

 

 

[완원 <체악죽오 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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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동지사(冬至使): 조선시대 동지에 명나라와 청나라에 보냈던 사절 또는 파견된 사신으로 대개 동지를 전후하여 보냈기 때문에 동지사라 하였다. 무슨 일이 있을 때보내는 임시사절이 아니라 정례사행(定例使行)이었다. 그 해자 지나기 전에 북경에 도착하여 40 ~ 60일 정도 묵은 다음 2월 중에 떠나서 3월 말이나 4월 초에 돌아오는 것이 통례였다. 정사(正使)는 3정승 또는 6조의 판서 중에서 임명했으며, 정사 이외에 부사, 서장관, 종사관, 통사,의원, 사자관, 화원 등 40명의 공식 수행원을 포함, 250 ~ 500명 규모의 사행이었다. [본문으로]
  2. 중국 당대(唐代)의 비로 삼계교의 고승 옹선사의 사리탑명으로 '화도사탑명'이라고도 한다. 구양순의 방엄한 해서로 '구성궁예천명'과 나란히 손꼽히는 작품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