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10 - 남북서파론/북비남첩론

從心所欲 2017. 11. 2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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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가경(1796 ~ 1820) 연간으로 들어가면서 고증학의 정신을 이어받아 옛것에 대한 연구, 특히 고비

(古碑)를 연구하는 금석학이 크게 일어나 급기야 완원의 북비남첩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추사는 당시 청나라 학예계를 휩쓸고 있던 완원(阮元 : 1764 ~ 1849)의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금과옥조처럼 새기고 있었다.

완당의 제자들이 완원이 쓴 남국서파론을 별 의심 없이 완당의 글로 알고 『완당집』에 실었을 정도로,

완당의 서예론은 남북서파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글씨 쓰는 법이 변천되어 그 흐름이 마구 뒤섞였으니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옛날의

올바른 법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대개 예서로부터 시작하여 정서(正書, 楷書)와 행서 그리고 초서가

되었는데, 글씨가 이렇게 바뀜은 모두 漢末과 위(魏), 진(晉)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정서와 행서, 초서로 나뉘었던 것이 다시 남북 양파(兩派)가 되었으니, 곧 남조(東晉·梁)의 글씨를

남파라 하고, 위(魏)·수(隨)의 글씨를 북파라 한다. 남파는 종요, 왕희지, 왕헌지로부터 우세남에 이르렀고,

북파는 종요, 삭정 등으로부터 구양순, 저수량에 이르렀다,..........

남파는 글씨에 강남의 풍류가 있어서 소탈, 분방하여 곱고 미묘하여 장계(壯啓)1나 서독(書牘)2쓰는데

뛰어났고........북파는 중원(中原)의 전통인 옛 법칙을 지켜내려온 것으로 구속하듯 고졸하여 비문(碑文)을 쓰는

데 뛰어났다.

이와 같이 양파가 판연하게 다른 것은 양자강과 황하가 다른 것 같아서 남북의 세족(世族)들은 서로 통하여

익히지 않았다.

(완당선생전집, 완원의「서파변」)

 

추사는 북파를 지지하여 고졸하고 준경한 멋을 추구하며 북파의 전통을 지켜온 구양순에 경도되고, 남파의

조종격인 왕희지의 법첩을 모본으로 삼던 종래의 글씨를 배척하게 된다.

추사는 연경에 다녀온 뒤 열심히 옹방강을 본받아 썼다. <송창석정松窓石鼎> 같은 행서 대련3을 보면 그런

점이 여실히 나타난다. 이 작품의 옆에 쓴 협서에는 연경의 석묵서루에서 이 대련을 보고 필의가 힘이 있고

웅혼해서 그 필의를 좇아 써보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필획이 빠르고 매듭이 강하지 않아 추사체의 맛이 전혀

없는 작품이다.

 

[추사 <송창석정>]

하지만 연경에 다녀온 지 4,5년이 지나면서, 추사 스스로도 말했듯이 추사 장년 글씨의 특징이라고 할

새로운 면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29세 때 쓴 <자하선생 입연 송별시>와 이 무렵 썼다고 여겨지는

<김경연에게 보내는 편지> 등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글자가 기본적으로 길쭉한 장체(長體)에다, 한 글자 안에서 굵고 가는 획이 공존하여 글자 하나하나마다

강약의 리듬을 갖고 있다. 특히 'ㄱ'자로 꺾이는, 즉 '永자 8법'에서 늑(勒)획에서 노(努)획으로 꺾이는 부분은

대단히 굵고 강한 힘이 들어가고 내리 뻗거나 옆으로 긋는 획은 아주 가늘게 삐친다. 이 점은 훗날 추사체의

변함없는 특징으로 더욱 발전되고 강조된다.

 

 

[추사 <자하선생 입연 송별시>]

 

그러나 이 시절 완당의 글씨는 글자의 오른쪽 어깨가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사체의 버릇이 있고 또 획에

윤기가 많아 그만큼 골기가 적다는 평가다. 이 점은 추사체가 완성되어 갈수록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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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管下)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는 문서 [본문으로]
  2. 편지 [본문으로]
  3. 대련(對聯) : 판(板)이나 종이 등에 대구(對句)의 글을 써서 대문이나 기둥의 양쪽에 부착하거나 걸어 놓은 것. 많은 경우 기둥에 거는데 ‘주련(柱聯)’ ‘영련(楹聯)’ ‘영첩(楹帖)’ ‘대자(對字)’라고도 부르며 보통 색을 칠하여 글씨, 글귀가 돋보이게 한다. 문짝에 걸어 놓는 것을 ‘문련(門聯)’ 또는 ‘문심(門心)’, 문기둥 좌우에 거는 것을 ‘광대(框對)’, 새해에 쓰는 것을 ‘춘련(春聯)’이라고 한다. 송대(宋代)에는 기둥 위에 붙이는 것이 널리 퍼져서 경사(慶事)나 조상(弔喪) 때 이를 붙이는 것이 널리 행해지고, 명明, 청淸 이후에는 일반화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