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 9-1 - 개안(開眼)

從心所欲 2017. 11. 17. 12:33

추사체의 변천과정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셔먼호사건 때 평양감사를 지냈고 개화파의 선구이면서 그 자신 명필이었으며, 추사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박규수(1807 ~ 1876)는 당대의 안목으로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완옹(阮翁 :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基昌)1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연결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

(骨氣)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2와 미불3을 따르고 이북해4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  드디어는 구양순의 신수(神髓)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몰려오는 듯 하였다."

(『박규수 전집』, 「유요선이 소장한 추사유묵에 부쳐」)

 

추사가 연경에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여 출사하게 된 34세까지를 그의 장년(壯年)이라고 부를 때,

추사체의 시작은 바로 이 장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추사의 장년 글씨는 추사의 말년 글씨와는 말할 것도 없고 40대 중년 글씨와도 다른. 매우 매끄럽고 윤기나는

글씨였다.

 

추사체는 방필(方筆)을 기본으로 하면서 금석기(金石氣)를 보이며 획의 굵기에 변화가 많이 구사되지만,

장년의 글씨들은 오히려 원필(圓筆)이 많고 유려한 곡선미를 보이기도 한다.

앞에 박규수의 증언대로 추사는 젊을 때 동기창體를 썼다고 했는데, 당시 동기창체는 일종의 신풍(新風)으로

스승인 박제가, 아버지 김노경, 선배 신위 등이 모두 쓰고 있었기에 이를 본받은 것이었다.

 

[동기창 <빈풍도시권> 부분]

 

 

[동기창 <반야심경>]

 

그러나 연경에 다녀온 뒤로는 연경 학예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윤기나는 필체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연경에 다녀온 추사는 자신의 글씨가 변하기 시작했다고 스스로 고백한 유명한 글도 있다.

추사는 연경에 다녀온 뒤 글씨에 대한 생각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그것은 제주도 유배시절 제자인 박혜백에게 글씨의 원류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추사가 한 말 속에도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자에 뜻을 두었는데 스물네 살에 연경에 들어가서 여러 이름난 큰 선비들을 뵙고 그 서론을 

들어 발등법(撥鐙法)이 입문하는 데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손가락 쓰는 법, 붓 쓰는 법, 먹

쓰는 법으로부터 줄을 나누고(分行), 자리를 잡고(布白), 과(戈)나 파(波)의 점과 획 치는 법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익히던 바와는 크게 달랐다.

그리고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 금석문자가 수천 종이 되니 종요나 삭정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많이 봐야 한다고들 말하였다. 그래서 비로소 그 처음부터 변천되어 내려온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전집 권8, 잡지)

 

 

-----------------------------------------

이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2002년 출간한

유홍준著 『완당평전』을 발췌, 요약하면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임의 가필, 재구성한 것입니다.

 

 

  1. 동기창(1555~1636)은 명대의 서화가로시서화에 뛰어났으며, 특히 실기를 겸비한 서화가로서 이론과 감상에도 이름이 높았다. 자신이 술회한 이력을 보면, 17세 때 안진경의 「다보탑비」에서 출발하여 우세남을 배우고, 종요와 왕희지로 거슬러 올라가 공부하는 소원(溯源)의 방법을 취하였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2. 소식(1037 ~ 1101)은 송나라의 문학가이면서 동시에 서화가이기도 하다. 호는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하였다. 詩,文,書,畵에 있어 당시의 종주였다. [본문으로]
  3. 미불(米芾 : 1051 ~ 1107)은 북송시대 서화가로 송나라 휘종이 그를 書畵學博士로 삼았다. 시와 문장, 서화를 잘하였으며 감정에 뛰어났다. [본문으로]
  4. 이옹(李邕,678 ~ 747)은 당(唐)나라 때의 관리이자 서법가(書法家)로이북해 또는 이괄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書는 비문을 많이 썼으며, 행서에 능하여 이왕(二王)서법에 새로움을 가미하여 기골(氣骨)있는 서풍을 만든 것으로 평가받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