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49

추사 김정희 28 - 세한도 2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 조선왕조 500년의 걸작, 대한민국 국보(國寶) 제180호. 모두 를 수식하는 표현들이다. 그런 까닭에 유홍준 박사는 누구도 에 대하여 작품의 잘되고 못됨은 물론이고 그림의 됨됨이를 따지는 것조차 불경스럽고 건방진 일로 생각될 정도로 가 신격화, 신비화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명작처럼 의 명성과 과도한 찬사에 눌려 정작 작품에 대한 올바르고 정직한 감상이 방해받게 된 상황에 이르러 를 감상한다는 것은 명작임을 확인하는 것만 가능할 뿐, 스스로의 감상 소견을 갖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토로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엇비슷한 해설은 많은데 눈에 띄는 감상평이나 소감은 찾기 힘들다. 오주석 선생이 자신이 연재하던 글에 올렸던 에 대한 소감의 일부다. 【‘세한도’ 쓸쓸한 화면..

추사 김정희 2018.06.28

추사 김정희 27 - 세한도(歲寒圖) 1

추사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 추사 나이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에 유배온지 5년째 되는 해에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제 온 국민의 상식이나 다름없다. 이상적은 대대로 내려오는 역관1 집안에서 태어나 그 자신 역시 역관이 되었다. 23세 때 역과2에 합격한 뒤 모두 열두 차례나 연경에 다녀온 중국통이었다. 그는 용모가 수려하고 문체도 아름다워 연경에서도 고관대작과 이름 있는 유학자들과 친교를 맺어 70여 명의 중국 문인들과 교류하였으며 학식과 시문에 능했다. 이상적은 추사가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책을 구해 보냈고 이에 추사가 를 그려 그 따듯한 정에 답했다는 것 또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추사가 를 그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발문에 ..

추사 김정희 2018.06.26

추사 김정희 26 - 천축고선생댁

예산 화엄사 뒷편의 병풍바위에는 말고도이라는 석각이 또 있다. [ 암각]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천축고선생댁이란 '천축 나라(인도)의 옛 선생댁'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집', 다시 말해서 '절집'이라는 의미다.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말을 추사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예산고 노재준교사가 작년 2월초 예의 예산뉴스 무한정보에 올린 글을 보면 그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오랜 세월을 견디고 용케 귀환한 추사의 글씨는 바로 ‘상견동파구거사 엄연천축고선생(想見東坡舊居士 儼然天竺古先生)’ 대련 작품이다. 일본 오카야마에서 소장되어 있다 돌아왔다. 세월의 더께는 비켜갈 수 없어 군데군데 구겨져 상처 입은 곳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무사 귀환이다.' [추사 대련 , 무한정보 사진> [추사 대련..

추사 김정희 2018.06.18

추사 김정희 24 - 떠나는 사람

양자를 들이고 며느리를 맞이하고 조상의 영모암도 수리하면서 유배 중에서도 나름대로 누리던 집안의 평안은 잠깐이었다. 1842년 11월 15이, 남달리 금실이 좋았던 추사의 아내 예안 이씨가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아내가 죽은 것을 모른 추사는 11월 18일자 편지에 이렇게 아내의 병을 걱정하고 있었다. "전번 편지 부친 것이 인편에 한 가지로 갈 듯합니다 .............이 사이 연하여 병환을 떼지 못하시고 일야진퇴 (日夜進退)하시나 봅니다.......우록정을 자시나 보오니 그 약이 쾌히 동정(動靜)이 계시올지, 멀리 밖에서 심려 초절하옵기 형용 못하겠습니다." (김일근, 『인간의 연구』1, 제21신) 그러나 그 우록정도 별 효험이 없었던지 아내는 끝내 세상을 ..

추사 김정희 2018.06.15

추사 김정희 23 - 찾아오는 사람

외롭고 괴로운 귀양살이였지만 기쁨과 반가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추사가 귀양 온지 넉달 만인 1841년 2월, 소치 허련1이 제주도 대정의 유배지로 찾아왔다. [허영 ] 소치는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를 월성위궁2에서 1838년 8월 처음 만났다. 주사는 그의 재주를 아껴 사랑채에 머물게 하면서 서화를 지도했다. 그러다 1840년 여름 추사가 정쟁에 휩싸여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소치가 추사를 모시고 지낸지 2년 만에 헤어지게 된 것이었다. "경자년(1840) 7월, 재상 김홍근이 소(疏)를 올려 추사선생을 공격했습니다. 추사선생은 직첩(職帖)3을 회수당할 지경에 이르러서 금호 별장으로 물러나왔습니다. 8월 초에는 예산의 조상 묘소가 있는 곳에 계셨는데 같은 달 20일 밤중에 붙잡혀갔습니다. 그날은 바..

추사 김정희 2018.06.11

추사 김정희 22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추사가 대둔사를 떠나 완도로 가서 배를 타고 제주도 유배지에 도착한 것은 10월 2일이었다. 당시 완도에서 제주까지의 뱃길은 보통 7일에서 10일이 걸리는 멀고 험한 항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사는 아침 해뜰 때 배에 올라 당일 석양 무렵에 제주성 화북진에 도착하였다.1 그렇다고 결코 순탄한 뱃길은 아니었다. 바람이 사납고 파도가 거세어 죽을 고비를 넘나드는 행해였지만 추사는 '꼼짝 않고 앉아서 시를 읊어 시 읊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서로 지지 않고 오르내렸다'2 '고, 뒷날 세간에 전설같은 얘기로 치장되기도 하였다. 화북진에서 유배지인 대정까지는 80리 길이다. 심한 바람 때문에 추사는 다음날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하루를 지체한 뒤 산중간 마을을 잇는 지름길을 걸어 유배지에 도착했다. 추사가 처음 도착해서..

추사 김정희 2018.06.05

추사 김정희 21 - 초의선사

추사가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 명을 받은 것은 1840년 9월 2일이었다. 명을 받고 가능한 급히 행장을 꾸려 떠났겠지만 유배지로 떠난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는다. 추사의 유배지로 가는 길은 전주→ 남원→ 나주→ 해남을 거쳐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 화북진항으로 들어가 거기서 다시 80리 떨어진 제주 최남단 대정현에 이르도록 행로가 잡혀 있었다. 쉬지 않고 가도 한달은 족히 걸리는 길이다. 완당의 유배길에는 의금부 관리인 금오랑(金吾郞)1이 행형관으로 동행하고 집 머슴이 완도까지 따라갔다. 스산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국문을 받은 몸을 이끌고 유배 길에 오른 추사는 당시의 심정을 벗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밝혔다. '행실치고 조상에게 욕이 미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고, 그 다음은..

추사 김정희 2018.06.03

추사 김정희 20 - 추사의 제주 유배

추사는 41세 때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비인현감1으로 있던 김우명이란 자의 비리가 발견되어 봉고파직2 시키는 조치를 내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안동 김씨였던 김우명은 이때의 수모를 원한으로 품어 이후 추사가 당하는 두 차례의 가화(家禍)때마다 앞장을 서곤 했다. 1830년에는 김우명이 추사의 부친인 김노경을 거의 모함에 가까운 내용으로 탄핵을 했다가 삭직되는 벌을 받았는데 결국 김노경도 고금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10년 후인 1840년 김우명이 대사간이 되고 경주 김씨와는 악연인 김홍근이 대사헌이 되어 양사(兩司)3를 장악한 안동 김씨가 옛 일을 다시 들춰내어 이미 고인이 된 추사의 부친 김노경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는 당시 우의정인 조인영, 형조판서 권돈인, ..

추사 김정희 2018.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