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49

추사 김정희 18 - 중국 고대서론 2

종요1의 4) 기정론(寄情論) 서예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장기간 형성된 정감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기정론은 서로 다른 서예가의 손에서 서로 다른 취향과 풍모를 나타내지만, 결국 이런 것들은 '가히 자기의 성정을 이룰 수 있으며 또한 내심의 슬픔과 기쁨까지도 형용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글씨에서 표현하고 있는 '펼침(舒)'과 '거둠(斂)'의 안에 있는 희로애락 등 가슴 속에 있는 감정을 자신의 정서에 상응하여 나타내는 것으로 '형태의 같음만 추구함(從求形似)'을 면하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깨끗하게 하며 성품을 도야하고, 뜻으로 쓴다 (懷抱肅散, 陶性寫情)'의 경지에 이른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정론에는 세 가지 다른 방향의 인식이 있다. ① 能移人情, 乃爲書之至極 '능히 ..

추사 김정희 2018.05.16

추사 김정희 16 - 창암 이삼만

추사의 제주 유배 길에는 원교 이광사 말고도 또 다른 서예가와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상대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 1770 ~ 1847)이다. 창암은 전라북도 정읍 출생으로 만년에는 전주에 살면서 완산(完山)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왕희지의 법첩을 시작으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얻고 있었던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으며 글씨에만 몰두하여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가산을 탕진하였다는 설도 있고,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라 붓과 종이가 없어 대나무와 칡뿌리를 갈아 모래 위에 글씨 연습을 했다는 설도 있다. 창암은 병중에도 하루 천자씩 쓰면서 “벼루 세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고 맹세 할만큼 글씨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으며 누가 글씨 배우기를 청하면 점 하나 획 하나를..

추사 김정희 2017.12.08

추사 김정희 15 - 원교 이광사

이광사(李匡師 : 1705 ~ 1777)는 자를 도보(道甫), 호를 원교(圓嶠)라 했고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집안은 증고조부 등이 모두 명필로 대대로 글씨의 名家였다. 원교는 인품도 높았고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였으며 또 명필로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1755년 전라도 나주에서 불온한 글이 발견된 사건으로1 큰아버지인 이천유가 처형될 때 연좌되어 회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전라도 신지도로 이배(移配)되어 30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원교는 귀양살이 동안 정말로 많은 글씨를 썼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무척 사랑하여 귀양지에서도 그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할 수 없이 아들, 딸에게 대필까지 시켰다고 한다. 해남 대둔사, 구례 천은사 등 전라..

추사 김정희 2017.12.01

추사 김정희 14 - 반야심경(般若心經)

추사가 중년에 남긴 정통적인 예서체 작품으로 비액 전면 글씨가 있다. 추사의 나이 48세 때 규장각 대교였을 당시의 글씨다. 이 글씨를 보면 추사가 글자 구성에 얼마나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는지에 감탄하게 된다. 특히 '光'자의 구부린 획과 '墓'자의 흙 토(土)를 처리한 것을 보면 자유자재로운 천부의 자질이 느껴진다. 추사의 이러한 글씨체는 노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그 특질을 발휘하며 추사체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그러나 처럼 고졸한 글씨를 쓴 것은 만년의 일로, 중년에는 그처럼 무심의 경지에 든 글자를 쓴 일이 없다. 한 서예가의 글씨가 변해가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편지 글씨와 해서작품에 가장 잘 나타난다. 편지 글씨란 본인이 작품이라는 의식을 갖지 않고 쓴 것이기 때문에 그 서예가의 필법이 거..

추사 김정희 2017.11.30

추사 김정희 11 - 영자팔법(永字八法)

앞 글에 유홍준 박사가 추사체 특징 한 가지를 영자팔법(永字八法)을 들어 설명하였는데 영자팔법의 내용을 간략하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영자팔법이란 중국의 서법을 '永'자의 여덟 필획으로 설명한 기법이다. 후한(後漢)의 채옹1(蔡邕 : 132 ~ 192)이 숭산(嵩山)의 석실(石室)에서 글을 배울 때 신수(神授)2 받았다고 하는데, 당나라 장희관의 『옥당금경(玉堂禁經)』과 임은의 『발등서(墢鐙序)』에도 이 내용이 보인다.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예서에서 시작하여 후한의 최원과 장지, 3국시대 위(魏)의 종요, 동진의 왕희지가이어받은 다음 수(隨)의 지영이 취지를 명백히 하고 당나라 초의 우세남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널리퍼졌다 한다. 해서(楷書)의 전형적인 체로서, 모든 글씨의 서법은 '永'자 한 자 속에 포함..

추사 김정희 2017.11.22

추사 김정희 10 - 남북서파론/북비남첩론

· 청나라는 가경(1796 ~ 1820) 연간으로 들어가면서 고증학의 정신을 이어받아 옛것에 대한 연구, 특히 고비 (古碑)를 연구하는 금석학이 크게 일어나 급기야 완원의 북비남첩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추사는 당시 청나라 학예계를 휩쓸고 있던 완원(阮元 : 1764 ~ 1849)의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금과옥조처럼 새기고 있었다. 완당의 제자들이 완원이 쓴 남국서파론을 별 의심 없이 완당의 글로 알고 『완당집』에 실었을 정도로, 완당의 서예론은 남북서파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글씨 쓰는 법이 변천되어 그 흐름이 마구 뒤섞였으니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옛날의 올바른 법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대개 예서로부터 시작하여 정서(正書, 楷書)와 행서 그리고 ..

추사 김정희 2017.11.21

추사 김정희 9-2 - 옹방강과 완원

추사는 1809년 10월 28일 자제군관(子第軍官)의 자격으로 동지부사1로 선임된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으로 떠났다. 자제군관이란 외교관의 아들이나 형제가 개인적으로 사행을 따라가서 외국견문을 익히게 하는 제도였다. 공식수행원이 아닌 만큼 연경에서 자유롭게 그곳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추사는 연경에서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며 견문과 학식을 넓혀갔으며 특히 평생 잊지 못 할 두 사람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담계 옹방강(翁方綱 : 1733~1818)이고 또 한 사람은 운대 완원(阮元 : 1764~1849)이다. 옹방강은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이며 경학의 대부로 자부하는 연경학계의 원로였고, 완원은 '청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일인자'라는 평을 받고 있던 ..

추사 김정희 2017.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