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소치묵묘첩

從心所欲 2021. 4. 2. 14:55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9 ~ 1892)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널리 알려진 화가다. 허균(許筠)의 후손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씨 집안 출신이지만 가문이 몰락하여 화가로 살았다. 산수, 인물, 사군자, 모란, 파초 등 다양한 소재에 뛰어났다.

 

허련의 일생에서 28세 이전의 기록은 별로 없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지만 변변한 교재나 스승도 없었다. 28세 때는 초의선사가 있는 대흥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해남 연동의 녹우당(綠雨堂)을 찾아가 윤두서의 후손에게 《공재화첩(恭齋畵帖)》을 빌려와 모사하며 그림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뒤인 1839년 봄,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경기도 두릉(杜陵)으로 가는 길에 허련의 그림을 가지고 가서 김정희에게 보냈다. 그림을 본 김정희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 이와 같이 뛰어난 인재와 어찌 손잡고 함께 오지 못하셨소. 만약 서울에 와서 있게 하면 그 진보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오. 그림을 보내 주어 마음 흐뭇하게 기쁘니 즉각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그해 8월 허련은 서울에 도착하여 김정희의 서울 집인 장동(壯洞)의 월성위궁(月城尉宮) 사랑방에 머물면서 여항문인화가인 김수철, 이한철, 전기 등과 더불어 김정희에게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게 되었다. 당시 허련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러나 2년 후인 1840년 여름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이 생활도 끝이 났으나, 다음 해인 1841년 2월 허련은 제주도의 김정희를 찾아가 4개월을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1846년에는 김정희의 벗인 권돈인(權敦仁)의 집에 머무르던 중에 헌종에게 《설경산수도》를 바쳐 헌종의 애호를 받았고 세상의 명성도 얻었다. 그럼에도 그의 생활은 대체로 곤궁하였으며 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1856년 추사가 타계하자 허련은 고향 진도로 낙향하여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지내면서 때때로 서울을 오갔다.

 

김정희가 소치 그림을 보고 “내 것보다 낫다.” 거나 "압록강 동쪽에서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鴨水以東 無此作矣]."는 극찬을 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허련의 사군자 그림은 당시에도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특히 묵모란 그림은 그를 '허모란(許牡丹)'이라 불리게 할 정도로 유명한 화목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소치묵묘첩(小癡墨妙帖)」은 오직 묵의 농담만을 이용하여 모란을 그린 그림들을 모은 화첩이다.

 

[허련 「소치묵묘첩(小癡墨妙帖)」표지, 26 x 12.7cm, 국립중앙박물관]

 

첩은 네 면을 펼쳐야 한 폭의 그림을 다 볼 수 있도록 접혀 있다. 각 그림마다에는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인물들의 모란에 관한 시들이 적혀있다.

 

[허련 「소치묵묘첩(小癡墨妙帖)」中 1, 26 x 50.8cm, 국립중앙박물관]

 

未放香噴雪  아직 피지 않았어도 향기를 눈처럼 뿜고

仍藏蕊散金  감추고 있어도 꽃술은 금을 흩날리네.

 

[허련 「소치묵묘첩(小癡墨妙帖)」中 2, 26 x 50.8cm, 국립중앙박물관]

 

[허련 「소치묵묘첩(小癡墨妙帖)」中 3, 26 x 50.8cm, 국립중앙박물관]

 

[허련 「소치묵묘첩(小癡墨妙帖)」中 2, 26 x 50.8cm, 국립중앙박물관]

 

각 폭마다 모란꽃의 모습이나 배치를 달리하여 다양한 변화를 주었고 먹색도 다양하다.

모란은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이름 높았던 구양수(歐陽脩)가 〈낙양모란기(洛陽牡丹記)〉에서 "모란에 이르러서는 굳이 꽃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고 바로 꽃이라고 한다. 그 뜻은 천하의 진정한 꽃은 오로지 모란뿐이라는 것이다(至牡丹則不名 直曰花 其意謂天下眞花獨牡丹)"라고 극찬한 이래 꽃의 왕[花王]으로 알려져 왔다. 이 꽃의 또 다른 이름은 부귀화(富貴花)이다.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의 의미로 인하여, 허련에게 모란 그림을 청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많이 그렸고 또 잘 그렸던 까닭에 '허모란(許牡丹)'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허련이 가장 인간적으로 존경했던 정약용의 큰 아들 정학연(丁學淵)은 “가슴 속 연하(煙霞)의 모습은 알지 못하고 다만 ‘남쪽 고을 허모란’이라고만 말하는구나.”라며 다양한 그림의 재능을 갖고 있는 허련에게 사람들이 모란만 그려달라고 청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연하(煙霞) : 고요한 산수의 경치(景致)

 

[허련 「소치묵묘첩(小癡墨妙帖)」中 5, 26 x 50.8cm, 국립중앙박물관]

 

[허련 「소치묵묘첩(小癡墨妙帖)」中 6, 26 x 50.8cm, 국립중앙박물관]

 

[허련 「소치묵묘첩(小癡墨妙帖)」中 7, 26 x 50.8cm, 국립중앙박물관]

 

[허련 「소치묵묘첩(小癡墨妙帖)」中 8, 26 x 50.8cm, 국립중앙박물관]

 

허련은 조선시대 호남출신 화가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허련에서 시작하여 허련의 아들과 손자들, 그리고 허백련(許百鍊)으로 이어지는 화맥으로 인하여 호남의 화단이 풍성해지면서 호남은 ‘예향(藝鄕)’이라는 명성도 얻게 되었다.

 

 

 

참고 및 인용 : 소치묵묘첩 - 풍진 세상에 붓끝으로 피워낸 화왕(강민경,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역대서화가사전(2011.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