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방 2

조선의 기생 22 - 기방 풍속

조선 전기에는 기생의 거처를 창가(娼家)라고 불렀다. 그저 기생이 유숙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등장한 기방(妓房)은 기생의 거처인 동시에 영업 공간이었다. 기방의 기생은 의녀와 침비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여러 가지 사유로 한양에 올라왔다가 내려가지 않은 향기(鄕妓)들도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국문소설「게우사(誡愚詞)」의 주인공 무숙이와 평양 기생 의양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고, 또 다른 조선 후기의 한문단편집인 「차산필담(此山筆談)」의 이란 야담에도 나타난다. 종로(鐘路)의 큰 기방에 있는 기생이 자신을 “저는 본래 평양 교방(敎坊)의 일등이었습니다. 개성의 대상(大商) 백유성(白惟性)이 만금을 투자하여 이 누대를 꾸미고 저를 술청에 앉혀두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우리 옛 뿌리 2021.09.01

조선의 기생 21 - 주점과 기방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거치면서 생겨난 국가적 혼란은 조선의 사회적 변동을 불러왔다. 왜란 이후 남발한 공명첩(空名帖)과 그 관리 부실은 조선 사회의 중심축이었던 신분제도를 문란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숙종 때까지만 해도 전체 인구 중 6%밖에 되지 않았던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 정조 대에는 30%에 이르고 고종 때에는 인구의 9할이 양반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양반에 대한 권위를 떨어뜨렸다. 그런 와중에 사대부와 관료 중심의 조선사회에 새로운 신분 세력이 떠올랐다. 신흥 부유층이다. 종래의 조선사회에서는 부(富)마저도 양반들이 독점했었지만, 상업과 교역이 발전하면서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부상(富商)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의관(醫官), 역관(譯官)과 같은 ..

우리 옛 뿌리 2021.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