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문인화 10

從心所欲 2018. 10. 12. 15:25

역대 수많은 감상자들과 화론가들이 중국 산수화 최고의 명작으로 꼽는다는 그림. ​

예찬의 <육군자도(六君子圖)>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눈에는 이 그림에 대한 격한 평가를 선뜻 수긍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중국 인민망이 소개한

중국 역대 10대 명화 목록에는 이 그림이 들어있지 않다. 목록에 산수화로는 북송 때의 왕희맹(王希孟)이 그린

청록산수화 <천리강산도(千里江山圖)>와 원말(元末) 황공망의 수묵화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만 있을 뿐이다.

 

[  황공망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1 ,    33cm x 636.9cm, 저장성박물관/ 타이베이고궁박물관]   

 

<부춘산거도>는 중국 전통산수화에서 공전절후(空前絕後)의 예술적 업적을 이룩했다는 찬사를 받는 작품이다.

황공망이 72세 때 무용(無用)이란 스님을 위해 그리기 시작하여 3년 이상을 걸려 완성한 작품으로 무려 6m가

넘는 긴 두루마리에 가을로 접어든 부춘강(富春江)강가의 겹겹이 둘러선 산봉우리, 울창한 소나무와 빼어난

기암괴석, 구름과 안개에 싸인 농촌 가옥들을 아름다운 정취로 담아냈다. 변화무쌍하면서도 맑은 먹빛으로

원근감 있게 아름다운 강남의 산수를 묘사함으로써 자연과 초목의 아름다움을 한층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칭송과 함께 역대 산수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신품(神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외한의 눈에는 이런 <富春山居圖>에 비하여 <六君子圖>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왜 <六君子圖>가

최고의 산수화로 거론되는 것일까? 뿐만 아니다. <부춘산거도>는 '신품(神品)'이라는 평을 얻었지만

<六君子圖>는 ‘일품(逸品)’이란 소리까지 듣는다.

 

예찬(倪瓚, 1301 ~ 1374)은 원나라 말, 부호의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시문과 시화를 좋아하였다. 아버지와

형이 죽어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그는 청비각(淸閟閣) 이라는 큰 서재를 만들어 전국의 유명한 시인, 묵객들을

청하여 교유하는 한편 희귀한 책과 골동품, 서화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전 재산을 친척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홀연히 가족들을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는 소주(蘇州) 태호(太湖) 근처에 배를 띄우고

일생을 가난한 방랑생활을 했다. 방랑생활 중 58세 때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5년 후, 주원장에 의해 명나라가

세워지면서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일과 방랑 속에 평생을 보내다 말년에 귀향하여 병사했다.

 

예찬이 살던 시대는 이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元)왕조가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로 당연히 사회적으로 몽골족과

한족의 갈등이 존재했다. 선비들로서는 학문을 연마하면서도 이민족 국가의 관료가 되어 일신의 영달을 꾀할지

아니면 학문 그 자체를 업으로 여기고 초야에 묻혀 은둔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속세의 명리(名利)를 초개같이 여기고 스스로 곤궁과 은일을 택한 예찬의 행적은 다른 선비들이

닮고 싶은 표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인품이 고결하고 청고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예찬이 죽은 뒤 강남의

사대부들 사이에는 예찬의 그림을 한 점쯤 소장했는지 아닌지를 두고 인품의 청탁을 가늠했다는 얘기도 있다.

 

특수한 사회 계층의 산물인 문인화 역시 당시 시대 배경 및 사회적 분위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원대의 회화는 일반적으로 복고(復古)의 기치 아래 기운(氣韻)을 중시하고 형식[格律]을 가볍게 여기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평범하고 담백하며 자연스럽고 진실함'을 강조하는 '평담천진(平淡天眞)'이 원대 회화가

추구하는 이상이었다. 이 시대에 조맹부(1254~1322)는 문인화의 변화를 추구하여 '사대부의 기상'을 그림 속에

반영할 것을 요구하며 개성과 창의적 예술 경지를 개척하여 중국회화의 대표적인 장르로서의 문인화를 발전시켰다.

 

예찬의 <六君子圖>가 주는 느낌은 맑고 깨끗함을 넘어 적막하고 쓸쓸하다. 그가 자처했던 삶을 떠올리면 그런

느낌이 더 진하게 다가온다. <富春山居圖>의 다양한 풍경과 세련된 필치에서 받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감흥이다.

물기 적은 갈필(渴筆)에 연한 먹을 묻혀 간결하게 그리는 것은 예찬의 특징이다. 그는 근경과 원경을 똑같은

농담(濃淡)으로 그려 가까운 곳은 진하고 먼 곳은 연하게 그리는 근농원담(近濃遠淡)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중국 남종화의 시조격인 거연과 동원 화풍을 계승한 그의 그림은 당시에도 찾는 이가 많아 오랫동안 위작이

성행했다. 그러나 예찬 특유의 적막하고 담백한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낸 화가는 없었다고 한다.

 

[동원(董源)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한림중정도(寒林重汀圖)>, 五代(약 950), 絹本彩色, 181.5×116.5㎝, 日本 黑川古文化硏究所]

 

예찬은 그림의 왼쪽 중간에 <육군자도>를 그린 내력을 이렇게 적었다.

 

“노산보(盧山甫)가 볼 때마다 그림을 그려 달라고 조르더니, 지정(至正)5년(1345년) 4월 8일 정박 해 있던

궁하(弓河)의 배 위에서 노산보가 등을 걸고 이 종이를 내 놓기에 힘들게 그림을 완성했다. 당시 이미 매우

고단하였는데,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응하였다. 대치(大癡) 노스승이 본다면 반드시 크게 웃을 것이다. 예찬”

 

예찬은 자신의 스승이 보면 크게 웃을 것이라고 겸손을 떨었지만 실상 예찬은 이 그림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정말로 보잘 것 없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그림에 자신의 스승 이름을 들먹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예찬이 노스승이라고 부른 대치(大癡)는 누구인가? 바로 <富春山居圖>를 그린 황공망이다.

황공망은 일봉(一峯) 또는 대치(大癡)라는 호를 썼다. 황공망이 이 그림을 보게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결국

황공망도 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오른쪽 상단에 이렇게 화찬을 썼다.

 

 

“멀리 바라보니 구름 낀 산과 가을 물이 떨어져 있고

가까이 보니 비탈진 방죽에 고목(古木)이 둘러섰네.

뜻밖에 육군자(六君子)를 마주하니

바르고 곧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특출하게 서있네“

 

그리고는 ‘대치가 찬하고 운림2이 그리다(大癡贊雲林畵)’라고 썼다. 그림이 <육군자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예찬이 남긴 그림에는 <육군자도>와 유사한 구도의 그림들이 많다. <용슬재도(容膝齊圖> 또한 예찬의

걸작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용슬재(容膝齊)는 무릎을 겨우 펼 수 있을 만큼 작은 정자라는 뜻이다.

 

[예찬, <용슬재도>, 1372년, 종이에 먹, 74.7 x  35.5cm  타이페이국립고궁박물원]

 

화제에 의하면 임자년에 그리고 낙관을 하였는데 2년 뒤인 갑인년(1374년)에 벽헌옹이란 사람의 청에 의해

용슬재의 주인인 인중(仁仲)에게 주기 위해 다시 기다란 글을 썼다. 용슬재는 예찬의 고향 석산(錫山)에 있는

인중의 서재로 예찬은 글에서 봄바람에 만발한 행화(杏花), 금붕어가 뛰어오르는 물, 아름다운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용슬재의 모습을 적으면서 죽기 전에 고향에 가서 용슬재에 올라 이 그림을 다시 볼 수 있기 바란다고

하였다. 예찬은 그 해 고향에 돌아가 생을 마감했다.

 

[예찬<어장추제도(渔庄秋霽图)> 1355年,지본수묵 96.1 x 46.1cm ,上海博物馆]

 

<어장추제도>는 예찬의 나이 55세 때인 1355년 가을, 벗인 왕운(王云)의 포구 어장에서 기거할 때의 작품이다.

그 후 18년이 지난 뒤 73세 때에 예찬은 왕운이 고이 간직하고 있던 이 그림을 다시 보고 감회에 젖어 뒤늦게 그림

중간 여백에 제화 글을 적었다.

 

[예찬 <우산임학도(虞山林壑圖)> 1372년 94.6 x 35.9cm,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상단 오른쪽에 제시를 적고 신해년 12월 13일 백완고사(伯琬高士)를 방문했는데, 이때 산림이 편안해서

그림을 그리고 오언시(五言詩)를 함께 지어 쓰고 즐겼다는 관지가 있다. 예찬의 72세 때 작품이다. 

 

"구름을 보며 붓을 희롱하고

 쥐었던 술잔 바꾸어 시(詩)를 쓰네

 이날 주고받은 즐거운 뜻은

 헤어져도 오랫동안 생각나겠지"

 

제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왕몽(王蒙)은 예찬, 황공망과 함께 원(元)4대가로 불리는 인물이다. 예찬의 그림이 '성글다(疎)'면 왕몽의

그림은 '빽빽(密)'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서로 다른 화풍에도 두 사람은 서로 경외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송하독좌도>라는 그림을 남겼다. 예찬의 그림에 왕몽이 세부의 점과 획을 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예찬 왕몽, <송하독좌도(松下獨坐圖)>]

 

명(明)나라 초기의 왕불, 중기의 문징명(文徴明), 후기의 홍인(弘仁)을 비롯하여 많은 화가들이 예찬의 화풍을 따랐고,

예찬보다 126년 뒤에 태어난 심주(1427~1509) 역시 예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심주, <책장도(策杖圖)>, 지본수묵, 159.1×72.2cm, 타이베이국립고궁박물원]

 

예찬의 화풍과는 별도로 예찬이란 인물 자체를 주제로 한 그림도 있다.

예찬은 결벽증이 심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세수 한 번 하는데 물을 수십 번 바꾸고, 언제나 깨끗이 손질한

흰 옷을 입고, 버선도 하루에 몇 번씩 갈아 신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마당의 오동나무까지 닦게 했다고

한다. 기행에 가까운 이런 일화는 오히려 그의 청렴결백한 인품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세동도(洗桐圖)‘

라는 제목으로 많은 화가들의 화제(畫題)가 되었다.

 

[명대(明代) 최자충(崔子忠) <운림세동도(雲林洗桐圖>) 160 x 53cm, 타이베이국립고궁박물원]

 

[청대(淸代) 왕소(王素)의 <洗桐圖>]

 

[장승업 <고사세동도>, 지본담채, 151.2 x 31cm 삼성리움미술관]

 

 

 

이 글은 한국미술정보개발원 자료, 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2011. 다락원), 두산백과 등을 참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1. 부춘산(富春山)은 저장성(浙江省) 동려현 서쪽에 있는 산으로 한나라 때 고사인 엄자릉(嚴子陵)이 책 읽고 낚시하며 은거하던 곳으로 황공망도 노년에 이곳에 은거하였다. 항저우(杭州)에 있는 전탄강(錢塘江)의 상류를 신안강, 중류를 부춘강이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2. 예찬의 호는 운림(雲林), 운림생(雲林生), 운림자(雲林子)인데 운림을 가장 즐겨 썼다. 별호는 풍월주인(風月主人), 소한선경(蕭閑仙卿), 주양관주(朱陽館主), 무주암주(無住庵主), 유마힐(維摩詰), 정명거사(淨名居士) 등이다. [본문으로]
  3. 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국제신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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