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경(劉長卿, 725? ~ 791?)은 당나라 때의 관리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시(詩) 중에는 유배당하여 실의 속에 보내는 생활과 깊은 산골에 숨어 살려고 하는 정서를 그린 것이 많다. 그 가운데 눈 때문에 부용산 초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경험을 노래한 ‘봉설숙부용산(逢雪宿芙蓉山)’이라는 시가 있다.
日暮蒼山遠 天寒白屋貧
柴門聞犬吠 風雪夜歸人
날은 저물어 푸른 산은 멀고
차가운 하늘 밑 오두막은 궁핍하네
사립문에 개 짖는 소리 들려오고
눈보라치는 밤에 (누군가) 집으로 돌아오네
당시(唐詩)와 유명화가의 그림 경향을 묶어 소개한 『당시화보(唐詩畵譜)』에 이 시가 소개되어 있는데 북종화의 시조로 불리는 이사훈의 아들인 이소도(李昭道)의 필법을 따라 그렸다는「봉설숙부용산(逢雪宿芙蓉山)」이란 판화도 같이 들어있다. 이 시에서 사의를 얻은 사람들이 <風雪夜歸圖>를 그렸다.
[『당시화보(唐詩畵譜)』「봉설숙부용산」]
[청말(淸末)의 오덕이(伍德彛), <風雪夜歸圖> 1917年作]
조선 숙종과 영조 때의 인물로 최북(崔北, 1712-1760)이라는 화가가 있어 그도 <풍설야귀도>를 남겼다.
[최북 <風雪夜歸圖> 지본채색, 66.3 x 42.9 cm, 개인소장]
‘눈보라치는 밤에 집으로 돌아온다’는 시구(詩句) 자체도 황량하지만 최북의 그림은 더욱 황량해 보인다.
수간(樹幹)과 위의 나뭇가지 방향을 보면 눈보라가 얼마나 세찬지 짐작이 간다. 그 속을 지팡이 짚은 나그네가
꿋꿋이 길을 가고 그 뒤를 몸종이 따르고 있다. 얼마나 힘든 길일까?
이 그림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최북이라는 인물의 삶 때문이다. 그는 산수, 인물, 영모(翎毛) 등
모든 화목(畫目)을 두루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 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필법이 대담하고 솔직하여 구애(拘碍)받은 곳이 없었으며 당시의 거장인 심사정(沈師正)과 비길 만한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당대에도 이미 이름이 높아 그의 집 앞에는 그림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괴팍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한양의 미치광이, 비렁뱅이, 주정뱅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림 값을 받을 때 그림 값이 적다는 생각이 들면 마구 욕을 하고는 그림을 찢어 버렸으며,
그림 값이 자기의 생각 보다 많으면 그 사람을 문밖으로 밀어내며 돈을 도로 주고는 "그림 값도 모른다"
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내 그림은 그 가치를 알아보는 이에게만 팔겠다!’고 할 정도로 최북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그림에 있어서는 타협을 모르는 화가였다.
조선 말기의 이한철(1808∼?)이 그린 <최북선생초상>을 보면 한쪽 눈이 감겨져 있다.
[이한철 <최북선생초상>]
한 눈이 멀어 항상 알 하나짜리 반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 한다. 그가 눈을 하나 잃게 된 사연울 조희룡은
『호산외사(壺山外史)』에 이렇게 적었다. 한 귀인이 최북에게 그림을 요구했는데 최북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귀인이 최북을 협박하자 분노한 최북이 “남이 나를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고 하며
스스로 한쪽 눈을 찔렀다고 한다. 이런 괴팍한 성격 탓에 최북은 매일 붓질을 하면서도, 평생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최북은 평생을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눈 오는 어느 겨울 날,
열흘을 굶다가 그림 한 점 팔아 술을 사 마시고는 홑적삼 차림으로 눈 속에서 얼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눈보라를 헤치고 길을 가는 그림 속 인물의 모습에서 험한 삶을 살다간 최북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린 사람의 내력을 알면 그림에서 느끼는 감흥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글은 중국인물사전(한국인문고전연구소), 한시어사전(국학자료원), 두산백과, KBS 천상의 컬렉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등을 참고하여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