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문인화 11

從心所欲 2018. 10. 20. 17:36

일제강점기의 미술사학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 ~ 1944)선생은 동양예술에서 강조하는 도덕성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다.

 

“예술작품 그 자체에서 예술가의 행동을 곧 본다. 안진경(顔眞卿)1의 서(書)가 존귀한 것은 그 자체가 존(尊)함이 아니라 안진경 그 자신의 인물이 갸륵한 까닭이다. 모연수2의 화격(畵格)이 높았으나 동일기시(同日棄市, 동시대의 화가들과 같이 버려질 것)의 일구(一句)로 평가절하됨은 그 위인의 박덕(薄德)의 소치이다. 이와 같이 예술가와 예술작품은 동일한 행동가치를 갖고 있다. 이것이 동양예술의 도덕성이다.”3

 

문인화는 정신 우위의 그림이다. 소재나 기법 같은 형식 보다는 작가의 정신이 중요하고 그림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가가 중요하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고 했고 서화(書畵)는 동원同原)이라고 하여 문인화는 그림을 통하여 작가인 인간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문인화를 볼 때면 늘 작가의 인품이 함께 거론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예찬과 그의 그림은 선비들 사이에 회자될만한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그런 만큼 예찬의 그림을 방(倣)한 작품도 많이 전한다.

 

[동기창(董其昌) <방예운림산수(倣倪雲林山水)> 1633年]

 

[동기창(董其昌) <방예운림산수(倣倪雲林山水)>]

 

[청대(淸代)  왕원기4(王原祁, 1642 ~ 1715) <방예찬고사산수(倣倪瓚高士山水)> 1712年]

 

[왕원기(王原祁) <倣倪瓚山水> 1714年]

 

[조희룡(1789~1866) <방운림산수도>, 지본수묵, 22 x 27.6cm 서울대학교박물관]

 

[허련(1807 ~ 1892) 방예운림죽수계정도(倣倪雲林竹樹溪亭圖) 지본수묵 21.2 X 26.3cm, 서울대박물관]

 

소치 허련은 1856년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 진도에 내려가 예찬의 호를 딴 운림각(雲林閣)이라는 화실을 지었다. 현재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왜 옛 사람들은 남의 그림을 따라 그렸을까?

남제(南齊)의 사혁(謝赫)이 「고화품록(古畫品錄)」에서 제시한 육법(六法)의 전이모사(傳移模寫)는 임(臨), 방(倣), 의(擬), 필의(筆意) 등 옛사람의 그림을 그 정신 및 형태를 따라 그리면서 그 기법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전통을 완벽히 습득하는 과정을 통하여 선인들의 본받을만한 기법을 유지하고 계승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동양 회화에 복고주의(復古主義)라는 특수성을 갖게 했다.  

전통적인 화법을 체득하는 과정은 크게 모(摹), 임(臨), 방(倣)으로 나뉜다. ‘모’(摹)는 구모(鉤摹)라고도 하는데, 그림 위에 얇은 종이나 비단을 겹치고 비춰진 형상을 따라 그리는 것이다. 임(臨)은 원본을 옆에 놓고 보면서 그리는 방법으로 구도나 필법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이는 선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서화학습인 동시에 자신의 예술적 개성과의 융합과정으로 보았다. 방(倣)은 모(摹)나 임(臨)의 단계를 거쳐 어느 정도 자신만의 화법(畵法)을 터득한 다음에 본받고자 하는 특정 대가의 필법이나 화풍을 차용하면서도 자신의 화풍으로 새로운 작품을 그리는 것이다. 원작의 정신성이나 화의(畵意)를 본받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원작과 차이가 많이 날 수도 있다.

 

모(摹)는 원작이 손상되어 멸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복제본을 만드는 경우에도 사용되었던 방법이다. 주요인물의 초상화나 종교화 등에서 대상을 똑같이 그려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면서 그 성격이 변질되어 고의적으로 위조품을 만드는 데 악용되는 사례도 많았다. 모(摹)는 원작과 같은 크기의 그림이 되지만 임(臨)은 따라 그리는 작가가 선택한 화폭의 크기에 따라 그림의 크기도 달라진다. 그것은 방(倣)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방(倣)은 임(臨)에 비하여 훨씬 자유롭다. 옆으로 그린 그림을 세로로 그릴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유홍준박사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예찬류의 그림이라고 했다. 세한도의 갈필(渴筆)과 건묵(乾墨), 그리고 그림이 전하는 스산하고 쓸쓸한 느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대개의 문인화에 갈필이 사용되는 이유는 선비의 생활은 윤택하기 보다는 청빈해야 하고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뜻에서다. ‘먹을 금처럼 아낀다[惜墨如金]’ 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세한도>는 현대적 디자인의 layout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화제와 발문의 위치, 발문과 그림의 비례, 먹의 묵직함에 활기를 주는 오른쪽과 중간, 왼쪽에 찍힌 3개의 인장(印章)에서 나오는 붉은 색까지, 글과 그림의 배치가 균형이 잡혀 안정감이 있고 소박하면서도 세련되어 격조가 있어 보인다. 10년 전쯤 국립중앙박물관 이수미 학예연구관이 <세한도>의 안정적 구도의 배경을 규명하기 위하여 '수적(數的)관계‘로 분석한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아래 그림은 그 연구결과를 나타내는 표이다.

 

 

표만 보아도 대강 분석 요지를 알 수 있기에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지만 추사가 이렇듯 자로 재듯이 따져가며 그림을 그렸을 리는 만무하다. 추사의 연륜으로 포치를 하고 그린 그림의 결과가 이렇게 나왔을 것이니 다시 한 번 추사의 높은 경지에 감탄할 뿐이다. 그런데 그런 추사가 왜 <세한도>의 집은 왜 그리 어울리지 않게 크게 그렸을까? 옛 그림에 주변 경물의 크기와 비교하여 집을 이처럼 크게 그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집이나 건물은 오히려 실제 비례보다도 더 작게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세한도>에 있는 집은 얼핏 요즘의 창고건물만큼이나 커보인다. 이 큰 집은 무슨 의미일까?

 

세한도 발문은 이런 구절로 끝난다.

“아아! 전한(前漢)시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라.

아! 슬프다!“

 

급암, 정당시는 높은 벼슬에 올랐을 때는 문전성시를 이루다가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는 집 앞에 새잡는 그물을 칠 정도로 한산했다는 고사의 주인공들이다. ‘적공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란 이런 내용이다.

 

一死一生 卽知交情

一貧一富 卽知交態

一貴一賤 卽見交情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이 나타나네

 

추사는 유배지에서 예전의 관계로 봐서는 마땅히 연락이라도 하고 찾아오기도 해야 할 사람들이 자신을 도외시하는 것을 보고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한탄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았을까? 어울리지 않게 크게 그려진 집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허무의 크기일 수도 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유배지의 작은 집이 마음속에는 저토록 큰 빈집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추사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알고 또 발문에 드러낸 그 심경을 공유하고 나면 소소하고 졸박(拙樸)하여 보잘 것 없어 보이던 그림이 어떤 대작 못지않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바로 사의(寫意)를 읽는 방법이고 문인화를 보는 방법일 것이다.

 

 

  1. 안진경(顔眞卿, 709 ~ 785)은 중국 당(唐)나라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균제미(均齊美)를 충분히 발휘한 글씨로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했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2. 모연수(毛延壽)는 ‘서경 잡기(西京雜記)’에 중국 전한(前漢)의 화가로 소개된 전설상의 인물이다. 인물 초상(人物肖像)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다. 원제(元帝) 때, 후궁의 수가 매우 많아서 모연수와 같은 화공들에게 그리게 하여 황제가 그림을 보고 미희를 골랐는데, 후궁들은 다투어 화가에게 뇌물을 주었으나, 왕소군(王昭君)은 그러지 않아 모연수가 초상을 사실과 다르게 그렸다. 그로 인하여 수년이 지나도록 왕소군은 황제에게 간택되지 못했다. 그러다 흉노의 왕 호한야(呼韓邪)가 한나라와 혼인 화친을 청하자, 한나라에서는 왕소군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왕소군이 흉노로 떠나가는 날 원제가 왕소군의 용모를 처음 보고는 크게 놀랐다. 그는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기 싫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라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에 원제는 크게 노하여 모연수를 죽이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왕소군은 중국 고대의 4대 미녀의 하나로 날아가는 기러기가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낙안(落雁, 기러기도 떨어뜨린다)’이란 별명을 얻었다. (인명사전, 민중서관)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본문으로]
  3. '들어가서 보는 그림 동양화' (김상엽, 루비박스) [본문으로]
  4. 청조(淸朝) 문인화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왕시민의 손자로 할아버지와 함께 오파(吳派)의 정통을 이은 청대 4왕오운 中 일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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