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

從心所欲 2018. 11. 8. 19:05

풍속화하면 대뜸 떠오르는 인물이 김홍도와 신윤복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그림이 우리에게 친숙해져 있다는 증거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주목받는 다른 풍속화가들이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풍속화 또는 풍속도는 문자 그대로 풍속을 그린 그림이다.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궁궐이 아닌 민간의 생활상을 다룬 그림으로 한정하여 사인풍속도(士人風俗圖) · 서민풍속도(庶民風俗圖)로 나눌 수 있다. 사인풍속도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린 것으로 수렵도, 계회도, 시회도, 평생도 등이 주제가 된다. 반면 서민풍속도는 일반 백성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다룬 것이다. 궁중에서도 임금이 정치의 참고 자료로 삼기 위하여 서민 풍속화를 제작하였는데, 빈풍7월도(豳風七月圖)1, 경직도(耕織圖)2 등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여인들의 생활이나 자태를 그린 미인도(美人圖)도 서민풍속도에 속한다. 미인도는 원래 궁중 여인들을 그린 사녀도 (仕女圖)3에서 연원한 것이라 한다.

 

조선 전기의 풍속화는 궁중 수요의 풍속화, 삼강행실도류 판화, 계회도, 시회도와 같은 사인 풍속화, 서민 풍속화, 불화 속의 풍속 표현 등 다양한 면모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다른 장르에 비하여 크게 발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궁중 수요의 풍속화와 민간 수요의 풍속화가 함께 발달했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점은 풍속화를 속화(俗畫)라는 명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속화는 원래 문인화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저속한 그림이라는 뜻의 가치 개념이다. 조선 후기 이전에는 고아하고 아취 있는 세계를 숭상하고 통속 세계를 푸대접했기 때문에 과도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났다. 즉, 아취 세계뿐만 아니라 통속 세계까지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서민 풍속화가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한 것도 이러한 인식의 변화 속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이면에는 당시 신분 사회의 동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서민 풍속화는 윤두서(尹斗緖)와 조영석(趙榮祏)과 같은 사대부 화가에 의하여 주도되었는데 윤두서는 17세기 산수인물화에서 점차적으로 풍속화의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였다.

 

[윤두서 <경전목우도(耕田牧牛圖)> 21 x 25 cm]

 

소를 몰며 밭을 가는 농부와 그 아래쪽에 소에게 꼴을 먹이며 누워 쉬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등장인물이 농부이기는 하지만 농부대신 신선이나 양반으로 바꾸어 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풍경이다. 풍속화라기보다는 문인화가들이 그린 산수화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그림을, 밭 갈고 소를 치는 ‘경전목우도’라는 이름보다 ‘산골의 봄’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고 했다. 확실히 이 그림에 후기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에서 나타나는 주인공들의 생기와 삶의 생동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양반 대신에 농부가 등장하고 고고한 아취의 산수 대신에 일상적 풍경인 밭을 등장시킨 것만으로도 이 그림은 혁신적이라 할만하다. 진경산수에 풍속을 담아내려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이후 펼쳐지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화풍에 윤두서가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는 마땅해 보인다.

 

[윤두서 <수하직이도(樹下織履圖)> 저본수묵. 32.4 × 21.1cm, 해남 윤영선 소장]

 

이 그림의 한글 제목은 <짚신삼기>다. ‘나무 아래서 짚신을 삼는 그림’이라는 의미의 ‘수하직이도’라는 제목만큼

아직도 그림 자체는 조선 중기 절파 화풍의 산수인물화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나무 밑의 인물이

고사(高士)에서 농부로 바뀐 정도이다. 하지만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 이렇게 크게 그려진 것만으로도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윤두서 <채애도(採芠圖)> 25 x 30.2 cm]

 

이 <나물캐기>라는 그림에 드디어 농사꾼 아녀자의 모습이 등장했다. 이 그림 이전에 농사꾼 아녀자의 모습이 그림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비탈진 밭 자락에서 몸을 굽혀 캘 나물을 찾는 여인과 잠시 허리를 펴고 뒤쪽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이 앞 그림들의 등장인물에 비해서는 훨씬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언뜻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가 연상되기도 한다.

장 프랑수아 밀레가 <이삭줍기>를 1857년에, <만종>은 1859년에 그렸으니 이 그림은 그보다는 대략 150년 앞선 그림이다. 여인들이 입은 저고리의 밑단이 근 100년 후 신윤복의 그림에 보이는 여인들의 저고리 길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것과 짧은 치마 안에 속바지를 받쳐 입은 모습도 눈에 띈다.

 

[윤두서 <돌깨기>, 22.9 x 17.7cm]

 

<돌 깨는 석공>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 비로소 윤두서의 그림에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짧은 바지에 웃통을 벗은 석공의 앙다문 표정이 비교적 실감이 난다. 망치를 든 사내의 힘찬 모습과는 반대로 정을 잡고 있는 사람은, 채가 휘어질 정도로 무거운 망치가 정에 꽂히는 순간 튀어오를 돌 조각에 신경이 쓰이는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역시 석공의 표정과 맞물리는 실감나는 표현이다.

 

 

[윤두서 <선차도(旋車圖)4> 지본수묵, 32.4 x 20.2cm]

 

완전히 배경을 생략해 버리고 목기를 만드는 두 사람만 집중 묘사함으로써 풍속화다운 면모가 두드러진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비스듬히 놓인 회전축을 사이에 두고 나무틀에 기대어 두 발에 피댓줄을 걸고 축을 돌리는 인물과, 돌아가는 나무에 기구를 대어 함지박을 깎는 두 인물을 뛰어난 화면 구성과 묘사력으로 표현해 냈다.

윤두서는 이런 그림을 그리기 전에 많은 시간을 들여 관찰한 후에야 붓을 들었다고 한다. 윤두서는 그림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는데, 이 그림은 특히 기술의 발전에 흥미를 갖고 그렸다는 점에서 실학자인 동시에 풍속화가로서의 윤두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처럼 윤두서의 풍속화는 하층민 생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수준에서 출발하였다. 윤두서의 아들인 윤덕희, 그리고 손자인 윤용도 그림을 그렸다.

 

[윤덕희 <공기놀이> 비단에 담채, 22 x 17.8cm 국립중앙박물관]

 

윤용(尹愹, 1708-1740)은 시와 그림에 재주가 뛰어났으나 33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했다. 아래는 그가 남긴

<협롱채춘(挾籠採春)>이라는 그림이다.

 

[윤용 <협롱채춘(挾籠採春)> 종이에 담채 27.6×21.2cm, 간송미술관]

 

협롱채춘(挾籠採春)은 ‘나물바구니를 끼고 봄을 캐다’는 의미이다. 낫인지 목이 긴 호미인지를 들고 옆구리에

바구니를 끼고 뒤돌아 서 있는 여인의 걷어 올린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종아리에서 꾸밈없는 소탈함이

느껴져 더욱 정겹다.

 

 

이 글은 조선풍속사(강명관, 2010, 도서출판 푸른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테마로 보는 미술(2011,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기타 자료를 참조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1.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 豳(빈)은 주나라의 옛 이름으로 지금의 섬서성에 속하는 지역이다. 빈풍칠월편(豳風七月篇)은 ‘시경(詩經)’의 빈풍편(豳風篇)은 주(周)나라 주공(周公)이 섭정을 그만두고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성왕(成王)을 등극시킨 뒤, 백성들의 농사짓는 어려움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7월’을 포함하여 모두 7개의 편이 있는데 특히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이나 잠업(蠶業)과 관련한 풍속을 월령 형식으로 읊은 칠월편의 내용만 그리는 경우가 많고 이를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칠월편을 8장면으로 구성한 빈풍칠월도가 주로 제작되었다.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 이담북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2. 경직도(耕織圖)는 농사짓는 일과 누에 치고 비단 짜는 일을 그린 풍속화를 말한다. 통치자로 하여금 농부와 누에치는 이들의 어려움을 알게 하여, 일반 백성들의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근검절약하고 좋은 정치를 하도록 하는 교훈을 주는 그림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전시 해설, 국립민속박물관) [본문으로]
  3. 사녀도(仕女圖) : 중국풍 궁중 복식의 여인을 그린 그림. 사녀(仕女)의 연원은 ‘사녀(士女)’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녀(士女)라는 말은 중국 진한(秦漢) 이전에는 결혼하지 않는 여자를 지칭하다가, 진한 이후에 여자 또는 상류층의 부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당대(唐代)에 사녀도는 귀족 부녀를 소재로 그린 그림을 칭하였다. 그러나 당대(唐代)까지도 사녀도는 아직 장르로 확립되지 않았고 보편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다 송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사녀가 미인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에 “사녀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날씬하고 고운 자태가 풍부해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4. 선차(旋車): 발로 돌리는 물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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