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풍속화의 문을 연 인물은 윤두서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우리의 풍속화라고 하기에는 그리 친근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우리 것 같지가 않고 어딘가 중국 냄새가 난다. 우리의 풍속화에서 이 중국 냄새를 걷어내고
후기 풍속화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 조영석이다. 조영석은 풍속화를 그리면서 여러 가지 색다른 시도를 했다.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여 인물에 집중하면서 생동감을 주려 했고 등장인물에 해학적 요소도 가미하려고 했다.
과감한 구도도 선보였다. 그러면서 소위 전통화법이라는 종래의 중국풍과는 다른 그림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후에 불세출의 화가 김홍도에게까지 연결이 되었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 1686~1761).
오늘날 조영석의 화명(畵名)이 높지는 않지만, 흔히 조선 후기 화가를 꼽을 때 ‘삼원(三圓)·삼재(三齋)’라는
말을 하는데 이 삼재의 자리를 놓고 윤두서와 자웅을 겨루는 인물이다. 삼원(三圓)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
(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일컫는다. 삼재(三齋)는 겸재(謙齋) 정선과 현재(玄齋) 심사정까지는
이론이 없다. 다만 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 공재(恭齋) 윤두서를 꼽기도 하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꼽기도
한다.
우리 옛 그림 가운데 제일 어렵다는 게 인물화, 즉 초상화라고 한다. 외모를 정확히 묘사해야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인품까지도 그림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조영석은 인물화에 관해서는 당대에 이미 제일로 손꼽히던 화가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화명(畵名)을 얻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여기(餘技)로서 그림을 즐겼지만 자신이 화가로 취급 받는
것은 사대부로서 체면을 잃는 일로 생각했다.
[조영석 <조영복 초상>1 , 125㎝ x 76㎝, 경기도박물관]
1735년, 영조는 임진왜란 이전의 어진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던 세조의 어진이 300년이란 세월이 흘러 형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쁜 것을 보고 이를 다시 모사2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영조는 세조 어진을
모사하는 일의 감동관(監董官)3으로 당시 의령 현감으로 있는 조영석을 임명하였다. 그런데 조영석은 임금의
명을 받고도 한양에 올라오지 않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의금부에 명하여 당장 조영석을
잡아오게 했고 조영석은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았다. 이때 조영석은 ‘그림 그리는 것과 같은 말예(末藝)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사대부의 도리가 아니다’는 취지로 어명을 받들지 않은 이유를 대답했다. 조영석은 이 일로
현감 직에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그는 선비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후에 추사도 그를 ‘사대부
중의 사대부’라 칭송했다.
함안 조씨 집안에는 조영석의 그림 15점을 모아놓은 「사제첩(麝臍帖)」이 전해 내려온다. 목탄이나 먹으로
간략하게 윤곽만을 그린 스케치에서부터 정교한 채색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습작들을 모아 놓은 화첩
이다. 그런데 화첩 표지에는 ‘勿示人 犯者非吾子孫’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남에게 보여주지 마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
[조영석 「사제첩(麝臍帖)4」표지]
사천 이병연이 쓴 화첩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조영석이 영조의 명을 거역한 후 절필하자 후손이 그의 그림을
모아 화첩을 만들었는데, 조영석은 이 화첩을 보고 자신이 과거에 그림을 그렸던 사실을 몹시 후회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에게 미완성인 이 습작들을 절대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이다.
본인의 이런 의사와는 상관없이 조영석은 이미 일찍부터 세간에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규상(李圭象, 1727~1799)의 문집. 《일몽고(一夢稿)》중 <화주록(畵廚錄)>에는 정선, 심사정 등 12명의
사대부 화가와 김홍도등 9명의 화원화가에 대한 평이 있다. 여기서 이규상은 “그림의 세계에는 사대부 화가와
화원 화가가 있다. 이들의 그림과 기법은 각기 유화(儒畵)와 원화(院畵), 유법(儒法)과 원법(院法)으로 나눌
수 있다. 대개 화가는 두 파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세속에서 원법이라 일컫는 것으로, 화원(畵員)이 나라에
이바지하는 그림의 화법이다. 또 하나는 유법으로 신운(神韻)을 위주로 하여 필획의 가지런함과 성김을 돌보지
아니하고 화원(畵院)에서 그리는 그림과 다른 것이 대체로 유화에 해당한다.
원화의 폐단은 신채(神彩)의 드러남 없이 진흙으로 빚어놓은 것 같다는 점이며, 유화의 폐단은 모호하고 거칠고
난잡하며 간혹 먹의 운용이 서툰 탓으로 필획이 두터우며 지면이 온통 새까맣게 되기도 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규상은 동시대 사대부 화가 중 조영석을 당대의 최고화가로 평가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원법을 갖고 유화의 정채(精彩)함을 제대로 펴낼 수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식견과 의견도 갖추고 있어서
하나의 물건 하나의 형상 할 것 없이 모두 천지간의 조화와 짝할 만 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그림은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바로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 홍의영(洪儀泳)의 『관아재화첩』발문에 의하면 “본래 인물에 뛰어났으며, 겸하여 산수도 잘하였고,
금강산을 다녀온 뒤 화경(畵境)이 더욱 진보되어 명작을 많이 냈으며, 또한 고화(古畵)에 대한 논평을
좋아하였으나 간혹 지나친 점이 있어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조영석이 겸재 정선보다 10살이
어렸지만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살면서 정선, 시인인 이병연과 이웃이 되어 교유하면서 시화(詩畵)를
논하고는 하였다.”고 한다.
조영석은 ‘산수를 그리는 데는 겸재가 나보다 낫겠지만 인물을 그릴 때에는 유화를 갖고 얘기하자면 나에게
양보를 해야 할 것이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위의 <어선도>는 고깃배의 어부 일가족을 그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e뮤지엄 사이트는 이 그림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구도와 붓 솜씨가 돋보이는 <어선도>는 중국 명대(明代)에 활동한 화가 당인(唐寅)의 화풍을
본받아 그린 것이지만 실을 꼬는 인물의 모습은 오히려 윤두서의 <짚신 짜는 인물>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섬세한 표현력은 아기를 업은 여인의 표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풍속화를 그렸지만 세속적인 기운을 배제하려는
사대부 기질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 있는 글은 강세황의 화찬(畫贊)으로 “관아재의 그림은 우리 동쪽 나라에서 제일이오.
인물화는 관아재 그림에서 제일이며, 이 그림은 관아재 그림에서 제일이다. 내가 일찍이 수십 년 전에 이 그림을
보았는데 지금 또 다시 본다”는 내용이다.
그림에는 낚싯줄을 손보고 있는 사내와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아낙의 모습이 보인다. 이전그림들에서는 보지
못하던 풍경이다. 우리 옛 그림에 낚시하는 어부는 흔하다. 그러나 낚시하는 어부는 생업으로서의 어부가
아니라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은일하는 고사(高士)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조영석의 그림에는 그런 고사가 아니라 진짜 어부가 등장한 것이다. 어부뿐만 아니라 그 일가족이
모두 등장했다. 그물 손질하는 아낙은 어부를 쳐다보고 있는데 아마도 어부의 아내일 것이다. 아이는 그들
부부의 아이일 것이고 아이를 업은 여자는 자식 내외가 일하는 동안 손자를 돌보고 있는 아이의 할머니일
것이다. 사대부가 아닌 어부와 그 가족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그림은 우리 풍속화의
새 장을 연 그림이라 할 만하다. 다만 한 가지 의구심은 남는다. 이 그림이 과연 그 시절의 우리 풍속을 그린
것일까 하는 점이다. 그림을 보면 배 안에 상과 그 위에 그릇들이 보인다. 이것은 배안에서 생활도 한다는
의미다. 우리 풍습에 배를 거처(居處) 삼아 일가족이 배안에서 살던 일이 있었던가? 이런 생활은 강이나
바다가 아닌 물결이 잔잔한 호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원나라 예찬이 소주(蘇州) 태호(太湖) 근처에 배를
띄우고 살았다고 하듯이 중국 강남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보인다. 당인의 필의를 방했다고 한
그림이니, 중국 풍습을 조영석 나름으로 소화해서 그린 그림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물들의 복장도 우리나라
것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낯설어 보인다.
조영석보다 100년 뒤의 인물인 도화서 화원 유운홍(劉運弘,1797∼1859 )이 그린 <고깃배>와 비교하면
그림이 주는 느낌의 차이가 확연히 다르다.
어선 뒤편으로 지나가는 나룻배 위의 갓 쓴 양반이나 어부들의 복장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고기잡이를 마치고
포구로 들어오는 어선 안에는 그물이 가득하다. 고물에는 어부 둘이 삿대로 배를 밀고 이물에서는 물레처럼
생긴 것에 걸쳐진 닻줄을 잡고 힘을 쓰는 어부가 보인다. 물레바퀴 모양의 둥그런 장치는 닻줄물레인데
굴통이라고도 부른다. 닻을 올리고 내리는데 사용하는 도구다.
<절구질>이라는 그림은 풍습도 우리 것이지만 그림 내용도 훨씬 우리 것 같아 보인다.
훨씬 간단해 보이면서도 짜임새가 있는 그림으로 보인다. 빨랫줄과 초가집 기둥의 수평 수직 구도가 안정적
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평도 있다. 그림 옆에 운수도인이라는 사람이 쓴 화제는 이렇다. “관아재의 필법은 늘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니, 보는 사람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절구질은 곡식을 찧는 일이다. 그리고 언제나 곡식 찧는 일은 여자의 몫이었다. 찧는다는 것은 곡식을 쓿거나
빻으려고 절구에 담고 공이로 내리친다는 의미이다. 빻는다는 것은 곡식의 가루를 내는 일이고 쓿는다는
것은 곡식의 속꺼풀을 벗기고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예전에는 곡식을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상태로 보관하면서
매일 먹을 만큼만 쌀, 수수, 보리 등을 가져다 쓿어서 밥을 지어 먹었다. 그래서 시골 동네마다 기계를 돌리는
정미소가 생겨난 후에도 웬만한 집에는 장구 모양의 절구통이 하나씩은 꼭 있었다. 그림에 보이는 절구통은
우리가 근래에 보아온 절구통과는 달리 직사각형에다 크기도 작다. 작은 다듬이 방망이질도 요령이 있듯,
이 절구질도 요령을 얻기까지는 숙련이 필요한 일이었다. 절구 공이를 들어보지 않고는 그 말의 뜻은 알기가
힘들다. 그래서 절구질을 하는 여인의 굽은 등과 고단해 보이는 얼굴 표정에 더욱 공감이 가는 그림이다.
참고 문헌 : 화인열전(유홍준, 2001, 역사비평사), 세계미술용어사전(1999, 월간미술), 조선풍속사(2010,
도서출판 푸른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원형 용어사전(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환쟁이 김홍도(허남오, 2014, 지구문화사)
- 조영석이 귀양 간 형 조영복을 1724년에 찾아가 그린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조선 초상화에서는 드물게 양손이 나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조도 이 그림을 보고 조영석의 그림 솜씨를 인정했다 한다. 보물 제1298호 [본문으로]
- 임금의 어진 제작방법은 크게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의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도사란 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보면서 그리는 것이고 추사란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리는 경우로서 흡사하게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한다. 모사(模寫)는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혹은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경우에 기존본을 범본(範本)으로 하여 새로운 본을 그릴 때에 일컫는 말이다. 이모(移模))라고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 감동관(監董官) : 조선시대 국가의 공사(工事)를 감독하고 독촉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하던 관직. 이때는 어진 도사를 감독하는 직책 [본문으로]
- 사제(麝臍)는 사향노루 배꼽이라는 뜻이다. 유홍준 박사는 사향노루가 사냥꾼에게 잡히면 자기가 잡힌 탓을 자신의 배꼽에 있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처럼, 관아재도 이 화첩이 자기로서는 향기로운 것인데 남에게는 책을 잡히는 것이 된다는 뜻으로 썼다고 해석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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