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4

從心所欲 2018. 11. 22. 17:11

 

[성협 풍속화첩 <말징박기>]

 

 

성협이라는 화가가 그린 또 다른 말 징 박기 그림이다. 편자를 박는 모습은 앞의 두 그림과 다르지 않은데 징을 박는 

일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노인이 등장한다. 왼 손의 모양으로 보아 일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다. 이 노인은 누구일까? 말의 주인일까? 알 수 없다. 노인은 말과 상관없는, 그냥 길 가던 사람일 수도 있다.

버둥대는 말에 매달려 징을 박고 있는 사람들의 일하는 품새를 보니 어설퍼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노인은

그간 자신이 보아왔던 말 징 박는 일에 대한 안목을 바탕으로 훈수를 한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노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하던 일에 열중이다. 이런 상상으로 그림을 보면 그림의

제목을 <훈수하는 노인>이라 불러도 될 듯싶다.

기술의 발전이 빠르지 않던 농경사회에서는 경험이 큰 자산이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경험이

많을수록 잘 알고 경험이 많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세월도 필요하다. 그래서 예전에는 마을이나 집안의

큰일에는 반드시 마을과 집안의 어른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길거리에서 노인들 남의 일에 훈수하는 일도 흔한

풍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산업의 근대화로 그런 풍경들이 사라져 버렸다. 모르니 훈수할 일도 없고 훈수를

해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듣지를 않는다. 요즘 눈으로 보면 노친네의 쓸 데 없는 참견이나 잔소리하는

풍경으로 보일 이 모습도 예전에는 우리의 풍습이었다.

 

훈수하면 바둑과 장기가 빠질 수가 없다. 조영석의 그림에 ‘현이도(賢已圖)’ 또는 ‘장기놀이’라고 불리는 그림이 있다.

 

[조영석 <현이도(賢已圖)> 견본채색 31.5×43.3㎝, 간송미술관]

 

 

‘현이(賢已)’라는 단어는「논어(論語)」‘양화(陽貨)’편에서 공자가 “배부르게 먹고 하루 종일 마음을 쓰는

데가 없다면 곤란하다. 바둑과 장기가 있지 아니한가? 그것이라도 하는 것이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라고 말한 데에서 따온 말이다. 

현이도는 조영석의 풍속화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의 그림에

대한 해설은 이렇다. “장기가 막판에 다다른 듯 서로 잡아놓은 말들이 수북하고 장기판에는 장기 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른쪽의 갓 쓴 선비가 말을 놓으며 반쯤 돌아앉은 채 일어날 태세인 것으로 보아 한 두수면 끝나는

묘수로 장을 부른 모양이다. 외통수에 걸려 수가 없는지 낙천건1을 쓴 상대방은 난감한 표정이 역력하고

그 옆의 탕건 쓴 선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감탄을 연발한다. 제비부리댕기를 드린 총각 하나가 지나가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듯 돗자리 끝에 올라서서 방정맞게 부채질을 하며 어깨너머로 아는 체를 하고 소나무

아래 사방건을 쓴 선비는 바둑판과 쌍육(雙六)판을 낀 채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장기판을 구경하며 미소를

짓는다.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실감나게 묘사해 막판에 다다른 장기판의 흥분을 생생하게 잡아냈다.

필선이 고아하고 담백하다.”

 

그림 오른쪽 하단에 있는 글씨는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를 밝힌 것인데 글자가 훼손됐지만 대강의 뜻은

‘성중(成仲)이 중국의 팔준도2 2점을 가져와 현이도를 그려 달라고 부탁하여, 왕희지가 거위 대신 경서를

써준 것을 생각하고 흔쾌히 그려 주었다’는 것이다. 성중은 당대 최고의 감식가이자 그림 소장가였던 김광수

(金光遂, 1699 ~ 1770)로, 18세기 문인 사회에서 골동 서화 수집의 가치를 깨닫고 이를 취미로 정착하는 데

공헌하였다는 인물이다.

중국 동진(東晋)시대에 살았던 왕희지(王羲之, 307-365)는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예가로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왕희지는 평소 거위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길고 유연하며 변화무쌍한 거위 목을 보면서

서체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는 말도 있고 붓글씨를 더욱 생동감 있고 힘차게 표현하기 위해 늘 거위가 물에서

헤엄치는 모양을 본떠서 손목을 단련했다는 말도 있다. 왕희지가 오래 살았던 회계 산음(山陰)성에 어느

도사(道士)가 있어 왕희지의 글씨를 얻고 싶어 하였는데 왕희지가 거위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거위를 정성들여

키웠다. 어느 날 왕희지가 도사(道士)가 기르는 거위를 보고는 반하여 팔 것을 청하자 도사는 거위를 팔지는

않고「황정경」을 써주면 거위를 주겠다고 해서 왕희지가 반나절동안 그 경을 써주고 흰 거위를 받아 돌아왔다

한다3. 이 일화는 왕희지의 명성만큼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전선,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4, 지본 채색, 23.2×92.7㎝,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왕희지관아도> 부분]

 

 

[조영석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지본담채, 115×57㎝ 개인소장]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는 눈 내린 겨울 어느 날 한 선비가 칩거하고 있는 벗을 찾아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 전하는 조영석의 작품 중 가장 큰 그림이다. 이 그림 이전까지 한국의 산수화에

나타난 인물들은 모두 중국 그림에서 제시한 인물 묘사법에 의한 것이었으나 이 그림에서는 조선 선비의

모습이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에 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또한 이런 주제의 그림은 산수를 위주로 하여

인물이 작게 그려지는 게 통상적이었는데 인물의 크기를 이처럼 키운 것도 크게 주목되는 점이다. 책들이 있는

방안에는 학창의5를 입은 집주인과 남바위를 쓴 방문객의 모습이 뚜렷하다. 남바위는 이마,귀, 목덜미를 덮는

조선시대의 방한 장비로 ‘풍뎅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휘항(揮項), 난이(暖耳), 이엄(耳掩)이라고도 한다.

그림 아래쪽에는 집주인 선비를 모시는 동자가 친구 선비를 모시고 온 동자를 대문 안으로 안내하고 있다.

아마도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나이 또래라 그런지 팔을 크게 벌려 안내하는 모습에 반가움이 가득해 보인다.

이처럼 인물을 부각시킨 구성으로 인하여 그림의 주제는 산수화나 문인화에 더 가까움에도 실제 그림은 풍속화

같은 느낌이 더 강해졌다. 그럼에도 눈 덮인 뒷산, 푸른빛을 띠고 있는 소나무와 향나무, 마른 나뭇가지에

피어 있는 눈꽃 등 배경의 표현에 나름 공을 들여 고상한 풍취를 낸 것을 보면 조영석이 애초 이 그림을 풍속화로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홍도와 동갑 화원으로 가깝게 지냈던 후세의 이인문( 1745년 ~ 1821)도「고송유수첩(古松流水帖)」

같은 제목의 그림을 남겼다. 한 눈에 조영석의 그림을 임(臨)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림이 닮았다.

 

[이인문, <설중방우도> 종이에 채색, 38.2 × 59.1㎝. 국립중앙박물관]

 

 

조영석이나 이인문의 <설중방우도>가 송(宋)의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개국공신이자 신하인 조보(趙普)의

집을 방문하여 나라 일을 의논하였다는 일화를 나타낸 그림이라는 설명도 있다. 송태조가 여러 번 조보의 집에

가서 그 부처(夫妻)와 술잔을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왕휘지의 산음설도(山陰雪棹)라는 고사(故事)와의 연관성을 말하기도 한다.

왕휘지(王徽之)는 서성 왕희지의 다섯째 아들로 자는 자유(子猷)이다. 왕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현에 살고

있을 때였다.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잠이 깨어 방문을 열자 사방이 온통 은빛인 것을 보고 술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왕자유는 일어나 서성이며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6를 읊조리다가 갑자기 벗 대안도(戴安道

일명 대규戴逵)가 생각났다. 그때 대안도는 섬계(剡溪)에 있었다. 왕자유는 한밤중에 작은 배를 몰아 밤을 새워

대안도의 집 앞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돌아와 버렸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왕자유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내가 흥이 일어 갔지만 흥이 사라져 돌아온 것이다. 어찌 꼭 대안도를 만나봐야 하는가?

(吾本乘興而來 興盡而返 何必見戴安道耶)7

 

산음설도(山陰雪棹)는 왕자유가 눈 오는 정경에 흥에 젖어 눈 오는 밤 노를 저어 벗을 찾아갔다는 의미이다.

이 고사에서 생겨난 또 다른 사자성어가 수의흥회(隨意興會)인데 마음이 흥(興)이 이는 대로 따른다는 뜻이다.

중국에는 이 고사를 바탕으로 한 그림들이 많다.

 

[명대(明代) 심주(1427 ~ 1509)의 <설야방대도(雪夜訪戴圖)>]

 

 

[명대(明代) 문징명(1470 ~ 1559)의 <설야방대도(雪夜訪戴圖)>]

 

 

[명대(明代) 사시신(1487 ~ 미상)의 <산음귀도(山陰歸棹)>]

 

 

 

 

참고 문헌 : 한시어사전(2007. 국학자료원), 문화원형백과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간송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1. 낙천건(樂天巾) :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즐겨 썼다는 비단 두건. 두정 부분에 3cm 정도 폭으로 주름을 잡고, 뒤에는 대나무를 가늘고 길게 깎아 만든 얇은 판으로 장식했다. 순양건(純陽巾)이라고도 한다 (모발학 사전, 2003. 광문각) [본문으로]
  2. 팔준도(八駿圖) : 말을 소재로 한 그림 중에 여덟 필의 준마(駿馬)를 소재로 하는 말 그림 [본문으로]
  3. 이 고사는 진서(晉書)의 ‘왕희지전’과 장언원의 ‘법서요록(法書要錄)’, ‘선화서보(宣和書譜)’등에 실려 있다. 황정경(黃庭經)은 중국 위(魏),진(晉) 시대에 구성된 초기 도교 경전(經典)이다. 서진(西晉) 시대에 ‘외경(外經)’이 먼저 출현하고, 동진(東晋) 시대에 ‘내경(內經)’이 나오면서 내외경을 통칭하여 황정경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왕희지가 베껴 거위와 바꾼 것은 외경이라고 전해진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4. 왕희지가 호수의 거위를 바라보는 그림으로 전선(錢選, 1235∼?)은 송말(宋末) 원초(元初) 때의 화가로 유명한 서예가 조맹부의 스승이다 [본문으로]
  5. 학창의(鶴氅衣) : 웃옷의 한 가지로 흰 빛깔의 창의에 소매가 넓고 가로로 돌아가며 검은 헝겊으로 넓게 꾸민 옷이다. 예로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고 하여 덕망 높은 학자가 입었던 것으로 보통 복건과 함께 착용하였다. 학창의는 학(鶴)과 같이 고귀하고 숭고한 기품의 상징이었다.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본문으로]
  6. 왕자유가 읊었다는 초은시(招隱詩)는 진(晉)의 좌사(左思)가 지은 시로 세상이 혼탁하므로 선비들이 물러나 은퇴하기를 권하는 내용이다 : “지팡이 짚고 은사(隱士)를 부르나니, 거친 진흙길이 고금으로 비껴 있네. 바위 동굴엔 번듯한 집도 없는데, 언덕에서는 거문고 소리 울리네. 흰 눈은 그늘진 산등성이에 쌓여 있고, 붉은 꽃은 햇볕 드는 숲에서 빛나네.” [본문으로]
  7. 이 고사는 중국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유의경(劉義慶:403∼444)이 편집한 후한(後漢) 말부터 동진(東晉)까지의 귀족 명사들의 일화를 모은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실려 있고. 조선 중기에 허균(許筠)이 중국의 여러 책에서 은둔과 한적(閑適)에 관한 내용을 취합한 ‘한정록(閑情錄)’ 권8의 '임탄(任誕)'편에도 나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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