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풍속화라도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은 다르다. 주제도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누구라도 보면 어떤 그림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신윤복의 그림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김홍도가 직선적이라면 신윤복은 은은하다. 김홍도가 남성적이라면 신윤복은 세밀하다. 김홍도는 선이 강하고
빠른 반면 신윤복의 선은 가늘고 유연하다. 김홍도는 주제를 살리기 위해 배경을 생략하는 구성을 즐겨 썼지만,
신윤복은 오히려 세밀한 주변 배경 묘사로 주제를 부각시켰다. 되도록 채색을 절제하며 주로 엷은 갈색을
사용한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은 부드러운 담채 바탕에 빨강, 노랑, 파랑의 산뜻하고 또렷한 원색들을 즐겨
사용했다.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색의 사용이 세련되어 보인다. 신윤복이 이처럼 채색 감각이 뛰어났던 것은
아버지인 신한평의 영향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신한평은 1773년, 1781년, 1791년의 어진 제작 때 모두
수종화사로 참여했다. 그만큼 채색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 전하는 김홍도의 그림은 500점이 넘는데 비하여 신윤복의 그림은「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이라는
춘화(春畵)첩까지 포함하더라도 70점이 조금 넘을 뿐이다. 신윤복의 그림은「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들어있는 그림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혜원전신첩」은 국보135호로 여기에는 30점의 풍속화가 실려
있다.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간송 전형필(全鎣弼)이 일본 오사카의 고미술상에서 구입해와
새로 표구하였고, 이때 오세창(吳世昌)이 표제와 발문을 썼다고 전해진다. 작품마다 각각 4자로 된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런 제목을 오세창이 붙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에는「신윤복필 풍속도화첩(申潤福筆
風俗圖畵帖)」이란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있어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술집에서 잔을 들다’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의 술집 그림으로는 거의 유일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술집에서 술 마시는 그림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술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짐작할만한 단서가
있는 유일한 그림이라는 의미이다.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렸다면 배경은 싹 날아가고 인물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 인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훨씬 쉽게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의 인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흔쾌한 해석을 본 일이 없다. 물론 황초립(黃草笠)을 쓰고 홍철릭을 입은
별감(別監)과 깔때기를 쓰고 까치등거리를 걸친 의금부 나장에 대한 얘기는 넘쳐난다. 그렇지만 막상 그림
속의 상황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한 얘기뿐이다. 기껏해야 별감을 비롯한 세 사람은 술을 마시고 오른쪽의
나장과 또 한 사람은 그만 가자고 재촉하는 상황이라는 정도다. 신윤복의 그림들에 심오한 주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그림에는 소소하더라도 늘 어떤 스토리가 있다. 당시 유흥가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술집에서
술 마시는 장면이 이 그림의 전부라면 스토리가 약해도 너무 약하다. 신윤복이 후세를 위해 기록화를 남기려
했던 것이 아니라면 애써 그런 얘기를 그리려고 했을지 자체가 의문이다.
조금 다른 해석이 있기는 하다. 임금이 밀파한 감찰관이 사령을 대동하고 별감이 뇌물을 수수하는 현장을
급습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오른쪽 등을 보인 인물이 감찰관으로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신표(信標)를 보여주고
있고 의금부 나장은 뇌물수수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보는 사람마다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통상 옛 그림은 화제(畵題)가 그림 해석의 실마리가 되는데 신윤복의 그림들은 별로 그렇지가 않다.
「혜원전신첩」에 있는 그림 30점 중 화제가 있는 그림은 10점에 불과하다. 그 화제들마저도 그림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주사거배>의 화제는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항아리 끌어안고 맑은
바람을 대하다(擧盃邀皓月 抱瓮對淸風)'이다. 그림 속의 분위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인다.
뭐니 뭐니 해도 신윤복 풍속화의 핵심은 여인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도 당연히 여인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이 술집 주모의 인물이 반반했다면....... 당연히 내로라하는 술꾼들이 뻔질나게 찾아왔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예쁜 여자 있는 집에 우르르 몰려가는 술꾼들은 없다. 그림 안의 남자들은 같은 일행이 아니다. 먼저 왼쪽의 다섯
인물을 보자. 당시 유흥계의 총아라는 별감1이 털보 물주 하나를 데리고 일찌감치 찾아와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그 앞에 웬 사내가 나타났다. 중노미, 주모, 별감, 그 옆의 물주 4명의 시선이 모두 이 사내를
향해 있다. 술항아리에서 구기로 술을 떠 푼주에 옮기던 주모가 일순간 얼음이 됐고 안주를 집으려던 별감이
고개를 돌려 사내를 쳐다보는 인상이 험상궂다. “이거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하는 표정이다. 중치막의 앞
자락을 말아 올린 사내의 모습은 잔망스럽고 불량해 보인다. 어쩌면 이미 다른 곳에서 마신 술 때문에 행색이
흐트러졌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내가 주모에게 무슨 말인가를 해서 벌어진 상황이다.
이 사내는 혼자 온 손님일 수도 있지만 오른쪽 두 사람의 일행일 수도 있다. 오른쪽의 두 남자는 술집을 나가려는
게 아니고 이제 막 술집에 들어서는 중이다. 나장2의 오른발과 철릭을 입고 등을 보이는 남자의 왼발을 보면
그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가 분명하다.
나장이 등을 돌린 남자에게 안내하는 손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장이 이 손님을 이 술집에 모시고 온
것이 아닐까? 철릭을 입은 남자가 한쪽 자락을 걷어 올린 품이 전작이 있은 듯도 하다. 철릭은 무장(武將)의
공식복장이다. 어쩌면 철릭을 입은 남자는 나장의 상관인 의금부 도사(都事)3일 수도 있다. 다른 곳에서 술을
마시다 주모가 예쁜 술집이 있다는 나장의 말에 따라 나선 것인 지도 모른다. 중치막 입은 사내는 나장 일행의
물주이거나 나장이 모시고 온 손님의 수행 비서를 자처하는 주변 인물일 것이다. 먼저 술집에 들어와 주모에게
높은 분이 오셨으니 잘 모시라고 설레발을 쳤든지 주모에게 괜한 시비를 걸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별감의
비위를 뒤틀리게 한 것이다. 얼굴 방향과 왼손의 동작으로 보아 철릭을 입은 남자는 그런 중치막 입은 사내를
제지하는 듯하다. 요약하자면 당시 술집에서 행세하고 다니던 두 패가 예쁜 주모가 있는 술집에서 조우하여
자칫 시비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다. 이 또한 개인적 추측일 뿐이다.
그림에 보이는 술집은 선술집이다. 지금은 선술집이라는 단어를 거의 쓰는 일이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술집은 싸구려 술집의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선술집의 원래 의미는 서서 마시는 술집이다. 그림에도 앉아서
술 마시는 손님은 없다. 선술집은 다른 말로 목로주점이라 했다고 한다. 목로란 술잔을 벌여놓은 가로로 길고
좁은 목판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림에는 그런 목판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세태가 변하면서 선술집이 후에
목로주점 형태로 변한듯하다. 선술집에서는 안주 값을 따로 받지 않고 술값에 안주가 포함되어 있어 술 한 잔에
안주 하나가 제공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신 술잔의 수대로 술값만 계산하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림 맨 왼쪽
상투 차림의 사내가 중노미로 술집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다. 손님이 술잔을 비울 때마다 안주를 날라다 주면서
손님이 마시는 술잔도 센다.
영화와 드라마에 익숙해져서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의 술집하면 안주를 떡 벌어지게 차려놓은 술상과 그 옆에서
술을 따르는 기생이 있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훨씬 뒤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풍속도
아닌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상인들이 만들어낸 상술의 여파다. 우리 옛 그림에 어디 기생집에서 음식 잔뜩 차려놓고
술 마시는 그림이 있던가?!
홍루(紅樓)는 기생의 춤과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시는 곳이고 청루(靑樓)는 몸을 파는 기생이 있는 집이다.
그림으로 봐도 그렇다. <홍루대주> 는 기방(妓房)에서 술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양반 셋이 서먹한 표정으로 앉아서 술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그 중 두 사람은 담뱃대를 빨고 있다. 그 옆으로
발가벗은 어린애의 손을 잡은 여인이 달랑 술 한 병을 들고 문간을 넘어서고 있다. 차려진 안주도 없다.
TV나 영화에서 보던 기생집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초라하고 격조도 없다. 집도 기와집이 아닌 초가집이다.
손님들이 이 기방에 온 목적은 안주가 목적이 아니라 기생의 기예를 즐기러 온 것이다. 기방은 푸짐한 안주를
즐기며 술마시러 오는 곳이 아니라 기생의 기예(技藝)가 안주인 곳이다. 그런가 하면 청루는 여색(女色)을
탐하여 오는 손님들을 위한 장소가 틀림없는 모양이다. <청루소일(靑樓消日)>이라는 제목 자체가 기생집에서
빈둥댄다는 뜻이다. 손님은 술상도 없이 그저 기생 옆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즐기는 모습이다.
반면 앞의 <주사거배>에 등장하는 중인(中人)들은 안주 있는 술집을 찾아온 손님들이다.
거기에 주모의 미색은 덤인 셈이다.
참고 문헌 : 조선풍속사(2010, 도서출판 푸른역사), 문화원형백과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별감(別監)은 수목과 정원을 관리하는 장원서(掌苑署) 와 왕명의 전달 및 임금이 쓰는 붓과 벼루의 보관, 궁중의 자물쇠 관리 등을 담당하는 액정서(掖庭署) 소속으로 두 관청은 모두 내시부 부설 환관관청이다. 별감들은 평소에 대전, 중궁전, 세자궁 등에 배치되어 잡일을 담당하는 하례(下隷)지만 왕의 궁내외 거동 때는 어가 옆에서 시위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별감은 8품 ~ 9품의 하위직으로 정해진 녹봉이 없이 계절마다 근무 성적의 평가에 따라 녹봉을 지급받는 체아직이다. 소속처별로 2번으로 나눠 교대로 근무하게 했으며, 재직 기간 900일이 차면 한 품계를 올리되 종7품이 되면 퇴직하였다. 이들은 국왕 행차 때 그 복색이 화려함과 당당한 차림으로, 시정에서는 이들의 차림을 가장 멋있는 것으로 여겨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에는 재산이 많은 자를 뽑아 쓰도록 하였으나 선조 때에 이르러는 인원이 부족하여 양인이나 천인들에게도 자원 응모를 허락하라는 왕의 전교가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 나장(羅將)은 일명 나졸(羅卒)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병조에 속한 하급직원이다. 의금부 등 중앙의 사정(司正)·형사업무를 맡는 관서에 배속되어 고급관원의 시종과 죄인을 문초할 때 매질과 귀양 가는 죄인을 압송하는 일 등을 맡았다. 신분은 양인이지만 하는 일이 고되어 칠종천역(七種賤役)의 하나로 기피 대상이었다. 하지만 맡은 일의 특성상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의금부 나장의 정원은 시기에 따라 40명 또는 80명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 의금부에는 종6품의 참상도사(參上都事)와 종8품의 참외도사(參外都事)가 각각 5인씩 있었다. (관직명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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