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7

從心所欲 2018. 12. 3. 19:31


풍속화 중에서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림이 있다. 김후신의 <대쾌도(大快圖)>라는 그림이다.



[김후신(金厚臣) <대쾌도(大快圖)> 지본담채, 33.7×28.2㎝. 간송미술관]


김득신의 그림으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김후신의 그림이다. 김후신은 호가 이재(彛齋)라는 화가로 알려졌을

생몰년도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아버지 김희겸(金喜謙,?∼1763)이 도화서 화원이었다는 기록은 있다.

김후신도 도화서 화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가 남긴 그림도 별로 없지만 풍속화는 이 <대쾌도>가

유일하다. 아버지 김희겸의 나이로 추측컨대 김후신은 김홍도와 거의 동시대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쾌도(大快圖)> 는 술에 취해 부축을 받으며 본의 아니게 떠밀려가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에 술 취한 사내를 부축하며 내달리고 있는 세 사람의 가슴에는 세조대를 두른 게 보인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모두 양반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양반과 중인 사이에 복장의 특별한 차별은 없었지만

디테일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갓끈에 사용되는 장식의 종류에 따라, 겉옷에 술띠 또는 세조대라고 부르는

줄을 둘렀느냐 아니냐, 또 어떤 색깔로 둘렀느냐에 따라 신분의 차이가 드러났다. 현대인의 눈에 한갓 가느다란

줄로 보이는 저 띠로 인하여 양반이라는 신분의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 풍속화에서 순간의 장면을 이렇게 생동감 있게 표현한 그림은 김득신의 <야묘도추(野猫盜雛)> 말고는

이 그림이 유일하다. 가운데 갓이 벗겨져 나간 채 양 옆에서 부축을 받고 있는 인물의 얼굴 표정을 보면 그는

지금 기분이 한껏 좋은 상태다. 반면 양 옆에서 술 취한 선비를 부축하고 있는 사람들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그야말로 뭐 빠지게 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떠밀려 가는 인물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듯 혼자 희희낙락이다.




이 그림을 두고 2차를 가는 것이라는 해설도 있는데 절대 아니다. 명색이 양반들인데 체면 불구하고 이렇게

냅다 내달릴 때는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은 가운데 떠밀려 가는 인물이 사고를 치게 생겨서 일행이

서둘러 술 취한 인물을 데리고 자리를 피하는 풍경이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유곽쟁웅(游廓爭雄)>,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바로 이런 꼴이 날까봐서다. 기생집에서 시비가 붙어 싸움판이 벌어졌다. 그 결과 왼쪽, 맨 상투에 찌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인물이 봉변을 당했다. 썼던 갓이 갓모자와 양태(凉太)가 따로 떨어져나갈 정도로 낭패를

것이다. 벗었던 옷을 다시 걸쳐 입고 있는 싸움의 승자는 여유만만, 기세 등등이다. 땅에 떨어진 술띠로 보아

이 사람도 양반이다. 별감과 함께 패자를 구슬리고 있는 인물은 승자와 동행이고, 오른쪽 한편에서 망가진

갓을 추스르는 인물은 패자와 동행이다. 기생은 싸움이 벌어질 때부터 대문 앞까지 쫓아 나와 모든 광경을

지켜봤겠지만 장죽을 들고 있는 표정은 무심하기 짝이 없다.


조선시대의 기생에 대하여 정조 때 이덕무, 박제가 등과 함께 규장각 초대 검서관이었던 유득공(柳得恭, 1748

~1807)은 당시의 풍습과 세시(歲時)를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의원, 혜민서에는 의녀가 있다. 또 공조(工曹)와 상의원에는 침선비가 있다. 모두 관동 지방과 삼남(三南)

지방에서 뽑아 올린 기생들이다. 잔치가 있을 때는 이들을 불러다가 노래하고 춤추게 한다. 내의원 의녀는

검은 비단의 가리마를 머리에 쓰고 나머지는 검은 베의 가리마를 쓴다.”


내의원(內醫院)은 왕과 왕실의 의약을 담당하던 관청이고 혜민서(惠民署)는 의약과 서민 치료를 담당하던 관

청이다. 상의원(尙衣院)에서는 왕과 왕비의 의복을 만들고 공조에서도 의복을 만들었는데 침선비(針線婢)는

옷을 만드는 관비(官婢)라는 뜻이다. 이곳의 의녀와 침선비들이 모두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이라고 했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청금상련(聽琴賞蓮)>,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경국대전』에는 기생과 의녀를 3년마다 지방 고을의 관비(官婢) 중 나이 어린 자를 뽑아 올리도록 규정했다가

영조 때의『속대전』에서는 잔치가 있을 때만 뽑아 올리도록 바뀌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결원이 생기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수시로 뽑혀 올라왔다. 또한 잔치가 끝나면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야 할 기생들이 그냥

서울에 주저앉는 경우도 많았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기생들은 모든 것을 자비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서울에

머물려면 숙식을 해결할 방도가 있어야 한다. 이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던 사람이 바로 기부(妓夫)다.

조선시대의 기생들은 모두 관기(官妓)다. 국가 소유라는 의미다. 그래서 기부가 될 수 있는 자격도 제한되어

있었다. 별감, 포교(포도부장), 승정원사령, 의금부나장, 왕실 가족이나 외척 집안의 겸인(傔人, 청지기) 정도만

기부가 될 수 있었다. 대원군 때에 이르러서는 금부나장과 정원사령은 관기의 서방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만 창녀(娼女)의 서방이 되는 것만 허락하였다. 대원군이 직접 내린 명령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도 끗발로는

별감, 그 중에서도 임금의 측근에서 근무하던 대전별감의 끗발이 제일 높았을 것은 불문가지다.

기부가 ‘기생서방’이라는 의미지만 법적 남편이 아니다. 기부는 기생에게 기방을 내어주고 영업권을 갖는

존재로 실질적인 기방 운영자들이다. 위의 <유곽쟁웅> 에 별감이 등장하는 이유다. 별감은 자신이 운영하는

기방에 온 손님들의 싸움을 말리고 있는 것이다.



참고 문헌 : 조선풍속사(2010, 도서출판 푸른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겨레음악대사전(2012. 도서출판 보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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