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5

從心所欲 2018. 11. 26. 10:27

영조 24년인 1748년. 숙종의 어진을 다시 제작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길 것인가를 두고 영조와 어진제작에 참여하는 신하들과 논의하는 중에 다시 조영석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세조어진 제작에 참여를 거부한 이후 조영석이 비록 친구가 부채 하나 그려달라고 해도 거절한다는 말을 듣고 영조는 “이번에도 어렵겠구나!”라고 했지만 어쨌든 조영석을 다시 불렀다. 이에 조영석이 또 다시 거부했다는 설도 있고, 이때는 조영석이 감동관(監董官)으로 참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왕이 이처럼 어진을 그리는 화가에까지 관심을 갖는 이유는 선왕(先王)의 어진을 제작한다는 것은 자손으로써 조상을 추모하는 효(孝)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개인적 일이기기도 하지만, 제작된 어진을 진전(眞殿)에 봉안하여 조종(祖宗)이 오래도록 번창하기를 꾀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어 국가적으로도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어진 제작은 한 사람의 화가에게 맡겨두는 일도 아니고 도화서 화원들이 전담하는 것도 아니다. 어진 제작을 담당하는 관리만도 10여명이 넘는 어진도사(御眞圖寫) 또는 모사(模寫) 도감(都監)이라는 임시 관서가 설치되고 여기서 6명에서 많게는 13명에까지 화원을 선발한다. 선발된 화원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 주관화사(主管畵師)는 용안을 담당하고, 동참(同參)화원은 얼굴과 몸의 덜 중요한 부위를 담당하며 수종(隨從)화원은 주로 채색을 맡는다. 감동은 이들 화가들이 그리는 어진을 지도하고 감독하면서 때로는 불가피하게 직접 뭇을 잡게 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 어진 모사1, 1936년]

 

조영석이 졸(卒)하는 1761년 이전의 10 여년 사이에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꼽히는 화가들이 연이어 태어난다. 김홍도가 1745년, 김득신이 1754년, 신윤복이 1758년에 태어났다. 세 사람은 모두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는 7, 8세부터 강세황의 집을 드나들며 그림을 배우다 나중에 강세황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갔다. 반면에 김득신과 신윤복은 집안이 화원 가문으로 김득신은 큰 아버지인 김응환이, 신윤복은 아버지 신한평이 각각 도화서 화원이었다. 김홍도는 3번이나 어진 제작에 동참화사로 참여한 기록이 있고, 김득신도 1791년 정조어진도사에 수종화사로 참여한 기록이 있으나 신윤복은 어진 제작은 물론이고 도화서 화원으로서 눈에 띄는 기록이 없다. 신윤복의 행실이 문란하여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말이 있지만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며, 그의 다른 행적에 대해서도 기록이 거의 없는 편이다.

오세창(吳世昌)이 편찬한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이라 할 수 있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는「화사약보」라는 책을 인용하여 신윤복과 아버지 신한평이 모두 첨사 벼슬을 했다고 하였다. 첨사는 종3품 무반(武班)직이다.

하지만 도화서는 종6품의 아문(衙門)2으로 화원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가 종6품이다. 정조가 아꼈던 김홍도도 종6품의 현감을 지낸 것이 가장 높은 벼슬이었다. 그것도 김홍도가 3번이나 어진 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신한평과 신윤복이 지냈다는 첨사 벼슬은 무반 종3품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권관(權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773년 영조의 칠순 어진 화사 때 신한평이 수종화원으로 참여했는데 어진 도사(圖寫)가 끝난 뒤 포상으로 영조는 신한평을 동반이나 변장 중 자리가 나면 쓰도록 하라는 교시를 내린 일이 있다. 변장(邊將)은 변방의 일정한 지역에서 국경 수비를 맡는 무관직으로 종3품의 첨사(僉使), 종4품인 만호(萬戶), 종9품인 권관(權管)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화원은 원래 품계가 없는 잡직(雜織)이기 때문에 영조가 말한 변장은 종9품인 권관을 말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당시에는 권관까지도 모두 첨사로 부르는 것이 풍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신윤복도 혹시 품계를 받았다면 종9품의 권관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흔히 김홍도하면 풍속화를 떠올리지만 김홍도를 풍속화가로만 보는 것은 김홍도를 모독하는 일이다. 김홍도는

산수화는 물론 새, 동물, 인물은 물론 불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그림을 잘 그렸다. 김홍도는 ‘풍속화까지

뛰어나게 잘 그린’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였다.

 

[김홍도 병진년화첩 中 <옥순봉도>, 1796년, 26.7 x 31.6cm, 삼성미술관 리움]

 

[김홍도 <송하맹호도> 견본담채 90.3 x 43.8cm 삼성미술관 리움]

 

[<송하맹호도> 세부]

 

「김홍도필병진년화첩(金弘道筆丙辰年畵帖)」은 1796년(정조 20)에 김홍도가 그린 산수(山水)와 화조(花鳥)

그림 20폭으로 이루어진 화첩이다. <옥순봉도(玉筍峯圖)>는 그 화첩의 첫 번째 그림으로 김홍도의 산수화를

대표하는 명작 중의 하나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는 고 오주석이 세계최고의 호랑이 그림이라며

초국보급 그림이라고 극찬한 그림이다. 뛰어난 구도와 함께 바늘 같이 가는 선을 수천수만 번을 그려 나타낸

호랑이 털의 세밀한 묘사와 그렇게 완성된 늠름하면서도 유연한 호랑이의 자태는 보면 볼수록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김홍도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 모시에 담채, 20.8 x 28.7cm, 간송미술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畫)인 <염불서승도>는 구름 위에 피어난 연꽃 위에 결가부좌한 선승이 염불하고 앉은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격조를 느끼게 하는 명작이다. 후광으로 둘러싸인 노승의 뒷모습은 흰 구름을 타고 고요히 승천하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

 

[김홍도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契圖)>, 견본 담채, 147.2 x 63.3㎝ 1804년, 개인]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契圖)>는 계회도(契會圖)로 일종의 기록화다. 계회도라는 말이 어려워 보이지만 계(契)모임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모임이 있으면 사진을 찍듯이 예전에는 화가를 불러 그림으로 남겼다. 이 그림은 1804년 개성의 유지 64명이 잔치를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 위쪽에 가득한 글씨는 이 잔치를 열게 된 내력을 적은 것이다. 개성 유지 가운데 한 사람이 집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그림을 펼쳐보니까 200년 전 조상들이 만월대에서 잔치하고 술 마시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탓에 퇴색해서 그림이 어두운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옛 조상들이 이렇게 모여서 화목을 도모하고 즐겁게 보냈는데 우리는 이백년 동안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잔치를 재현하는 뜻으로 개성 유지 64명을 불러 잔치를 열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상들이 잔치했던 왕건의 옛 궁궐터인 만월대에 차일을 치고, 병풍을 두르고, 자리를 깐 것이다. 그리고는 김홍도를 불렀다. 그림 위에 잔치 내력을 쓴 인물은 몇 년 뒤 경기도 암행어사를 지낸 행서 명필 홍의영이고 ‘耆老世聯契圖’라는 글씨는 당대 예서의 대가 유한지가 썼다. 잔치 비용 말고도 그림을 남기는데 이런 공을 들이는 비용도 상당하였을 터이니 당시 개성상인들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기로(耆老)는 육십을 기(耆), 칠십을 노(老)라고 하여 육십세 이상의 노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기로소(耆老所)라는 관서가 있었는데 원칙적으로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의 전직, 현직 문관으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70세 이상인지 아니면 60세 이상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거나 요즘으로 치면 노인잔치다.

 

지금 우리가 보는 책은 책장을 왼쪽으로 넘기며 시선이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옮겨지게 되어 있다.

이는 서양의 가로쓰기가 미친 영향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보던 책은 책장을 오른쪽으로 넘기게 되어있었다.

오른쪽 상단에서부터 세로로 내려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선은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옮겨가게

마련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그런 시선의 흐름에 익숙해 있었다. 따라서 옛 그림도 그런 시선에 맞춰 그려졌다.

우리가 옛 그림을 볼 때 늘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훑어가듯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 그림에도

그런 특성이 잘 나타나있다. 그림의 배경인 송악산 자락을 따라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시선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잔치마당 중앙에 이른다. 가운데 놓인 탁자의 유독 튀는 빨간색이 시선을

그곳으로 잡아끌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잔치마당 한가운데서 다시 사방으로 좌중을 둘러보게 되는 것이다.

 

 

주칠(朱漆)을 한 빨간 탁자 위에는 백자 항아리에 꽃이 꽂혀있다. 하지만 이 꽃은 생화가 아니다. 종이로 만든

지화(紙花)이다. 우리 조상들은 산 꽃을 잘라 꽃꽂이하는 대신 궁중 잔치에서 조차 전부 종이꽃을 만들어

썼다. 그 옆의 갓을 쓴 사람은 술동이에서 작은 술병으로 술을 옮겨 담는 중이다. 마당 앞 쪽에는 김홍도의

<무동> 또는 <삼현육각>이라는 그림에서 보았던 무동(舞童) 둘이 춤을 추고 있다. 악사들은 그림 아래쪽

계단 위에 일렬로 앉아있다. 그림 원본에서도 인물들은 손가락마디만한 크기다. 그런데 뒤돌아 앉아 있는

악사들이 무슨 악기를 연주하는지 다 짐작이 가능하다. 맨 왼쪽부터 대금, 해금, 피리 둘, 그리고 장구와

북이다. 김홍도는 그런 인물들을 260명이 넘게 이 그림에 그려 넣었다. 그러면서 그림 안에 또 다른 작은

풍속화들을 남겨 놓았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독상을 받고 앉았다. 옛날에는 겸상을 하는 것을 천하게 여겼다 한다. 그러니 이 잔치는 격이 있는 자리인 것이다. 중간 중간에 하얀 수염을 한 인물들이 보인다. 점잖은 자리라 음식 시중도 남자 아이들인 동자(童子)가 맡고 있다. 여인네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음식 나르는 것은 여인네 차지다.

 

 

여인네들이 부엌에서 음식을 광주리에 담아 마당에 내다 놓으면 그 음식을 손님들에게 직접 올리는 것은 동자들

몫이다. 여인네 뒤에서 남자가 큰 그릇을 두 손으로 받치고 나서는데 아마도 국물이 있는 음식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오른쪽에 짚과 싸리나무로 만든 임시건물이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는 곳이다.

이런 큰 잔치에 거지가 없을 리가 없다. 벙거지를 쓴 두 명의 거지가 부엌 앞에서 동냥을 한다. 그러자 한 남자가

손바닥을 펴서 막는 시늉을 한다. 지금은 안 되니 나중에 오라든지 아까도 왔다 갔는데 자꾸 오면 어떻게 하냐는

소리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잔치를 주관하는 어느 유지 집안의 청지기라 불리는

겸인(傔人)으로, 부엌에서 음식 내는 일을 감독하는 임무를 받았을 것이다. 김홍도는 이 작은 인물을 그리는데도

옷 입은 품새를 다른 양반들에 비하여 어딘가 격이 떨어지게 그려 놓았다.

 

 

잔치마당의 반대쪽이다. 큰 잔치가 벌어졌다고 해서 구경나온 사람들과 집안 어르신을 모시고 온 아들,

손자들로 잔치마당을 둘러놓은 병풍뒤가 북적거린다. 그런 사람들을 바라고 나이 먹은 여인이 잔 술을 팔러

나왔다. 그 술을 한잔 두잔 마시다 보니 취기가 오르고 들려오는 풍악소리에 신명이 난다.

 

 

두 남자가 어울려 춤을 춘다. 예전에는 남자들도 풍류로 춤을 추었다. 어렵사리 스텝을 배워 추는 춤이 아니고

장단에 맞춰 흥이 나는 대로 어깨 짓과 발짓으로 추는 춤이다. 잔칫상을 받은 노인이 뒤쪽의 떠들썩한 분위기에

무슨 일인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김홍도는 이렇게 뭐 하나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술자리에서 자제가 안 되는 사람은 늘 있는 모양이다. 흥에 겨워 술을 마시다 보면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림 아래쪽에 갓을 쓴 인물 하나가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있다. 시중드는 동자와 옆에 서있는 동반자가

걱정스러운 몸짓을 하고 있다. 이 양반도 잔치 구경 나왔다 과음을 한 것이 틀림없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온

또 다른 거지가 부엌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지금도 큰 행사가 있으면 건물 밖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승용차 행렬이 즐비하다. 예전이라고 다를까?! 여기도 패랭이를 쓴 마부들이 빈 말과 노새의 고삐를 잡고 주인이 언제 나올까 기다리는 모습이다.

 

 

그림 하단에 빽빽하게 씌여진 글씨는 참석한 64인의 이름과 본관을 적은 것이다. 그런데 분명 참석 인물이

64인이라고 했는데 그림에 그려진 잔치 참석자는 1명이 더 많은 65인이라고 한다. 오주석은 그 한 명이

김홍도가 자신을 슬쩍 끼어 넣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이 그림을 그린 그 해 김홍도의 나이는 60세였다.

 

참고 문헌 : 한국의 미 특강(오주석, 2005, 솔출판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풍속사

(2010, 도서출판 푸른역사), 문화원형백과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1. 사진 속 화가는 김은호로 도화서 화원은 아니었다. 김은호는 일본에서 그림을 배워 그림에 왜색이 짙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인물이라고 공개되었다. [본문으로]
  2. 종6품 아문은 실직(實職)에 있는 관리의 가장 높은 품계가 종6품인 관청이라는 의미다. 물론 제조(提調)라고 하는 더 높은 품계의 관리가 정직(正職)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이 제조 직위는 다른 직을 맡은 관리가 겸직으로 임명되는 자리다. 예를 들어 정조 때에는 예조판서가 도화서의 제조를 겸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화원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는 종6품의 별제(別提)라는 자리다. 그러나 화원은 재주가 비록 뛰어나더라도 그 자리에 가능한 한 앉히지 않고 사대부 가운데서 그림에 밝아 화격(畵格)을 잘 아는 사람을 선택하여 그 직무를 맡도록 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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