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의 「사제첩(麝臍帖)」에 있는 그림들은 기존에 있던 그림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종이의 재질이나
크기가 각각 다르고 초고(草稿), 그리다 만 것, 완성작 등이 뒤섞여 있다. 또 뛰어난 수작이 있는가하면
수준이 떨어지는 그림들도 있다. 그림의 종류로는 영모화(翎毛畵)와 초충도(草蟲圖)도 있으나 풍속화 쪽에
속하는 그림들이 가장 많다. 바느질, 새참, 목기 깎기, 마구간의 작두질, 여물 끓이는 마동, 마구간, 소,
젖을 빠는 송아지, 소젖 짜기 등의 이름이 붙은 그림들이다.
<점심>이라고도 불리는 김홍도의 <새참>그림은 어딘가 왁자지껄한 분위기인데 비하여 조영석의 그림은
조용하고 잔잔하다. 조영석이 서민의 삶을 옮기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김홍도는 거기에 살을 붙여 그림을
한층 풍성하고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조영석의 그림에는 낙관이 없다. 미완성의 그림일 수도 있으나
김홍도의 그림처럼 배경이 생략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림의 구도는 조영석의 것은 일직선으로
단순한데 비하여 김홍도의 그림은 훨씬 복잡하다. 그런데 실제 새참을 먹는 자리 배치는 조영석의 그림이
더 사실에 가깝다. 새참이든 점심이든 논이나 밭에서 먹는 음식은 따로 마련된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꾼들이 힘든 걸음을 안 하게 하고 오가는 시간도 절약할 겸 일하던 곳의 가까운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
먹는다. 그래서 새참을 들밥이라고도 한다. 한 치 땅도 아까운 논밭의 논두렁이나 밭두렁이 넓을 리가 없다.
서로 비껴가며 겨우 마주 앉을만한 넓이만 되면 그곳이 새참 장소가 되는 것이다. 조영석의 그림은 바로
그런 장면을 그린 것이다. 조영석의 그림에 농부들 사이에 난데없이 갓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아마도 마름일
것이다. 마름이란 지주로부터 소작지의 관리를 위임받은 사람이다. 작황을 조사하여 소작료를 받아 전달하는
것이 주 임무이지만 소작권의 박탈, 작황, 소작인의 평가 등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가운데와 오른쪽에 푸른색 치마를 입은 아낙들 앞에는 소쿠리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소쿠리나 광주리에 음식을 담아 머리에 이고 날랐다. 소쿠리는 대나무의 겉피나 속피로 만들고 광주리는
대개 싸리채로 만드는데, 바닥이 평평한 광주리가 농촌의 일반적인 운반도구였다.
이제는 대부분의 농촌 일은 기계가 대신하는 덕분에 사람들이 모여 새참 먹는 모습은 보기가 힘들다. 요즘은
논밭에서 다방 커피를 배달시켜먹는 광경이 더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논밭 한가운데 세워진
배달용 스쿠터와 농기계, 등산복 차림으로 커피를 마시는 농부, 그 옆에 짙은 화장의 여인이 등장하는 그림을
남긴다면, 후세 사람들은 지금의 풍속을 어떻게 무어라 짐작해낼지 궁금하다.
여자 셋이 재봉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맨 왼쪽 여자는 바느질을, 중간 여자는 무언가를 접고 있고, 오른쪽
여자는 가위로 천을 자르고 있다. 원래 이 그림은 모두 70여점의 시리즈로 되어있던 것으로 거기에 이덕무의
친구인 허필, 유득공, 이진 등이 평을 달았다고 한다. 지금 전하는 것은 이 한 장뿐인데 이 그림에 대한
허필의 평은 이렇다.
한 계집 가위질하고
한 계집 주머니 접고
한 계집 치마 기워
세 계집 모여 간(姦)자가 되니,
사기 접시를 엎을 만하네1.
허필(許佖, 1709 ~ 1761)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서화가로 문장, 서예, 그림에 모두 뛰어났고 문학과 고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의 평치고는 실없기가 짝이 없어 보인다. 요즘이라면 큰
벝통을 건드리는 꼴의 글이다.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은 조영석으로부터 약 150여년 뒤의 인물이다. 그는 19세기 말 부산(기장),·
원산, 제물포 등의 개항장에서 풍속화를 그려 주로 서양인들에게 판매했다. 그래서 그가 그린 풍속화는
우리나라보다는 해외에 더 많이 남아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러시아,
미국, 캐나다, 일본 등 전 세계 20여 곳의 박물관에 무려 1000점 이상의 그림들이 전해진다.
김준근의 〈옷감 다루기〉는 여인들이 옷 만드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이다. 옷감을 다듬이질하고, 숯불을
담은 다리미로 옷감을 다리고, 또 한쪽에서는 가위로 옷감을 마름질하고 바느질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일상생활 장면이지만 지금은 보기 힘든 장면들이다. 표정 없는 얼굴, 행위나 물건에 집중되는
구도 등에서 인물 자체보다는 행위나 사물에 중점을 두고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김준근의 그림은 풍속을
아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림의 수준은 높은 편이 아니다. 게다가 다작을 위해서 다른 화가들을 거느리고
공동 제작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 풍속화에 우유 짜는 그림이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게다가 농부가 아닌 갓을 쓴 점잖은
복장으로 소와 송아지를 데리고 씨름하는 모습이 여간 의아하지가 않다. 여러 문헌들에 의하면 대략 4세기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우유를 마셨던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물론 궁중에서 보양식으로 취급될 정도로 귀한
음식이라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젖소가 아닌 새끼를 낳은 어미 소의 젖을 짜서
진상하였는데, 매우 귀하여 임금과 같은 특수 계층만이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타락색(駝酪色)이라는
이름의 우유를 관리하는 관청도 있었고, 지금의 동대문 밖에 낙산(酪山) 목장이 있어 왕실에 우유 보급을
책임졌다고 한다. 쌀을 물에 불려 맷돌에 갈아서 절반쯤 끓이다가 우유를 섞어서 쑨 죽을 타락죽(駝酪粥)2이라
하는데 내의원에서 10월 초하루부터 정월에 이르기까지 임금에게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면 왜 그림에서 농부가 아니라 갓 쓴 사람들이 우유를 짜고 있는지 대강 짐작은 간다.
저들은 양반은 아니더라도 내의원이든 타락색이든 관청의 잡직 관리들로 비록 중인이지만 엄연한 벼슬아치였기
때문에 갓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왼쪽 구석에는 한 사람이 송아지를 붙들고 있다. 젖 먹던 송아지를 억지로
떼어놓은 것일까? 암소의 젖은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니고 송아지가 보여야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어미 소에게
그 새끼를 보여주어야 젖을 짤 수 있다고 한다.
그림의 소재, 기구, 인물의 배치 등이 윤두서의 <선차도(旋車圖)>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윤두서의 그림에
비하면 훨씬 자연스러운 느낌이 난다. 인물의 형상에서 윤두서의 작품에 남아 있던 중국풍 대신 조선사람이
등장하며, 옅은 갈색으로 햇볕에 그을린 살빛을 표현한 것이며 윗도리를 벗어 나무에 걸쳐놓은 것까지
그림에서 한층 더 서민의 체취가 느껴진다. 두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은 갈이틀 또는 갈이질로 불리는 작업으로
요즘으로 치면 목선반에 해당한다. 왼쪽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은 갈이틀에 걸린 나무를 깎는 ‘칼’이란 도구이다.
목공을 하는 사람의 해석에 의하면 윤두서의 그림에서 보다는 작업 방식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윤두서의
그림에서는 갈이틀 축 고정 기둥이 땅에 박혀있는 구조였는데 이 그림에서는 갈이틀이 받침대 위에 놓여 있어
전문 갈이틀의 모양새를 갖췄다는 것이다. 다만 윤두서의 그림에서는 발로 동력을 만드는데 여기서는 팔 힘에만
의존하게 되어 있어 힘이 딸릴듯하다는 해설이다. 어쩌면 이 갈이틀은 소형 목기를 만드는 용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편자는 말이 달릴 때 지면으로부터 말굽에 전해지는 충격을 완화해 주기 위해 말굽에 덧대는 도구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359권「앙엽기」에는 편자박기에 대한 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의 네다리를 묶어 하늘을 보게 눕히고 칼로 발굽의 바닥을 깎아낸 뒤 못을 박고, 중국에서는 말을
세워두고 고르지 않은 발굽을 끌로 깎아낸 뒤에 말굽을 들어 무릎에 얹고 못을 박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의 네다리를 묶어 편자를 박는 모습은 김홍도의 <편자박기>란 그림에도 똑같이 나온다.
편자는 일명 ‘대갈’이라고도 한다. 그 뜻은 칡을 대신한다는 뜻인데 편자가 없던 시절에는 말굽에 칡을
감아 쓰다가 편자를 박기 시작하면서 ‘칡 대신에’ 쓴다는 뜻으로 ‘대갈(代葛)’이라 하였다 한다. 그래서
편자를 박을 때 쓰는 망치를 대갈마치라고 부른다.
고개를 돌리고 입을 벌리고 있는 말의 모습이 여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인물의 표정도 진지한데 얼핏 말이 날뛰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기도 한 모습이다. 벙거지를 쓴 남자가 말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듯 나뭇가지를 흔들며 말을 달랜다. 그림은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여 그림의
정황을 한눈에 들어오도록 구성하였다. 앙상한 가지를 드리운 나무와 말의 묘사에서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한
명암법을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벙거지는 일을 할 때 쓰던 평민의 모자로, 자리나 종이로 만들어진다.
그림 위편과 오른쪽에 조영석이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던 소회를 적은 글이 있다. 위쪽에 있는 글은 “말은
발굽으로 서리나 눈을 밟으며,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발로 뛰어 다닌다. 이것이 말의 진짜 본성[眞性〕이다.
그런데 백락은 “나는 말을 잘 다룬다”고 하면서 털을 자르며 굽을 깎아 버리니 말 열 마리 중 두 세 마리는
죽는다. 능원노인”이라고 쓰여 있다. 그 아래에는 “물체를 잘 그리려면 남이 그린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살아 움직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고 적었다.
참고 문헌 : 세계미술용어사전(1999, 월간미술), 조선풍속사(2010, 도서출판 푸른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그림(박은순, 2008.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문화원형백과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 이덕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 52 ‘이목구심서(耳目口心誓)’ [본문으로]
- 타락(駝酪)이라는 이름은 돌궐어(突厥語)의 ‘토라크’에서 나온 말로 말린 우유를 뜻한다. 조선조에서는 우유 제품을 통틀어 타락이라 불렀다.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본문으로]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는 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 ~ 1793)의 저술 총서로 총 33책 71권이다. 권48∼53에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권54∼61에 앙엽기가 실려있다. ‘이목구심서’는 글자 그대로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한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것이다. 반면 ‘앙엽기’는 일종의 소논문집, 자료집 또는 소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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