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8

從心所欲 2018. 12. 6. 15:10

 

 

기방(妓房)은 조선 전기에는 없었다. 기방들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방이 발달한 것은 조선

후기, 특히 정조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방 갈 때 매번 하인에게 볏가마니 등짐지고 따르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우선 화폐의 유통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통상 엽전(葉錢)이라고 불리는 상평통보(常平通寶)는 인조때

처음 발행됐으나 결과가 나빠 유통을 중지했다. 그러다 숙종 때인 1678년 다시 발행을 시작했다.

현대에도 신용카드가 정착하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듯이 상평통보가 사회 전반에 걸쳐 화폐로 두루 통용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영조 때에 이르면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졌겠지만 한편으로 다른 변수가

발생했다. 재위기간이 무려 51년 7개월이나 되었던 영조는 재위기간 중 근 50년 동안 금주령을 유지했다.

영조 자신도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물론, 종묘에서 제를 올릴 때에도 신하들의 연이은 간청을 물리치고 기어코

술 대신 감주를 쓰도록 할 만큼 금주령 시행에 힘썼다. 물론 금주령 속에서도 법망을 피해가는 경우야 얼마든지

있었겠지만 대놓고 기방에 드나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 때에 이르면 좌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 1720 ~ 1799)이 정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록 수십 년 전의 일을 말하더라도, 매주가(賣酒家)의 술안주는 김치와 자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백성의 습속이 점차 교묘해지면서, 신기한 술 이름을 내기에 힘써 현방(懸房)1의 쇠고기나 시전(市廛)

 생선을 따질 것도 없이 태반이 술안주로 돌아갑니다. 진수성찬과 맛있는 탕[묘탕(妙湯)]이 술단지 사이에

어지러이 널려 있으니, 시정의 연소한 사람들이 그리 술을 좋아하지 않아도 오로지 안주를 탐하느라, 삼삼오오

어울려 술을 사서 마십니다. 이 때문에 빚을 지고 신세를 망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시전의 찬물(饌物)

값이 날이 갈수록 뛰어오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술집 풍속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내용으로 미루어 정조 때에는 술 마시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분위기임을 알 수 있다. 정조 14년인 1790년 대사간이 “온 나라가 미친 듯이 오로지 술 마시는 것만 일삼고 있다”며 술에 대한 규제 필요성을 건의했지만 정조는 따르지 않았다.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있는 그림들이 언제 그려졌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그의 연령으로 미루어 1800년 전후로 보고 있다. 신윤복은 영조 이후 불과 수십 년 만에 놀랍도록 바뀐 그때의 세속 풍경을 그림에 담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기방에는 어떤 사람들이 드나들었을까?

지금은 창(唱)으로는 전승되지 않지만 예전 판소리 열두 마당에는 일명 ‘무숙이타령’이라는 ‘왈자타령’이 있었다 한다. 이 왈자타령의 사설(辭說)을 19세기경에 소설로 만든 「게우사」라는 국문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는 당시 서울 시정풍속과 함께 판소리, 민속극, 음악 등 연행예술에 대한 정보가 많이 담겨져 있는데, 소설 대목에 기방(妓房)에 출입하는 왈짜들의 명단이 등장한다. 당하 천총, 내금위장, 도총경력(都摠經歷), 비변랑, 영문 교련관, 중방, 각사 서리, 역관, 포도청 군관, 대전별감, 금부나장, 정원사령, 무예별감, 시전 상인, 남촌 한량 등이다. 무반(武班) 양반부터 중인(中人)계층인 잡직 관리와 상인, 한량들에다 앞에 본 기부(妓夫)들의 명단도 나온다. 기부들은 기방의 운영자이자 동시에 고객이기도 했다.

이들 기방의 고객들은 오입쟁이로 불렸고 기방은 이들 오입쟁이들이 지배했다. 기생과 기부가 잘못을 하면 오입쟁이들이 그들을 응징하는 권한이 있었고 그 응징 방식도 아주 처절했다 한다. 조선시대에 기방에 기생이 여러 명 몰려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기방에는 한 명 내지는 많아야 두셋의 기생 밖에 없었기에 기방을 찾는 손님들은 다른 손님들과 합석을 해야 했다. 그런 만큼 기방을 출입하는 데는 까다로운 격식이 있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출간한 「주해 악부(註解 樂府)」라는 책에는 ‘외입장이 격식 (外入匠 格式)’이라는 내용이 있다. 강명관의 「조선풍속사」에서는 이를 인용하여 처음 찾는 기생집에 들어가는 격식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처음 온 손님(밖에서) : “들어가자.”

먼저 온 손님(안에서) : “두루....”

처음 온 손님 : “평안호?”

먼저 온 손님 : “평안호?”

처음 온 손님(기생에게) : “무사한가?”

기생 : “평안합시오?”

 

“두루...”는 들어오라는 뜻이고 “평안호(平安乎)?”는 “평안하신가?”란 뜻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경우다. 처음 온 손님이라도 힘깨나 쓰고 행세를 하는 측이라면 기방에 들어서면서 “평안호”를 연발한 뒤 먼저 온 손님들에게 “좀, 쬡시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앉을 자리를 내놓으라는 식으로 기세 싸움을 건다. 이때 먼저 온 손님 중에 기세가 꺾인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뜬다. 그렇지만 먼저 온 손님의 반격도 있다.

 

“게가 여기를 어딘 줄 알고 들어왔소?”

“기생의 집으로 알고 들어왔소.‘

“게 같은 오입쟁이는 처음 보았으니 나가오.”

 

이때 나중에 온 손님이 기세가 꺾인 경우에는 “내 보아하니, 오입 연조가 나보다 높은가 보오.” 하고 나간다. 하지만 역으로 “너 같은 오입쟁이는 보지 못했다.”고 반격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이 되면 어느 쪽에서든 상대방 갓의 갓모자를 담뱃대로 치고 주먹을 날린다. 앞의 <유곽쟁웅> 그림에서 갓모자와 양태가 떨어져 나간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방 분위기가 이런지라 동반(東班), 즉 문관 양반들은 기방을 찾지 않았다 한다. 그 대신 그들은 기생을 불렀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상춘야흥(賞春野興)>, 지본채색, 간송미술관]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쌍검대무(雙劍對舞)>, 지본채색, 간송미술관]

 

[신윤복「혜원전신첩」中 <납량만흥(納凉漫興)>, 지본채색, 간송미술관]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쌍륙삼매(雙六三昧)>, 지본채색, 간송미술관]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임하투호(林下投壺)>, 지본채색, 간송미술관]

 

기생을 방안으로 은밀히 부른게 아니라 이렇게 탁 트인 야외 공간으로 불렀다. 그렇다고 진짜 야외로 나간 것이

아니라 집안의 정원 한 구석이다. 그곳에서 양반들은 기생과 함께 음막을 즐겼다. 기생이 부르는 노래를 듣기도

하고 춤을 구경하고 흥이 더하면 일어나 춤도 추었다. 쌍육을 두기도 하고 투호놀이도 했다. 어디에도 질펀한

술판 같은 것은 없다. <상춘야흥>에 여인네가 들고 오는 술상을 봐도 소반위에 술병과 술잔뿐으로 조촐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모두가 풍류만 즐기고 끝난 것은 아니었나 보다. <주유청강>을 보면 남자들이 기생들에게

작업을 걸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하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주유청강(舟遊淸江)>, 지본채색, 간송미술관]

 

실제로 더 노골적인 장면도 있다. <청금상련> 왼쪽에 사방건까지 벗어 제낀 맨 상투의 양반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청금상련(聽琴賞蓮)>, 지본채색, 간송미술관]

 

신윤복의 춘화(春畵)집으로 전해지는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에 있는 그림과 자세가 매우 유사하다. 춘화에는 남자가 바지를 벗었지만 <청금상련>에서는 거기까지는 아니다. 말 그대로 수작(手作)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일까? 기생의 얼굴 표정이 왠지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다.

 

[傳 신윤복 「건곤일화첩」 中]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김홍도의 춘화첩으로 전해지는 『운우도첩(雲雨圖帖』에도 이와 비슷한 그림이 있다.

 

[전(傳) 김홍도 『운우도첩(雲雨圖帖)』中, 지본담채, 28 x 38.5cm]

 

두 화첩 모두, 혜원과 단원의 작품이라 단언하지 못하기 때문에 앞에 전(傳)이라는 글자를 넣고 있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혜원이 단원의 그림을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건곤일회첩』은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만난다’는 뜻으로 음과 양의 만남을 상징한다. 그림 12폭에 혜원 신윤복의 낙관이 있다. 『운우도첩』의 운우(雲雨)는 구름과 비라는 뜻이지만 남녀사이의 육체적 관계인 성희(性戱)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림 10점에 김홍도의 도인이 찍혀 있고 운보 김기창(1913 ~ 2001)의 배관(拜觀)이 적혀 있다.

 

보동 고관대작의 집에 드나드는 기생들은 1패라 하고 기방의 기생들은 2패라 했다 한다. 그들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음악을 하는 수준의 차이였다고 한다. 영조 때 함경도 관찰사, 도승지, 이조판서를 거쳐 정2품으로 성균관(成均館)의 최고위직인 지성균관사와 대제학을 겸했던 삼주(三洲) 이정보(李鼎輔, 1693 ~ 1766) 같은 인물은 휘하에 기생들을 데리고 있기도 했다. 기부(妓夫) 역할을 하거나 남녀 간의 일로 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가르치는 제자로 거두었던 것이다2. 이정보는 음악에 조예가 깊어 악보와 새로운 가사를 많이 지었으며, 수많은 남녀 명창들을 배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쌍륙삼매>의 화제는 ‘기러기 ( ? ) 소리 역력한데 인적은 고요하고 물시계소리만 아득하다(雁(?)聲歷歷人靜漏迢迢)’ 이다. 두 번째 한자는 일반적으로 ’橫‘자로 보고 ’비껴나는‘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아무리 봐도 ’橫‘자 같지는 않다.

<임하투호>의 화제는 ‘조랑말이 조화를 부려 가는 털에 들어가니 예쁘든 추하든 슬퍼할 수 없다(款驅造化入纖毫 任是姸媸不可悲)’, <주유청강>은 ‘젓대 소리 늦바람으로 들을 수 없고 백구만 물결 좇아 날아든다(一笛晩風聽不得 白鷗飛下浪花前)’, <청금상련>은 자리에는 손님이 가득한데 술 안에는 술이 비지 않았다(座上客常滿 酒中酒不空)‘ 이다. <청금상련>의 酒中酒不空의 앞 ’酒‘자는 술통 준(樽)자를 잘못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거나 모든 화제가 그림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혜원이 아주 높은 수준의 은유를 글로 표현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깊은 뜻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윤복은 세조 때의 유명한 인물인 신숙주(申叔舟, 1417 ~ 1475)의 아우인 신말주의 11대 방계손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신윤복의 7대 선조부 때부터 잡과로 진출하더니 그 후로는 집안 대대로 의과, 역과, 율과 등의 잡과로 진출한다. 즉 집안이 중인 가문이 되었다는 의미다. 신윤복이 그림 공부에 비하여 글공부는 부족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참고 문헌 : 조선풍속사(2010, 도서출판 푸른역사), 한국민속예술사전(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속문학사전(국립민속박물관)

 

  1. 현방(懸房) : 조선시대 성균관 노비들이 경영하던 쇠고기 판매점 [본문으로]
  2. 심노숭(1762 ~ 1837)은 시문집인 ‘효전산고’의 ‘계섬전’에 이렇게 기술했다. “이정보는 문하의 명창들 가운데 계섬을 가장 사랑해서 늘 곁에 두었다. 이정보는 계섬의 재능을 기특하게 여긴 것이지, 사사롭게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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