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0

從心所欲 2018. 12. 12. 14:01

 

[김홍도「사계풍속도병」中 <후원유연(後苑遊宴)>]

 

 

[원광대 모사본  <후원유연(後苑遊宴)>]

 

 

<후원유연(後苑遊宴)>은 아마도 우리 옛 그림 가운데 가장 귀족적인 분위기의 그림이 아닐까 싶다. 학과

연못이 있고 취병(翠屛)으로 둘러싸인 정원과 그 안에 기생들을 불러 앉혀놓고 대금과 거문고 연주를

감상하는지 팔걸이에 기대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인물의 거만하고 방자한 모습까지 집주인의 위세가

어떠한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가슴에 두른 세조대(細條帶)의 붉은 색이 선명하니 벼슬은 당상관이다.

당상관(堂上官)은 정3품 상계(上階)이상의 품계를 가진 벼슬아치다. 거기다 집안에 연못을 파고 학을 기르고

취병까지 설치할 정도면 재물도 꽤 많은 모양이다.

 

집주인과 기생들이 앉아있는 바깥을 두르고 있는 나무 담장이 취병(翠屛)이다. 비췻빛 병풍 이란 뜻의 취병은

살아 있는 식물로 조성한 생나무 울타리다. 대나무를 엮어 울타리 틀을 만든 후 그 안에 작은 나무와 넝쿨식물을

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방안에서 바람을 막거나 장식하는 용도로 병풍을 두르듯이, 마당의

사생활을 보호하면서 조경의 용도로 조성하였다. 취병은 살아 있는 초목을 향유하게 도와주는 예술적 성격도

띠었는데 취병을 통해 꽃과 나무를 창문이나 마루에서 감상했다. 취병은 이전에는 없던 것으로 18세기 전반기

부터 한양 부유층 가옥에 설치되기 시작하여 특히 정조 후반에 취병의 조성과 감상이 절정에 이렀다고 한다.

 

그 시기의 유학자 윤기(尹愭, 1741~1826)는 <부귀가(富貴家)의 네 가지 사물>이란 시(詩)로 당시 부귀를

누리는 계층에 유행하는 현상 네 가지를 꼽았는데 저택에 조성한 취병을 그중 하나로 꼽았을 정도였다. 여기서

거론하는 네 가지는 취병을 비롯하여 매화 분재와 비둘기 사육, 서가를 장서로 채우는 것이다. 그중에 매화

분재는 오랜 전통을 지녔던 반면 다른 현상은 모두 18세기에 들어와 크게 유행한 것들이다. 네 가지 현상의

공통점은 양반 사대부라는 신분과 큰 관련 없이, 서울의 큰 부자들에게 유행한 현상이며, 상당한 부를 축적하지

않으면 누리지 못하는 문화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후원유연>에 나오는 집주인은 그 당시 사대부가 누릴

수 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있는 셈이다.

 

이인문(1745년 ~ 미상)의 「고송유수첩(古松流水帖)」에 있는 그림에도 취병이 보인다.

 

[이인문, 「고송유수첩」中 <연정수업(蓮亭授業)>, 지본담채, 38.1×59.1cm, 국립중앙박물관]

 

 

183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도 이 취병의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 1층이 규장각이던 주합루(宙合樓) 건물

입구, 어수문(魚水門) 양 옆으로 초록색을 띄고 담장 모양으로 죽 늘어선 것이 취병이다.

 

[동궐도(국보 제249호) 中 부분]

 

 

취병은 18세기 중후반과 19세기 전반기까지 각광을 받았고, 20세기 초기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다가 그 후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문화재청이 <동궐도>의 취병 모습과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를 3년에 걸쳐

고증한 결과를 바탕으로 2008년 10월 주합루 앞쪽에 이 취병을 복원했다는데 그 모양이 이 모양이다.

 

 

 

취병이 아니라 위리안치된 귀양객 배소의 탱자나무 울타리라는 설명이 더 어울릴 듯싶다. 유중림(柳重臨, 1705~1771)

이란 분이 1766년에 완성한 『증보산림경제』의 권4 「꽃 기르기養花〕」의 ‘노송(老松)’ 항목에 ‘취병을 얽어 엮는 법

(翠屛綰結法〕’이란 표준 제작법을 수록하였다2고 하는데 문화재청이 그건 미처 못 본 모양이다.

 

[김홍도「사계풍속도병」中 <설중행사(雪中行事)>]

 

 

[원광대 모사본 <설중행사(雪中行事)>]

 

 

기생 셋과 사내 하나가 모였다. 모두 두툼한 방한 복장을 하고 있다. 흔한 광경은 아닌 듯 길 가던 사람도

쳐다보고 집안의 여인네도 대문 밖으로 내다본다. 제목이 ‘눈 오는 날 행사’라는데 무슨 일로 모인 것일까?

 

[김홍도「사계풍속도병」中 <설후야연(雪後野宴)>]

 

 

[원광대 모사본 <설후야연(雪後野宴)>]

 

 

앞의 <설중행사>와 이 <설후야연(雪後野宴)>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른다. 사내들이 기생임이 분명한

여인들과 어울려 야외에서 고기를 먹고 있다. 눈이 녹지 않았으니 아직도 날은 차가울 텐데 왜 하필 이 추운

날에 야외에서 고기를 먹는 것일까?

조선시대에는 내내 소의 도축을 엄격히 제한한 우금령(牛禁令)이 있었다. 소는 농사를 짓는데 제일 긴요한

동물이니만큼 식용으로 잡는 것을 엄격히 규제했다. 다치거나 늙어서 일할 수 없는 소만 잡을 수 있었고, 설과

대보름 사이의 명절기간에 한해서만 나라에서 우금령을 풀었다고 이전에 단원의 20대 그림들을 소개하며

덧붙인 적이 있다. 그래서 이 그림 속의 인물들이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때는 음력 1월1일부터

15일 사이여야 한다.

그런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3에는 시월(10월)의 계절 음식[時食]이라며 난로회(煖爐會)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화로에 숯불을 활활 피워 놓고 번철을 올려놓은 다음 쇠고기를 기름, 간장(진간장), 달걀, 파, 마늘,

고춧가루로 양념하여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데 이를 ‘난로회’라 한다. 추위를 막는 시절 음식이니 이것이 곧

옛날의 난란회(暖煖食)이다.”  정월 대보름기간이 아니어도 소고기를 먹었다는 얘기다.

 

난로회의 원조는 중국이다. 『세시잡기(歲時雜記)』에 북경 사람은 10월 초하루에 술을 걸러놓은 후 고기를

화로에 구우면서 둘러앉아서 마시며 씹는데, 이것을 ‘난로(煖爐)’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남송시대 맹원로의

저서인『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에도 10월 초하루에 유사(有司)4들이 난로와 술을 올리라 하면 민가에서는

모두 술을 가져다 놓고 난로회(煖爐會)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들을 근거로 이 풍습이 중국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는 반면 또 한편에서는 고기를 구어 먹는 풍습이 일본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료를 더 찾아본 결과 조선시대에 우금령이 아주 엄격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우금령은 태조 때부터

내려졌지만 왕실도 제사를 위해 소를 잡아야 했다. 또한 불교국인 고려에서는 살생을 자제하는 분위기였으나

유교국가인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육식이 늘어났다. ‘고기 맛 본 중’ 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한번 고기 맛이

들리면 자꾸 찾게 될 수밖에 없다. 사대부 집안의 제사 때문에도 쇠고기 소비가 늘어났다. 그래서 우금령에도

불구하고 밀도살이 성행하게 되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200년 동안 전국에서 하루 1,000마리 이상의

소가 도축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루 1,000마리면 1년에 36만 마리의 소가 도축되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공급이 넉넉해서 가격은 오히려 비싸지 않았다고 한다. 18세기 소 값이 헐할 때는 소 한 마리에 10냥

이었는데 당시 쌀 한 섬(두 가마니) 가격이 5~8냥이어서 쌀 서너 가마니면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림 뒤편에 성벽과 그에 딸린 건물이 보인다. 그러니 장소는 한양성내 어느 산 속이다. 해가 성벽 위에 낮게

걸려 있는데 계절상 성의 북쪽일 수는 없고 동쪽이라면 아침이라는 얘기인에 아무리 옛 사람들이 부지런 하기로

그것은 아닐 것 같다. 결국 남쪽 아니면 서쪽에 있는 산이니 남산이거나 인왕산일 텐데 아무래도 조선시대

문인과 선비들이 자주 찾았던 인왕산 자락이 아닐까 싶다.

 

 

[김홍도의 20대 그림5 , <춘절야유도(春節野遊圖)>, 30.5cm X 28cm, 개인소장]

 

<춘절야유도(春節野遊圖)> 를 보면 가운데 고기를 굽고 있는 불판의 모양이 훨씬 더 분명하게 보인다.

가장자리가 둥글고 속이 움푹 파였다. 벙거지라는 모자를 젖혀 놓은 형상으로 벙거짓골이라고도 부른다.

벙거지는 조선시대 궁중 또는 양반집 군노(軍奴)나 하인이 쓰던 털로 만든 모자인데, 무관(武官)이 쓰던 모자

중에도 벙거지와 비슷한 형태로 전립(戰笠)이 있었다. 그래서 이 도구를 전립투(氈笠套) 또는 전립골이라고도

한다. 전립투는 대개 무쇠나 곱돌로 만들며, 들기에 편리하도록 양편에는 고리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벙거지]

 

 

[전립투, 문화콘텐츠진흥원 사진]

 

 

그림 속 인물들이 먹는 음식에 대하여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 '냄비 가운데 전립투라는 것이 있다.

그 형태가 전립과 비슷한데, 움푹 들어간 곳에 채소를 넣어서 데치고 가장자리 편편한 곳에서 고기를 굽는다.

술안주나 반찬에 모두 좋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림 속 인물 모두가 음식에 온 신경이 쏠려있는 모습이다.

 

참고문헌 :「18세기의 방」(민은경 외 4인), 조선풍속사(강명관, 2010, 도서출판 푸른역사),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음식 백가지 2(1998, 현암사)

 

 

  1. 1835년 경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1764~1845)가 저술한 박물학서로 113권 16장 255책으로 되어 있다. 전원생활을 하는 선비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 기예와 취미에 대해서 논한 백과전서적인 생활과학서이다. (문화원형백과, 2012, 문화콘텐츠진흥원) [본문으로]
  2. ‘18세기의 방’(민은경 외 4인) 인용 [본문으로]
  3. 동국세시기 : 조선 후기에 홍석모(洪錫謨)가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 풍속집으로,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의 세시풍속들을 월별로 정연하게 기록했다. 1849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문으로]
  4. 전통사회의 자생적 모임이나 단체에서 사무를 맡은 직책 [본문으로]
  5. 단원이 23세 때이던 1768년에 그린 그림이라는 주장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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