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1

從心所欲 2018. 12. 18. 17:21

 

[신윤복, 「여속도첩(女俗圖帖)」 中 <전모를 쓴 여인>, 비단에 채색, 31.4 X 29.6cm, 국립중앙박물관]

 

인물이 등장하는 신윤복의 그림으로는 드물게 배경 없이 인물만 그린 그림이다. 단원의 풍속화처럼 여러 사람이 등장하여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여자 하나가 걸어가는 모습뿐이다. 그런데 혜원은 그림 한 쪽에 “이전 사람이 그리지 못한 것을 그렸으니 기이하다고 할만하다.(前人未發可謂奇)”고 적었다. 현대인에게는 특별할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너무도 단순한 이 그림이 뭐가 그리도 대단해서 혜원은 이런 말을 적었을까?

아래는 같은 「여속도첩(女俗圖帖)」에 있는 다른 그림이다.

 

[신윤복, 「여속도첩(女俗圖帖)」 中<장옷 입은 여인>, 견본채색, 26.2 x 19.1cm]

 

이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은 이슬람 여자들이 히잡(Hijab)을 쓰거나 부르카(Burka)를 착용한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같은 작가가 같은 시대의 여인을 그렸는데 그림의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장옷 입은 여인> 은 여염집 여인의 외출 패션이고, <전모를 쓴 여인>은 기생의 외출 패션이다. 복장도 복장이려니와 여인의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가 난다. 한쪽은 어딘가 움츠려든 기색인 반면 다른 한쪽은 도발적이라 할 정도로 사뭇 활기차 보인다.

 

혜원의「여속도첩(女俗圖帖)」에는 이 두 그림을 포함하여 모두 6점의 그림이 있다. 이 6점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문득 여섯 그림을 그리게 된 혜원의 심정 변화에 대하여 전혀 근거가 없는 상상을 해봤다. 

 

혜원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기껏해야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거나 기생과 살림을 하면서 그림을 팔아서 살았다는 얘기 정도다. 그런가 하면 혜원이 음란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는 떠도는 낭설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도 명색이 도화서 화원이다. 혜원이 그림을 그려 팔았다면 ,적어도 초기에는 「혜원전신첩」과는 다른 부류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혜원이 우리에게 익숙한 풍속도만 그린 것은 아니다. 

 

[신윤복 <송정아회(松亭雅會)>, 지본담채 37.8 x 32.7cm, 간송미술관]

 

[신윤복 <귀로산수도(歸路山水圖)>, 지본담채 25.2 x 15.5cm, 호암미술관]

 

[신윤복 <소상야우(瀟湘夜雨)> 지본수묵담채, 87 x 52.5 cm, 개인]

 

[신윤복 <계명곡암(溪鳴谷暗)> 지본담채, 59.4 x 47.7 cm, 간송미술관]

 

[신윤복 <수하서옥도(樹下書屋圖)> 지본담채, 26 x 16.6 cm, 선문대학교박물관]

 

[신윤복 <송정관폭도(松亭觀瀑圖)> 지본담채, 59.4 x 47.7 cm, 간송미술관]

 

[신윤복 <거범도강(擧帆渡江)>, 지본담채 27.4 x 32.7cm, 간송미술관]

 

혜원은 이런 산수화나 문인화풍의 그림들을 그려주고 술을 대접받든지 다른 대가를 받았을 수 있다. 이 그림들은 모두 종이에 그린 그림이다. 하지만 앞서의 두 여인네의 그림을 포함하여 「여속도첩」에 있는 다른 그림들도 모두 비단에 그렸다. 누군가의 주문을 받아 그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아마도 주문자는 특별히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혜원은 고민했을 것이다. 혜원 이전의 조선에 여성이 중심이 되는 그림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두서의 손자인 윤용의 <협롱채춘(挾籠採春)>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인의 자태보다는 노동하는 모습에 주목한 그림이다. 여성의 복장과 자태를 표현한 그림이라면 그나마 중국 복색의 사녀도(仕女圖)가 있겠지만 조선에서는 거의 그려진 적이 없다. 그래서 우선은 여인의 뒷모습부터 시작했다. 그것이 <처네 쓴 여인>이다.

 

[신윤복, 「여속도첩(女俗圖帖)」 中 <처네 쓴 여인>, 견본채색, 27.7 X 23cm ]

 

다만 여인의 이런 뒷모습만으로는 그림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별 의미도 없는 담장을 배경에 그려 넣었을 것 같다. 그래도 그림은 이상하다. 그림 주문자도 이런 그림을 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앞모습을 그렸다. 그래서 그린 그림이 <장옷 입은 여인>인지 아니면 <연못가의 여인> 인지는 알 수 없다.

 

<처네 쓴 여인>의 오른쪽 하단에는 ‘旃蒙赤奮若孟秋 蕙園寫’라는 관지가 있다. 고갑자1에서 전몽(旃蒙)은 을(乙)을 가리키고 적분약(赤奮若)은 축(丑)을 가리키는 것으로 합하면 을축년이라는 뜻이고 맹추(孟秋)는 음력 7월을 의미한다. 이 그림을 1805년 7월에 혜원이 그렸다는 것이다. 혜원의 그림 중 제작년도가 밝혀진 그림들은 가장 빠른 것이 1805년이고 가장 늦은 것이 1813년이다. 그러니까 <처네 쓴 여인>은 혜원의 그림 중 작화연도가 밝혀진 것 중 초기의 것이다. 1805년은 혜원의 나이 48세 때이다.

 

[신윤복, 「여속도첩(女俗圖帖)」 中 <연못가의 여인>, 견본채색, 29.6 × 24.8cm]

 

인물 주변에 배경처리를 한 것은 <처네 쓴 여인>과 같은 흐름이다. 그림 앞쪽의 비현실적인 각도의 커다란 연꽃과 연잎은 여자의 앞모습을 그린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한 치장처럼 보인다. 생황과 담뱃대를 같이 들고 있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 또한 그런 쑥스러움의 연장으로 보인다. 여자의 모습을 그렸으되 너무 튀어 보이지 않게 하려는 노력 같아, 마치 ‘너무 여자만 쳐다보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리따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나이 든 퇴기를 그린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닐까?

 

[신윤복, 「여속도첩(女俗圖帖)」 中<장옷 입은 여인>, 견본채색, 26.2 x 19.1cm]

 

<장옷 입은 여인>은 배경 없이 인물만 그렸다는 점에서 <처네 쓴 여인>이나 <연못가의 여인>과는 다른 단계의 그림이다. 하지만 왼쪽 구석의 아기 업은 여인을 처리한 것을 보면 아직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지는 못한 모습이다. 어떤 연유에서건 여인 하나만 그리기에는 자신이 없어 아기 업은 여인을 등장시킨 소심함이나 비례에 맞지 않게 인물을 작게 처리한 것은 「혜원전신첩」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고루한 옛 그림 방식이다. 어린 아이나 신분이 낮은 인물을 실제 비례와 상관없이 작게 그리던 방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신윤복, 「여속도첩(女俗圖帖)」 中 <거문고 줄 고르기>, 견본채색, 27.5 x 23cm]

 

<거문고 줄 고르기>는 혜원의 내부에서 소심함과 용기가 서로 싸우고 있는 그림 같아 보인다. 아마도 혜원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대담한 자세의 왼쪽의 여인이었을 것이다. 쪼그리고 앉아 다리가 벌어진 모습. 속바지와 치마로 가려져 현대인에게는 눈도 안 갈 저 모습을 그리는데 혜원은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 거문고 줄을 고르는데 꼭 저런 자세가 필요할 리는 없다. 그러니까 저 자세는 혜원이 의도적으로 만든 자세이거나 언제 한번 그런 광경을 봤는데 꽤 선정적으로 느껴 기억에 남았던 자세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의 여자 하나만 그려놓기는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뒤돌아 앉은 여자와 어린 여자가 찬조출연하게 되었을 것이다. 선정적 자세의 여인에게서의 시선분산 용으로.

 

[신윤복, 「여속도첩(女俗圖帖)」 中 <저잣길>, 견본채색, 29.7×24.5cm]

 

<저잣길>도 같은 맥락의 그림이다. 이번에는 머리에 장거리를 이고 오는 여인의 저고리 밑으로 가슴이 드러났다. 신윤복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실상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천민이나 양인 여자가 가슴을 드러내는 것은 자랑스러운 출산의 상징으로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더라도 가슴이 드러난 여자를 그린다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다. 물론 김홍도의 <새참>에도 젖가슴을 내놓은 여자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다. 신윤복이 모성애를 보여주려고 이 그림을 그렸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中 <새참> 부분]

 

여하튼 이렇게 먼 길을 돌아 <전모를 쓴 여인>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다. 화면 구석이 아니라 한가운데 자리한 기생의 모습이 얼마나 당당한가! 혜원 자신도 비로소 흡족한 마음에 “이전 사람이 그리지 못한 것을 그렸으니 기이하다고 할만하다.”라고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그림에 대한 세간의 열화와 같은 반응들이 결국 스토리를 가미한「혜원전신첩」의 그림들을 그리게 되는 기폭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다.

 

 

 

참고 : 한국고전용어사전(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세시풍속사전(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고갑자(古甲子) : 고대 중국에서 쓰던 간지(干支)의 옛 이름. 육십갑자의 옛 형태.(한시어사전, 2007, 국학자료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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