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3

從心所欲 2018. 12. 23. 15:50



[채용신 <운낭자27세상> 부분]


채용신의 <운낭자27세상>은 초상화이다. 비록 채용신이 운낭자를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지만 혜원이

<미인도>를 그린 의도와는 달리 운낭자를 추모한다는 엄숙함을 갖는 그림이다. 그럼에도 운낭자의 저고리

밑으로 젖가슴이 드러나게 그렸다. 젖먹이를 둔 어머니가 젖가슴을 드러내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는 당시의 풍습을 다시 확인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이런 풍습도 조금만 각도를 틀어 그리면 전혀 다른 느낌이 된다.



[작자미상 <미인도>, 129.0 x 52.2cm, 동아대박물관]


노리개와 옷고름으로 유두를 가린 것이 오히려 춘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로 그려진 그림이라는 의혹을

갖게 한다. 머리 모양으로 보아 혜원의 <미인도>보다 후세에 그려진 그림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하체를 늘씬한 비율로 처리한 것을 보면 어쩌면 더 후대의 그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그림이나 혜원의 <미인도>, 채용신의 <운낭자27세상> 모두 저고리가 상당히 짧다.

윤두서와 윤용의 그림에서 아낙들의 저고리가 허리까지 내려와 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급격한 복식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 초기 여성들의 저고리는 매우 길어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소매는 길고 품이 넉넉한 형태에

고름은 가늘고 짧았다고 한다. 이런 저고리가 17, 18세기를 거치면서 짧아지기 시작하여 허리길이의

저고리가 가슴 아래로까지 짧아졌다. 또한 저고리의 품도 좁아졌다. 짧은 저고리는 기생들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양반 규수들에게까지 번져갔고 마침내 조선후기에 이르면 모든 여성들이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고 한다.

이런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를 입는 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

이런 풍조에 대하여 이덕무는「사소절(士小節)」1에 이렇게 적었다.


“대저 복장에 있어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창기(娼妓)들의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처첩에게 권하여 그것을 본받도록 하고

있다. 아, 시례(詩禮)2가 닦이지 않아 규중 부인이 기생의 복장을 하는구나. 모든 부인들은 빨리 바꾸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덕무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19세기 들어서 저고리는 젖가슴이 거의 드러날 정도로 길이가 짧아졌다.

반면, 치마는 점점 더 풍성해지고 길어졌다. 거기에 노리개를 착용해 멋을 더 했다. <미인도>의 모습이다.

풍성한 머리에 빈약한 상의, 풍만한 하의가 조선 후기 여성의 기본 실루엣이 된 것이다.

저고리의 깃·끝동·겨드랑이 등에 다른 빛깔로 색을 맞춘 장식부분을 회장(回裝)이라고 한다. 혜원의

<미인도>에서 여인이 입고 있는 저고리는 깃, 끝동(소매끝단), 고름, 곁마기(겨드랑이 부분)이 모두 저고리

원단과는 다른 색 천으로 되어있다.



[신윤복 <미인도> 부분]


이를 삼회장(三回裝)이라 하는데 조선 후기에 시작된 여자 저고리의 형식이다. 주로 노랑이나 연두 바탕에

자주색이나 남색 회장을 달았다. 겨드랑이 밑의 곁마기가 없으면 반회장이라 하는데, 위 동아대 박물관

<미인도>의 여인이 입고 있는 저고리가 반회장이다. 회장이 전혀 없는 것은 민저고리라고 하여 양인과

천민의 통상적인 저고리 형태로 <운낭자27세상>에서 볼 수 있다. 


<미인도>의 여인이 손에 잡고 있는 노리개는 삼천주(三天珠)노리개라 한다. 원래 삼천주 노리개는 3개의

보석 구슬로 이루어진 노리개로, 왕실에서만 패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때에는 그런 규제가

더 이상 실효성이 없어진 모양이다. 동아대 박물관 <미인도>의 여인은 장도노리개를 달고 있다. 여자가

은장도를 지니는 것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뒤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널리 퍼졌다고 하는데 여성들의

호신용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남녀 구분 없이 평복에 차고 다녔고, 여러 가지 실용적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노리개는 저고리가 길 때는 허리에 차고 다녔지만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저고리고름에 달고 다녔다.

<미인도>에서는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혜원전신첩」에 있는 그림들에서는 기생들의 치마 단이 밑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배불뚝이처럼 부해 보인다.



[신윤복 <유곽쟁웅> 부분]



[신윤복 <야금모행> 부분]


이는 속에 무지기 치마를 입었기 때문이다. 무지기 치마는 상류층 부녀들이 입던 속치마의 하나로, 치마 속에

받쳐 입어 겉치마를 풍성하게 보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서양의 페티코트(petticoat)와 같은 구실을 하던

것으로, 3합, 5합, 7합 등 홀수로 층을 이루게 만드는데 모시 12폭이 들어갔다고 한다. 허리에서 무릎까지가

가장 긴 길이로, 젊은 여성들은 각 단마다 다른 색깔을 썼기 때문에 옷이 무지갯빛을 이룬다하여 무지기

치마로 불렸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면서 실학자였던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에

이 무지기 치마에 대한 비판의 글을 남겼다. "부녀자들이 치마 안에 겹겹으로 짧은 치마 십 수개를 다는데

속명(俗名)으로 무족군(無足裙)이라 한다. 이는 아마 고려시대에 시작된 것이니, 마땅히 빨리 버려야 한다.“



[작자미상 <미인도> 견본채색  117X 49cm, 해남윤씨 종가]


해남 윤씨는 고산 윤선도와 그의 증손인 윤두서로 이름이 높은 집안이다. 해남 윤씨 종가를 사랑채의 이름인

녹우당(綠雨堂)으로 부르는데 녹우(綠雨)’는 ‘늦봄과 초여름 사이 잎이 우거진 때 내리는 비’라고 한다.

그 녹우당에 전해오는 이 <미인도>를 해남 윤씨 집안에서는 윤두서의 손자인 윤용(1708년 ~ 1740)이 그린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혜원의 <미인도> 보다 늦은 시기의 작품일 가능성을 더 높게 보고 있다.

가체가 무거운 듯 두 팔을 들어 올린 두 팔에 저고리가 어깨부터 팔까지 윤곽이 드러나도록 달라붙어 있고

저고리 품도 전혀 낙낙함이 없이 몸에 꽉 끼어 보인다. 가늘고 긴 눈썹에 도드라져 보이는 붉은 입술,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약간 비껴선 자태가 혜원의 <미인도>보다 사치스러우면서 화려한 매력을 보이는 듯하다.


아래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자 미상의 또 다른 미인도이다.



[작자미상 <미인도>, 지본담채, 114.2 X 56.5cm]


풍성한 치마 자락을 겨드랑이에 끼고 손에는 꽃을 들었다. 고름을 풀지 않았는데도 저고리 섶이 벌어지게 그린

것은 여인의 젖가슴이 풍만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혜원의 <미인도>에 비해서 훨씬 선정적인 느낌이다.

그림 옆 제시는 연산군 때 천민 출신의 시인이었던 어무적(魚無迹)의 시(詩)다. 시 제목도 '미인도(美人圖)'다.


睡起重門淰淰寒 鬢雲繞繞練袍單

閑情只恐春將晩 折得梅花獨自看

차가운 날씨에 잠 깬 미인이

잠옷 차림에 검은 머리 치렁치렁

하릴없이 봄이 다 지날까 두려워

매화가지 꺾어서 혼자 바라보네.


그리고는 '을유(乙酉)년 3월 16일, 얹혀살던 곳에서 그렸다' 고 쓰고 정작 그림을 그린 본인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그 즈음의 을유(乙酉)년은 영조 41년인 1765년과 순조 때인1825년 인데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얹혀살던 곳에서 그렸다'......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작자불명 <큰머리 여인>, 지본채색, 24.7 x 26.0cm, 서울대박물관]


그림 옆에 '단원(檀園)'이라고 적혀 있지만 필체가 김홍도의 것과 달라 김홍도의 진작은 아닌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그림 자체는 거울이 놓인 방향을 따라 머리를 살짝 기울인 자세로 가체머리를 다듬고 있는 여인의

자태와 꼭 다문 작은 입술, 이마에 바른 흰 호분, 붉은 댕기, 붉은 거울, 흰 버선발 등은 조선후기 여인의

모습을 매력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받는다. 다만 필선이 가날프고 약한데다 여인의 자세가 인체 구조적으로

불합리 하다는 점 등을 들어 김홍도의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 여인이 들여다보고 있는 거울은 지금 우리가 보는 유리거울이 아니다. 조선 후기까지 거울은 유리 거울이

아닌, 청동이나 백동으로 만든 금속 거울이었다. 금속 거울은 쉽게 녹슬기 때문에, 갈고 닦아 맑고 선명한 빛을

유지해야만 했다. 이런 거울을 손보는 전문가를 마경장(磨鏡匠)이라고 했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어느 날 갑자기 다음날에 마경장 15명을 대령하라고 했는데, 그게 지켜지지 않아 공조와 상의원 해당 관원을

국문하라고 한 기록이 있다3. 궁 안에 있던 여인들이 거울이 잘 안 보인다고 연산군을 졸랐던 모양이다.


참고 : 문화원형백과(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조선풍속사(강명관, 2010, 도서출판 푸른역사)

손한석 한시(漢詩) 블로그,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미의 재발견(2005. 솔출판사),


  1. 사소절(士小節)은 이덕무(李德懋, 1741 ~ 1793 )가 1775년(영조 51)에 저술한 수신서이다. 선비, 부녀자, 아동교육 등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예절과 수신에 관한 교훈을 예를 들어가면서 당시의 풍속에 맞추어 설명하였다. 1966년 서울대학교 고전간행회에서 이덕무의 저술을 모두 모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상, 중, 하권을 영인본으로 간행하였는데, 이 책의 중권에 실려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2. 가정교육으로 시(詩)와 예(禮)를 가르치는 것(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본문으로]
  3.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 10년 1월 14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