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은 김홍도(金弘道)가 금강산과 강원도 일대의 경치를 그린 그림첩이다.
정조 12년인 1788년 정조의 어명을 받아, 김홍도와 같은 도화서 화원인 김응환(金應煥, 1742 ~ 1789)은
함께 금강산과 관동8경 지역을 여행하며 그곳의 산수를 그림으로 옮겼다. 김홍도는 여행에서 그려 온
초본(草本)을 바탕으로 채색횡권본(彩色橫卷本)과 화첩본(畵帖本) 두 가지를 정조에게 진상하였다.
이 화첩의 제작경위와 전래상황 등에 대해서는 강세황(姜世晃)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외에도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이 되는 사항들이다. <금강사군첩>은 이 화첩의
정식 명칭이 아니다. 예전에는 ‘해산첩(海山帖)’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금강사군첩>이 된 것은 조희룡(趙熙龍)이
『호산외사(壺山外史)』에서 이 화첩을 그리게 된 내력을 소개하며 정조가 ‘금강 4군 산수를 그리라고
명했다(命寫金剛四郡山水)’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 화첩에는 4개 군(郡)뿐만 아니라 남으로
평해(平海) 월송정(越松亭)에서 북으로 안변(安邊) 가학정(駕鶴亭), 그리고 금강산 접경지역의 산수가 모두
들어있다. 그래서 ‘사군첩(四郡帖)’이라는 명칭보다는 ‘김홍도필 금강산화첩(金弘道筆 金剛山畵帖)’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김홍도가 경치를 그린 곳은 75곳 이상이었으며 강세황의 「유금강산기」에 따르면 김홍도와 김응환은
여행에서 각각 1백여 폭의 초본을 그렸다 한다. 김홍도가 정조에게 올렸던 길이 10m에 달하는 횡권본은 그 후
화재로 소실되었다. 70폭의 그림은 정조가 5권의 화첩으로 만들게 하여 왕실 내부에서 보관해왔었다.
그러나 이 화첩본은 순조가 매제인 홍현주에게 하사한 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끝에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금강전도(金剛全圖)>라는 표제가 붙은 금강산 화첩이 전해지고 있어 이를 통해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의 면모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금강사군첩>의 원본은 70폭이었으나 이 화첩은 10폭이 유실된 60폭 뿐으로 12폭씩 묶어 5첩(帖)으로
나뉘어 있다. 그림들은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려졌으며 크기는 세로 30.4㎝ x 가로 43.7㎝이다. 이 화첩의
그림들을 후세의 임모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김홍도가 여행을 하면서 그린 초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각 그림마다 들어있는 제목은 단원 글씨가 아니며, 또한 각 폭마다 찍혀 있는 ‘檀園’과 ‘弘道’라는 두
방형백문(方形白文) 인장 역시 조악(粗惡)하여 후세에 만들어 찍은 후낙관(後落款)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임모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김홍도 원작의 구도를 완벽히 보존하고 있고 화풍상의 특징도 상당히 잘
유지하고 있어 김홍도가 생애 후기에 이룩한 개성적이고 한국적인 산수화풍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은 진경산수(眞景山水) 화첩이다. 그래서 전대(前代)의 정선이나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 비하여 훨씬 사실적이며 그림이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정조가 금강산과 관동의 풍경을 보기 원해서
시작된 일이라 김홍도는 가능한 사실적으로 풍경을 그리려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추측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김홍도는 때로 회화적 목적을 위하여 과감한 생략과 압축을 가하기도 하였다.
1788년 9월, 김홍도와 김응환은 한양을 떠나 지금의 양평을 거쳐 원주에 이르러 청허루(淸虛樓)를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은 유실되어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청허루는 『동국여지승람』에 "주천현(酒泉縣) 객관
서쪽에 있는데 절벽과 맑은 못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옛 주천현청 터는 현재의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이다. 지금 원주 시내로부터는 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이다. 옛 문서들의 기록에 의하면 ’빙허루는
주천현청의 부속건물로 현청 동쪽에 있던 누각이었고, 청허루는 망산(望山)에 자리 잡아 빙허루와 마주보고
있었다‘고 한다1.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1986년에 청허루 자리이던 망산 정상에 새로 건물을 짓고는 빙허루
현판을 달았다........그런데 고칠 생각은 안 한단다.
김홍도는 주천에서 길을 떠나 지금의 영동 고속도로 남쪽에 있던 길을 따라 평창군의 방림과 대화를 거쳐
진부면 마평리에 있는 청심대(淸心臺)를 그렸다.
청심대라는 이름은 청심이라는 기생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조선 초기에 청심이라는 기생이
강릉도호부사로 왔던 인물이 임기가 만료되어 한양으로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가 첩으로 살겠다며 여기까지
따라왔으나 끝까지 거절당하자 이곳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일제 때 정자를 짓고 1984년에는 열녀라고
사당을 세우고 초상화까지 봉안했다. 그럴 일인가?!
김홍도 일행은 여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지금의 영동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오대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월정사, 사고(史庫), 상원, 중대를 그렸다. 오대산(五臺山)이란 이름은 산의 가운데에 있는
중대(中臺)를 비롯하여 북대·남대·동대·서대가 오목하게 원을 그리고 있는 산세 때문에 붙여졌다 한다.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이 붙인 이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 산서성에도 오대산이 있는데 중국의
4대 불교 명산 중 하나로 문수신앙의 성지이다. 643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문수보살
(文殊菩薩)을 모시기 위한 초막을 짓고 불도를 닦기 시작한 것이 오대산 월정사의 시초임을 감안하면
그 연관성이 꽤 높다.
오대산사고는 월정사(月精寺) 북쪽 10리 남호암(南虎巖) 기슭에 있었다. 1605년 10월에 재 인쇄된 실록의
초고본을 봉안할 장소로 오대산 상원사(上院寺)가 선정되었고 1606년(선조 39)에 다시 월정사 부근에
사각(史閣)을 건립, 실록을 보관하기로 하고 사고를 마련하여 초고본 실록을 보관하였다. 오대산사고의
수호 사찰(守護寺刹)인 월정사는 사고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실제로는 월정사의 산내암자인 영감사에서
수호를 하였다고 한다. 영감사(靈鑑寺)는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향해 약 2km정도 가다가 서북쪽으로 1km
지점에 있고, 상원사는 월정사의 말사(末寺)로 오대산 중대(中臺)에 자리 잡고 있다.
김홍도는 월정사에서 다시 돌아 나와 횡계를 거쳐 대관령을 넘으면서 고갯마루 근처에서 멀리 강릉과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대관령을 그렸다.
대관령을 내려와 강릉에서는 천연정, 구산서원, 경포대, 호해정을 그렸다. 천연정 그림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천연정(天淵亭)은 18세기 후반 구산(丘山) 연어대(鳶魚臺) 위에 건립된 정자라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치는 대관령에서 강릉 방향의 남대천 주변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서원설립이 활발히 전개될 때 강릉지역에는 향사(享祀)할만한 지역의 선유(先儒)가 없었기 때문에
서원설립의 여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공자(孔子)도상을 명분으로 공자를 향사하는
구산서원을 1555년에 설립했다 한다. 또한 삼연(三淵) 김창흡(1653 ~ 1722)의 「오대산기(五帶山記)」에는
그가 강릉 구산서원을 출발하여 대관령을 넘어 횡계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월정사로 갔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현재 구산서원에 대한 다른 정보는 없다. 대관령에서 강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구산리가 있고 그
옆 오봉리에 오봉서원이 있는데 설립연도와 설립과정이 엇비슷하여 구산서원이 어느 시기에 오봉서원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경포대는 경포호(鏡浦湖) 서쪽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 중종 3년(1508) 강릉 부사 한급이 현위치로 옮겨 지은
이래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그림에서 앞쪽 언덕에 보이는 건물이 경포대로 예로부터 경포호를 배경으로
한 관동8경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다. 지금은 경포호와 바다 사이를 해안사주(海岸沙洲)가 막아 호텔 등 건물이
들어서고 수로로만 바다에 연결되어 있지만 김홍도가 찾았던 때는 그림에서처럼 시원하게 바다로 뚫려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본래 주위가 12 km에 달하는 큰 호수였다고 하나, 현재는 흘러드는 토사의 퇴적으로
주위가 4 km로 축소되고, 수심도 1∼2 m 정도로 낮아졌다. 호해정(湖海亭)은 원래 1750년에 경포호의 북쪽
언덕 위 깊숙한 산기슭에 소박하게 지어진 정자였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주위가 밭과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렸다.
김홍도는 강릉에서 금강산이 있는 북쪽으로 향하는 대신 삼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참고 : ohyh45님의 네이버블로그 ‘송풍수월’,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림 사진 : 나무위키
- (영월군문화관광해설사 김원식의 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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