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김홍도의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3

從心所欲 2018. 12. 28. 16:59

 

 

겸재 정선은 일생에 3번 금강산을 다녀왔다. 제일 처음 간 것은 35세 때인 1711년으로, 그 때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이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 楓嶽圖帖)」이다. 이 화첩에도 해산정 그림이 있다. 해안 쪽에서

금강산을 바라보고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에는 오른쪽에 해산정, 그리고 왼쪽의 남강 하구에

대호정(帶湖亭)이 그려져 있다.

 

[정선 「풍악도첩」中 <해산정>, 견(絹) , 26.8 × 37.3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  <해산정> 부분]

 

 

정선의 「풍악도첩」그림들에는 지도처럼 장소들이 표기되어 있다. 당시만해도 방에 누워 산수를 즐긴다는 와유(臥遊)를 위한 그림들에는 이처럼 지명을 적어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쩌면 금강산 그림을그려달라고 정선을 데리고 간

인물1 이 나중을 위해 정선에게 특별히 부탁했을 수도 있다.

 

삼일포(三日浦)는 해금강에 있는 자연호수로 북한 고성군 온정리의 동쪽 삼일포리를 흐르는 남강의 지류인

후천의 왼쪽기슭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떤 왕이 하루 동안 놀려고 왔다가 경치가 하도 아름다워 삼 일

동안 묵어갔다고 하여 ‘삼일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만큼 삼일포의 경치는 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혔고 호수풍경으로서는 전국에서 으뜸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삼일포>

 

 

<해금강 전면>

 

 

<해금강 후면>

 

 

이어 북상하여 통천 초입의 옹천을 그리고, 문암, 총석정, 환선정을 그린 뒤 또 북상하여 흡곡에 이르러

안변호반에 있는 시중대를 그리고 가학정을 그렸다.

예전 통천고을로 가려면 반드시 ‘독벼루’라고도 불리는 옹전(甕遷)의 아찔한 벼랑을 거쳐야 하였다. 옹천은

바다에 바로 접하여 있는 둥근 형태의 절벽으로, 바위 위로 돌을 쪼아 만든 길이 좁고 험한데다 바위 밑으로

파도가 계속 넘실거려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든 곳이라 하였다.

 

<옹천>

 

 

고려 말인 1370~80년대에 왜구가 통천고을에까지 침입하여 백성들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해가는 일들이

빈번했다 한다. 그래서 이에 대비하다가 어느 날 왜적들이 다시 또 옹천 길에 들어선 것을 군사들이 앞뒤에서

공격하여 모두 바다에 빠뜨린 일이 있어 이 지역에서는 옹천을 ‘왜적들이 빠져죽은 벼랑‘이라는 의미의

’왜륜천‘으로 불렀다는 얘기도 있다.

정선의 신묘년(辛卯年)『풍악도첩(風樂圖帖)』에도 ‘옹천’ 그림이 있는데 훨씬 더 아찔해 보인다.

 

[정선『풍악도첩(楓嶽圖帖)』中 <옹천> ,견(絹) , 36.1 × 37.6cm, 국립중앙박물관]

 

 

문암은 옹천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해안에 있다. 두 개의 바위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서있기 때문에

문과 같다 하여 문암으로 불렸다고 한다.

 

<문암>

 

 

“문암은 강원도 고성군 삼일포의 몽천암 동쪽으로 한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북고봉이라는 큰 바위덩어리가

솟아있다. 이 바위는 두 개의 돌 문짝이 깎아지르듯 서있고 한 개의 너럭 바위가 위를 덮고 있는데....”라는 기록2

은 정선의 『풍악도첩』중 <사선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선『풍악도첩(楓嶽圖帖)』中 <사선정> ,견(絹) , 36.1 × 37.6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  <사선정> 부분]

 

 

정선의 그림과 김홍도의 <문암>은 그린 방향이 서로 다르다. 정선은 남에서 북쪽을 보고 그리고 김홍도는

문암을 지난 뒤 북쪽에서 남쪽을 보며 그린 듯 하다. 정선의 그림에는 문암이 커다란 바위 위에 있는데

김홍도의 그림에는 해변 평지에 있는 듯이 그려졌다.

 

총석정은 통천에서 해변을 따라 동복쪽으로 7km 떨어진 고저읍 총석리 바닷가에 있는 누정으로 역시

관동팔경 중의 하나다. 바다 위에 빽빽이 솟아 있는 돌기둥[총석(叢石)] 위에 세워져 총석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총석들은 현무암이 오랜 세월 비바람과 파도에 부딪혀 그 면들이 갈려져 떨어지면서 6각형, 8각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을 이룬 것으로, 돌기둥들의 모습이 선경(仙景)을 방불케 하여 이곳을 ‘통천금강(通川金剛)’

이라고도 하였다. 역시나 이곳에서의 아침 해돋이구경을 절경으로 꼽았다.

 

<총석정>

 

 

[정선『풍악도첩(楓嶽圖帖)』中 <총석정> ,견(絹) , 37.8 × 37.3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벗인 이인문도 <총석종> 그림을 그렸는데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의 화풍에 서양화풍까지

가미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인문 (李寅文, 1745년 ~ 미상) <총석정>. 지본담채 28.0 x 34.0cm]

 

 

그림에 나타난 총석들의 실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총석, 사진출처 : 블로그 “오똑이의 삶과 여정”]

 

 

[총석, 사진출처 : 블로그 “오똑이의 삶과 여정”]

 

 

위 정선의 <총석정> 그림에는 총석정 맞은편인 왼쪽 끝에 환선정(喚仙亭)이 그려져 있듯이 환선정은 총석정의

서쪽기슭에 있던 정자이다. 북한지리정보에 환선정터로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은 정자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는 듯하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신선들이 올라 서로 부르며 즐기던 정자이므로 ‘환선정(喚仙亭)’ 이라

하였다고 한다. 환(喚)이 ‘부를 환‘자 이다.

 

<환선정>

 

 

김홍도는 총석정에서 환선정을 바라보고 그린 것 같다. 아래 사진도 총석정에서 환선정쪽을 바로보고 찍은

것으로 보인다.

 

[총석, 사진출처 : 블로그 “오똑이의 삶과 여정”]

 

 

시중대(侍中臺)는 금강산 구역에서 가장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관동팔경을 꼽을 때 평해 월송정 대신

이 시중대를 꼽기도 한다. 시중대는 시중호라는 호수를 바라보는 곳에 있는데, 때에 따라 이곳에 정자가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다 한다.

 

<시중대>

 

 

[정선『풍악도첩(楓嶽圖帖)』中 <시중대> ,견(絹) , 36.1 × 37.6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전기에 한명회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이곳에서 연회를 자주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에서 술자리가 한창일 때 한명회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때문에 이곳을

시중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시중(侍中)은 고려 시대의 관직명으로 조선시대의 우의정에 해당한다.

 

안변(安邊)의 가학정(駕鶴亭)은 김홍도의 금강산여정 중 가장 북쪽 끝이다. 가학정에 대하여는 전하는

자료가 없다.

 

<가학정>

 

 

김홍도는 안변에서 남쪽 방향으로 철령을 넘어 회양으로 간다. 그리고 회양에서 스승 강세황을 만난다.

 

 

참고 : 북한지리정보(2004., CNC 북한학술정보)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2012, 다음생각),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금강사군첩 그림 사진 : 나무위키

 

  1. 이 화첩의 발문에는 백석공(白石公)이란 인물이 금강산을 두 번째 여행했을 때 겸재를 동행시켜 금강산도(金剛山圖)를 제작토록 했다고 적혀 있다. 최근 연구에 의하여 백석공은 겸재와 같이 인왕산자락에 살면서 겸재의 친구이자 영조시대 제일의 시인으로 불렸던 사천(槎川) 이병연, 겸재의 스승이었던 삼연(三淵) 김창흡과도 교유가 있던 신태동(1659∼1729)이란 인물로 밝혀졌다. [본문으로]
  2. 순조19년 고성군수를 지낸 윤광렬이 임오년에 쓴 ‘삼일포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