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김홍도의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4

從心所欲 2018. 12. 29. 20:55

 

회양(淮陽)은 북한의 금강군 서편에 자리하여 동쪽으로는 금강군과 통천군, 북쪽으로는 안변군과 고산군에

맞닿아 있는 지역이다. 금강산은 최고봉인 비로봉이 솟아 있는 중앙 연봉을 경계로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 외금강의 남쪽 계곡은 신금강, 동쪽 끝의 해안부는 해금강으로 구역을 분류하는데, 내금강은 회양 쪽에

있다. 김홍도 일행이 금강산을 사생하러 갔을 때 김홍도의 어릴 때부터 스승이었던 강세황이 회양에 와 있었다.

강세황의 첫째 아들인 강인이 회양의 부사(府使)로 있던 때다. 강인은 1786년 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지를

거쳐 회양부사로 부임했는데, 막내아들인 강빈과 서자 강신이 75세의 노인인 강세황을 모시고 왔다. 어릴

때부터 안산에서 강세황의 집을 드나들었던 김홍도는 강세황의 아들들과도 모두 친분이 있는 사이였을 것이다.

 

옛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끼니를 채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금강산이 그만큼 가보고 싶은 곳이란 얘기도 된다. 우리나라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도 금강산을

동경하였다고 한다.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 한번 보았으면(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 하는 시 구절이 있을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중국 사신들이 금강산에 가보기를 원하였고, 그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그림으로라도 보기를 원하여 조정에서 그들에게 금강산도를 그려 주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온다고 한다.

그만큼 금강산은 모든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여북 하면 정조도 김홍도와

김응환을 보내어 그림을 그려오도록 했을까!

 

하지만 강세황은 그때까지 금강산 유람을 별로 반기지 않았다. 이유는 속되다는 것이었다. 금강산은 고려

때부터 불교의 정토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금강(金剛)이라는 이름 자체가 불교경전인「화엄경(華嚴經)」

에서 빌려온 말이기도 하다. 즉 “동북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어 담무갈보살(菩薩)이 일만 이천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고 있다. 이 보살은 법기(法起)보살 이라고도 하는데 중향성(衆香城)의 주인으로 항상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설법한다” 는 내용이 그것이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라는 말도 여기서부터

유래된 말이다. 그래서 세간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금강산에 한번 왔다 가면 죽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들이 예로부터 널리 퍼져있었다. 거기다 뛰어난 경치까지 더하여 일반 탐승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사대부들조차 금강산 유람한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고, 금강산 구경을 못해본 사람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한다. 강세황은 이런 풍토를 속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아들이 회양의 부사로 부임하고 애제자인 김홍도가 왕명으로 금강산을 사생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홍도와 회양에서 만나기로 약조하고 겸사겸사 길을 나섰을 것이다.

 

김홍도는 회양에서 취병암과 맥판을 그렸다. 취병암과 맥판이 어떤 곳인지 전하는 자료는 없다.

 

<취병암>

 

 

<맥판>

 

 

김홍도는 9월 14일 강세황 일행과 함께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으로 들어가 장안사에 이른다. 그리고는 장안사,

명경대와 그 골짜기의 문탑, 백탑, 증명탑, 영원암 등을 그렸다.

장안사(長安寺)는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 초입의 장경봉(長慶峯) 아래에 있는 절이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고구려의 승려 혜량(惠亮)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551년에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장안사는 조선 초에 세종이 전국의 사찰을 36개로 줄일 때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와 함께 살아남아

그 후 금강산의 4대 사찰로 불렸다.

 

<장안사>

 

 

[정선「풍악도첩」中 <장안사> 35.6 x 36.0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의 장안사 그림에는 반원을 그리고 있는 무지개다리 모양의 만천교(萬川橋)와 오른쪽의 석가봉(釋迦峯),

관음봉(觀音峯), 지장봉(地藏峯) 등 백색의 바위 봉우리들을 유독 강조하여 그렸다. 만천교(萬川橋)는 말

그대로 만폭동 골 안에서 흘러내리는 모든 물이 한데 모여 흐르는 개울의 다리라는 뜻인데, 정선은 이 다리를

「풍악도첩」의 <금강내산총도>에 ‘나는 무지개다리‘라는 뜻의 비홍교(飛虹橋)라고 적어놓았다. 36년 뒤인

1747년에 그린 「해악전신첩」에도 <장안사 비홍교>라는 그림이 있는 것을 보면 정선 때는 그렇게 부른 듯하다.

그런데 김홍도의 그림에는 이 다리 대신에 ㅡ 자 모양의 낮은 다리가 화폭 아래에 보일듯 말듯 그려져 있다.

큰물이 나면 이 다리가 유실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에 따라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으며, 다리를 새로 놓을 때마다 새로운 이름을 붙였는지, 다리 이름도 만천교, 비홍교, 향선교((向仙橋),

빨간다리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아래 그림은 강세황과 같은 시대의 화가였던 김윤겸(1711 ~ 1775)이 김홍도가 방문하기 20년전에

장안사를 그린 것이다. 정선의 그림에 있던 다리가 이때까지는 그대로 있었다.

 

[김윤겸, 금강산화첩 中 <장안사>’, 1768년, 지본담채, 27.7×38.8cm, 국립중앙박물관]

 

 

장안사는 6·25 때인 1951년 10월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축대, 비석 등만 남아 있다 한다.

 

[일제강점기 때의 장안사 모습]

 

 

내금강 초입 장안사 계곡에서 동쪽으로 제일 먼저 갈라지는 지류를 예전에는 황천강(黃泉江)계곡으로

불렀다. 이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영원동(靈源洞)이 나오는데 사후 세계인 유명계(幽冥界)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지옥문(地獄門)ㆍ 시왕봉(十王峯)ㆍ 판관봉(判官峯)ㆍ 사자봉(使者峯)ㆍ

죄인봉(罪人峯) 등의 지명이 붙어 있다. 명경대(明鏡臺)도 그 중의 하나이다. 높이 90m, 너비 30m인 바위

면이 깨끗이 다듬고 갈아놓은 듯 반반하여 마치 거울처럼 보인다 하여 명경대(明鏡臺)라고 부른다.

 

<명경대>

 

 

전설에 의하면 배석대에 꿇어 엎드린 사람들의 전생의 업적이 명경대에 낱낱이 비쳐지는데 시왕봉의

십왕과 판관봉의 판관은 그에 따라 판결을 내려 죄 없는 사람은 극락문을 통하여 극락세계로, 죄 있는

사람은 사자봉의 사자를 불러 지옥문을 지나 지옥에 떨어뜨렸다고 하여 일명 ‘업경대‘로도 불렸다 한다.

지금 북한에서는 황천강 대신에 외금강골짜기에서 나오는 여러 물들이 모여 이루어진 개울이라 하여

백천(百川)이라고 부른다. 금강산에 워낙 많은 명칭들이 있어 가보지 않은 사람은 말만 들어서는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정선의「풍악도첩」중 <금강내산총도>에는 군데군데 명칭을 적어놓아 내금강을

이해하는데 그나마 도움이 된다.

 

[정선 「풍악도첩」中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 35.9 x 37.0cm]

 

 

그림에서 장안사로 내려오는 물줄기를 2시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표훈사가 있는 11시 방향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3시 방향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 있다. 이 3시 방향의 계곡이 백천동(百川洞)이다.

그 계곡을 따라 3시 방향으로 보면 아래쪽에서 높이 솟은 봉우리 중 2번째가 시왕봉(十王峯)으로 시왕봉에서

오른쪽 끝의 백마봉까지 이어지는 계곡이 영원동이다. 그러니까 영원동은 백천동의 상류지역이다.

이 계곡 안에 약 3㎞에 걸쳐 골짜기에 돌탑들이 수없이 솟아 있어 백탑동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문탑(門塔)은 이 백탑동의 어귀에 있는 높이 20m의 바위이다. 탑처럼 생긴 2개의 바위가 우뚝 서있는 모양이

마치 돌문기둥을 세워놓은 것 같다 하여 ‘문탑’이라고 부른다.

 

<문탑>

 

 

증명탑(證明塔)은 문탑의 동쪽에 있는 높이 약 30m의 바위이다. 겉면이 인공적으로 다듬은 듯이 매끈하여

등불과 같이 밝게 빛나는 탑이라는 뜻에서 증명탑이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바위에는 예서(隸書)로 ‘證明塔’

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한다.

 

<증명탑>

 

 

영원암(靈源蓭)은 영원동에 있던 암자로 옛날 신라 때 영원조사라는 스님이 경상도 동래의 범어사에서 있다가

금강산으로 들어와 여기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암자가 없다.

 

<영원암>

 

 

명연(鳴淵)은 장안사에서 표훈사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삼불암(三佛岩) 못 미처의 계곡에 있는 소(沼)이다.

위로 3~4길 높이의 폭포가 있어 떨어지는 물이 바위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우는 소리처럼 들려 명연

(鳴淵)이라고 부른다. 다른 이름으로는 울소(鬱沼)이다. 폭포의 규모에 비해 소의 규모가 큰 편으로, 실 한

타래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고도 한다.

 

<명연>

 

 

삼불암(三佛巖)은 장안동에 있는 미륵, 석가, 아미타 세 부처가 새겨져 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왼쪽에는

그보다 작은 크기로 거사와 비구가, 뒷면에는 62개의 부처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三佛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삼불암>

 

 

 

참고 : 북한지리정보(2004., CNC 북한학술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오주석, 2006, 솔출판사), 국립중앙박물관

금강사군첩 그림 사진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