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계속해서 백화암 부도와 표훈사를 그리고 정양사로 올라가 혈성루에서 금강산을 조망한 모습을
그렸다. 다음 원통암 골짜기로 가서 원통암, 수미탑을 그리고 다시 만폭동 골짜기의 흑룡담망보덕암, 분설담,
진주담, 마하연, 묘길상 등을 그렸다.
백화암(白華庵)은 삼불암 북쪽에 있던 표훈사의 암자이다. 고구려때 이곳에 도산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후에 백화대사라는 중이 암자를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1632년에 세운 서산대사비(碑)1가 있는데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오래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예전 백화암에는 ‘수충영각’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그 안에 서산대사, 사명당, 라옹 등 이름난 승려들의 화상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역시 6·25때 소실되었다.
청허(淸虛), 편양(鞭羊) 등의 부도비가 있던 암자이다.
<백화암 부도>
[백화암 부도밭 1924년 모습, 불교닷컴 사진]
표훈사(表訓寺)는 내금강 표훈동 골짜기 안에 있다. 승려 표훈(7세기 중엽~8세기 초엽)과 능인, 신림 등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670년대에 세워진 표훈사는 처음에는 ‘신림사’로 불리다가 후에 표훈사로 바뀌었다.
20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표훈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 되였는데 지금 건물은 1778년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표훈사에는 여러 가지 유물들이 많았는데 그 중
53불(佛)을 새긴 쇠탑과 한꺼번에 40여 말의 밥을 지을 수 있는 500근짜리 놋솥이 유명하였는데 광복 전에
일제가 약탈해갔다.
<표훈사>
정양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내금강의 표훈사 북쪽 방광대(放光臺)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산의 정맥이 양지바른 곳에 놓였다고 하여 정양사(正陽寺)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반야전, 약사전, 삼층석탑과 석등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헐성루, 영산전, 명부전, 승방 등의
부속건물들이 있었으나 6·25 때 소실되었다. 반야전, 약사전은 전후에 복구되었다. 정양사에서는 비로봉을
주봉우리로 하는 내금강 일대의 40여 개 봉우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특히 정양사의 오른쪽에 있었던
작은 누각인 헐성루(歇性樓)에는 지봉대(봉우리를 가리키는 대)라고 하여, 내금강의 명소들을 앉은 자리에서
일목요연하게 찾아볼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지봉대는 기다란 상 위에 각 봉우리의 이름을 새긴 수많은
원추형의 산 모형을 놓고 고정시킨 줄을 당겨 모형 끝에 맞추면 보고자 하는 봉우리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든 특별한 장치였는데 1952년 헐성루가 불타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김홍도가 그렸다는 정양사 그림은 유실되었고 헐성루에서 금강산을 조망한 그림도 전하지 않는다.
동행했던 김응환의 그림 중에 <헐성루> 그림이 있다.
[김응환, 《금강산첩》中 <헐성루도(歇惺樓圖)>, 1788, 견본담채, 32 x 42.8cm ]
화면을 상하로 나누어 상단에 원경과 골산(骨山)을 정선의 화풍을 따라 호분(胡粉)을 입혀 그렸고, 하단
중앙에 누(樓)를 배치하고 주변 경관을 나타냈다. 중경(中景)의 기암들은 선염(渲染)을 이용하여 입체감이
두드러지도록 표현하였다.
[정양사의 혈성루, 1934년 모습, 불교닷컴 사진]
원통암(圓通巖)은 내금강 원통동에 있는 옛 암자로 구류연의 위쪽 개울의 서쪽에 있었다. 옛 기록에 의하면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암자로서 영원암과 각축을 다툰다고 하였다. 외금강의 송림동에도 ‘원통암’이라는
절이 있기 때문에 서로 구별하려고 ‘내원통암‘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수미탑으로 오르는 사람들은 도중에
반드시 원통암에 들려 쉬여갔는데 원통암에서는 망군성, 혈망봉, 석가봉, 장경봉, 관음봉 등의 기암준봉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원통암>
수미탑(須彌塔)은 내금강 수미동의 막바지 수미봉 남쪽기슭에 있는 바위이다. ‘수미’는 산스크리트어
‘수메루(須迷樓)’를 한자 표기한 것으로, 기묘하게 높이 쌓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라 한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이른바 부처와 인연이 깊은 산으로서 매우 높고 험한 산의 대명사로 되어 있다. 이곳 개울가에 우뚝 솟은
자연바위의 생김새가 매우 기묘하여 불경에서 나오는 수미산에 비겨 ‘수미탑’이라 하였다 한다. 높이
50여m의 수미탑은 아래는 불룩하고 위는 가늘며 구부정하게 생겼다. 몸체는 판돌을 잘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듯하며 꼭대기에 모자처럼 생긴 바위가 놓여 있다. 수미탑의 주변에는 그보다 작은 자연돌탑들이
수많이 널려 있다.
<수미탑>
김홍도는 다시 만폭동으로 옮겨 보덕암, 분설담, 진주담, 마하연, 묘길상을 그린다. 만폭동은 이름난 폭포와
소(沼)들이 집중되어 있어 예로부터 금강산의 계곡미를 대표하는 이름난 명승지구로 알려진 곳이다. 골 안에
수많은 폭포가 있다는 뜻에서 만폭동(萬瀑洞)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김응환이 만폭동 그림을 남겼다.
[김응환 《금강산첩》中 <만폭동도>, 견본담채, 32 x 43cm, 선문대박물관]
흑룡담(黑龍潭)은 만폭동에 있는 깊이 7.5m 정도의 소(沼)로 일명 만폭8담으로 불리는 내금강 팔담(八潭)의
첫 시작이다. 옛날에 검은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고 물이 검푸른 색을 띠고 있다. 기슭의 바위에 黑龍潭
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흑룡담망보덕암>은 이 흑룡담에서 보덕암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다.
<흑룡담망보덕암>
보덕암(普德庵)은 표훈사에 딸린 암자로 만폭8담의 하나인 분설담 오른쪽 20m 벼랑에 매달리듯 자리해
있는데 고구려 안원왕 때 보덕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옛날 보덕각시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는 보덕굴 앞을 막아 절벽에 본전을 지었다.
[정선 「풍악도첩」中 <보덕굴> 견(絹), 35.9×36.3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중앙의 절벽 중간에 있는 암자가 보덕암이다. 20m가 넘는 벼랑 밖으로 아슬아슬하게 내민 건물을
높이 7.3m의 구리기둥 하나로 마루귀틀을 받쳐 세웠다. 구리기둥은 1511년(조선 중종 6)에 설치한 것으로,
나무기둥에 19마디의 동판을 감은 것이라 한다. 현재의 절은 167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1924년 보덕암 모습, 불교닷컴 사진]
[김영택펜화 <금강산 보덕암>, 43 X 60cm, 2008년]
만폭동 만상암 건너편의 위쪽 개울에 분설폭포가 있는데 폭포수가 바위에 부딪쳐 산산이 흩어지며 마치
눈보라가 뿜어져 나오는 듯이 보이므로 분설(噴雪)폭포라고 부른다. 그 아래에 있는 소가 분설담(噴雪潭)이다.
소의 기슭에 있는 바위벽에 噴雪潭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분설담은 만폭동에 있지만 외금강 팔담으로 꼽는다.
<분설담>
진주폭포 역시 만폭동에 있는 높이 13m의 폭포로 분설담의 위쪽 개울에 있다. 층층으로 이루어진 바위벽에
부딪치며 폭포수가 진주알처럼 반짝여 진주(眞珠)폭포라고 부르고 그 아래에 있는 소를 진주딤(眞珠潭)이라
부른다. 진주폭포와 진주담은 만폭동의 폭포와 소들 가운데서 가장 장쾌한 모습을 펼친다. 진주담 역시
외금강팔담 중의 하나로 팔담 가운데서도 제일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다.
<진주담>
마하연(摩訶衍)은 대승(大乘)이라는 뜻이다. 마하연은 금강산 만폭동 계곡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암자로
유점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인 66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6·25때 전소되었다.
<마하연>
묘길상(妙吉祥)은 만폭동 윗골짜기의 높이 40m 벼랑에 새긴 높이 15m, 너비 9.4m의 고려시대 마애불상
조각이다. 높이와 너비의 비례가 잘 맞추어져 바위에 도두새긴 북한 돌부처 가운데서 가장 크고 잘된
대표작의 하나로 꼽는다. 이 부처의 본래 이름은 아미타여래상인데 18세기 말엽 조각 오른쪽 아래에
‘묘길상’이라고 새긴 때로부터 묘길상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묘길상은 책상다리를 틀고 앉은
모습에 오른손은 위로 쳐들고 왼손은 아래로 내리우고 있다. 이 부처의 웃는 얼굴, 긴 눈썹, 가늘게 째진
실눈, 이마의 백호2와 유달리 길게 드리워진 큰 귀, 통통한 볼, 밭은 목, 앞가슴을 드러내고 두 어깨에 걸친
옷의 주름 등은 고려시대 아미타여래조각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라 한다.
<묘길상>
[묘길상 실제 모습]
묘길상을 끝으로 김홍도는 내금강의 사생을 모두 마쳤다. 그리고는 안무재를 넘어 동해안쪽 외금강으로 갔다.
참고 : 북한의 전통사찰(2011. 도서출판 양사재), 북한지리정보(2004., CNC 북한학술정보),
조선향토대백과(2008. 평화문제연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금강사군첩 그림 사진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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