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류동은 외금강 구룡연구역 금강문에서 주렴폭포와 은사류의 합수목까지를 포괄하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비로봉과 월봉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구룡연과 비봉폭포를 거쳐 옥류교 밑으로 흐르는데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이 되어 흘러내린다고 하여 옥류동(玉流洞)으로 불렸다. 옥류동에는 유명한 폭포들과 물이 차고
넘치는 담소들, 기암괴석들이 있어 금강산에서도 대표적인 절승으로 꼽히는 곳이다.
김홍도의 <옥류동>그림은 유실되었다.
능호관 이인상(1710 ∼ 1760)이 28세 때인 1737년에 옥류동을 그린 작품이 전한다. 간결하고 사의적인
작품이라 옥류동의 맑은 물까지는 읽어낼 수 없다. 하지만 평담하고 고졸하면서도 근대적 수채화 같은
느낌까지 주는 그림이다.
비봉폭포는 금강산의 옥류동 세존봉(世尊峰)의 서쪽에 있는 높이 139m, 너비 4m의 폭포다. 폭포수가 길게
떨어지고 물방울이 날리며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나는 것 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비봉폭포(飛鳳瀑布)
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수가 층층으로 된 큰 바위벽을 타고 흐르다가 펴졌다가 좁아졌다 하면서 여기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형태로 바뀌면서 깊이 5m의 봉황담으로 들어간 뒤 다시 옥류동 계곡을 지나 신계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든다.
구룡연은 구룡폭포의 아래에 있는 소이다. 앞의 유점사 전설에 나오는 9룡이 살았다 하여 구룡연(九龍淵)으로
불린다, 기슭에 ‘노도중사사인현전(怒濤中寫使人眩轉 : 노도같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사람들을 아찔하게
만든다)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우암 송시열의 필적인 것으로 전한다.
김홍도는 신계사 계곡을 다시 나와 온정을 거쳐 만물초를 그렸다. 흔히 만물상으로 알려져 있는 만물초
(萬物草)는 금강산 외금강지역 만상구역 온정마을 서쪽 끝인 오봉산의 남쪽 사면 일대의 바위산이다. 층층절벽
만 가지 생김새를 가진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거암(巨巖)
들이 난립하여 천태만상을 이루고 있어 만물의 모양새를 다 볼 수 있다하여 만물상(萬物相)이라 하였다.
숭고하고 신비한 인상을 주는 것은 흰색 화강암의 절리(節理) 때문이다.
<만물초>를 끝으로 김홍도는 금강산 사생을 모두 마쳤다. 김홍도는 온정령을 넘어 회양으로 가서 다시
강세황을 만났다. 어쩌면 맥판 그림은 이때 그렸을 수도 있다. 김홍도는 회양에서 강세황을 만나 그간 사생한
그림들을 보여 주었다. 그런 뒤 단발령을 되넘어 오면서 먼발치에서 금강산과 작별했을 것이다.
단발령은 강원도 창도군 창도읍(옛 김화군 통화면)과 금강군 내강리(옛 회양군 내금강면) 사이에 위치한 높이
834m의 고개로 금강산 들어가는 초입에 있다. 단발령(斷髮嶺)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이 고개에서 삭발하였다는 설과 이 고개에서 마주 대하는 금강산의 풍경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금강산에
머물고 싶을 만큼 황홀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김홍도의 <단발령> 그림은 유실되었다.
정선의 「풍악도첩」에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 그림이 있고 김홍도의 친구인 이인문이 그린 같은
제목의 그림이 있다.
정선이나 이인문이나 금강산이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처럼 그렸다. 아마도 단발령에 올라 처음 금강산을
대할 때의 느낌이 그랬었나 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장관이라 마치 선계에 있는 산처럼 보여 그 황홀함에
빠져있다보니 중간에 있는 다른 경치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홍도는 금성에서 피금정을 그렸다. 이것이 1788년 김홍도의 금강산여행 마지막 그림이었다. 그런 뒤
김홍도는 금화를 거쳐 한양으로 돌아왔다.
피금정은 예전에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금성(金城 : 북한지역으로 지금은 강원도 김화군에
위치) 의 남대천가에 있었다. 김홍도 일행이 갔던 길과는 반대로,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금강산 구경을 가려면
강원도 철원을 거쳐 김화(金化)에서 금성(金城)을 거쳐 단발령을 넘는 길을 갔다. 피금정은 금성에 못 미친 곳에
있어 많은 금강산 여행객들이 지나는 곳이었다. 피금정(披襟亭)이란 ‘옷깃을 풀어 젖히는 정자’란 뜻이다.
정선의 <피금정>은 진산(鎭山)인 경파산(慶坡山)을 미법(米法)으로 정성스럽게 꼼꼼히 묘사하여 뒤쪽에
배경으로 두고, 완만하게 멀어지는 남대천변을 따라 가로수와 피금정을 그려냈는데, 고요하면서도 한가로운
느낌을 준다. 반면 김홍도의 그림은 그리다 만듯 황량한 느낌이 든다.
어느 글에선가 유홍준박사는 김홍도의 《금강사군첩》에 있는 <구룡연>에 대해 평하면서 “대상을 사생하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회화미는 아주 약하다“고 했다. 단지 <구룡연>뿐만이 아니라 《금강사군첩》에 있는 모든
그림이 마치 사진을 찍듯이 중심 대상물을 중앙에 두는 평범한 구도와 세밀하지만 변화 없는 단조로운 필치로
일관한 느낌은 있다.
북송(北宋)의 곽희(郭熙)는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산수화를 그릴 때 “한결같이 모두 그려낸다면 지도
(地圖)와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했다. 산수화가 지도와 다른 이유는 산수의 정수(精粹)를 취해 그렸기
때문이며, 모든 산수가 화재(畵材)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순수하지만
그 가운데에도 품격과 위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금강사군첩》그림에 감흥이 적은 것은 왕명으로 그리는 그림이라 가능한 사실대로 경관을 사생하는데 주력하여
덜어낼 것을 덜어내지 못한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김홍도 역시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에 자신의
감흥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김홍도가 50대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구룡폭>그림을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금강사군첩》의 그림과는 달리 필치에 강약의 변화가 많고 묘사에도 대담한 생략이 구사되었다.
《금강사군첩》이 임모작이라는 근거로 제기되는, 그림에서의 또 다른 사람의 필적은 김응환의 필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금강사군첩》은 조선시대에 ‘봉명도사첩(奉命圖寫帖)’이라는 꼬리를 달고 다니던
화첩이다. 개인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이 왕명을 받아 그리는 그림이니 충실한
사생을 위해 때로는 서로 콜라보작업도 하지 않았을까?!
김홍도가 정조에게 올린 길이 10m에 달하는 횡권본이 화재로 소실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정조가 신하들에게 보여주며 시를 짓게 하였다니 그림이 얼마나 장관이었겠는가! 횡권본이 지금까지
전해졌다면 쪽으로 나눠진 그림들이 어떻게 모아졌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고, 김홍도의 천재성이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은 김홍도와 김응환이 같이 정조의 명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면 당연히 도화서 선배인
김응환이 주도하였을 법 한데, 이 건과 관련하여 김응환의 이름은 단지 김홍도와 동행했다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남아있는 금강산 그림도 김홍도에 비하여 훨씬 적다.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지만 알 수가 없다.
김응환의 작품 중에 <금강전도>가 있다, 금강산의 내산 전경을 그린 그림이다. 김홍도와 같이 금강산에
여행하기 16년 전인 1772년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 상단에 ‘歲壬辰春 擔拙堂爲西湖 倣寫金剛全圖’라고
써있다. 담졸당(擔拙堂)은 김응환의 호고, 서호(西湖)는 그 당시의 김홍도의 호다. 그러니까 ‘임진년(1772)
봄에 김응환이 김홍도를 위해 (정선의) 금강전도를 본떠서 그렸다’는 것이다.
김응환은 김홍도와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다음 해인 1789년에 졸하였다.
참고 : 북한의 전통사찰(2011. 도서출판 양사재), 조선향토대백과(2008.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리정보
(2004., CNC 북한학술정보), 문화원형백과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금강사군첩 그림 사진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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