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 2

從心所欲 2019. 1. 21. 14:42

 

정선이 금강산 내산을 그린 그림은 <금강전도> 말고도 전하는 그림이 여럿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신묘년

풍악도첩」에 들어있는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이다. 알려진 대로 1711년 첫 번째 금강산 여행 때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는 내금강의 주요 봉우리와 사찰의 이름들이 적혀 있다.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攬)>도 그렇다.

 

[정선 「풍악도첩」中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 35.9 x 37.0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攬)>, 견본채색. 100.8 x 73.8cm, 간송미술관]

 

<풍악내산총람> 은 그림의 규모도 크거니와 단풍에 물든 가을 금강산의 형상과 정취를 진채를 구사하여

화사하면서도 장엄하게 그려냈다. 공을 굉장히 많이 들인 그림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그림에다 명승고적의

이름을 꼼꼼히 적어놓았다. 진경산수화는 지도처럼 보이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정선이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왜 그랬을까?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추정했다.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그리면서 그림 속에 지명을 명시한 일이 종종 있긴 하지만 대체로 초기작에 국한된다.

노년작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 작품(풍악내산총람)은 여러모로 볼 때 60대 중후반경 작품으로

보여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노년작으로는 보기 드물게 섬세하고 단정한 필치나 고급 비단에 고가의

석채 안료를 써서 그린 것도 예사롭지 않다. 필시 겸재와 각별한 사이였던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단단히

마음먹고 그린 그림이다. 그림으로나마 금강산의 절경을 보고 싶어 했던 지인에게 '와유지락(臥遊之樂)',

즉 '누워서 유람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려는 마음에서 그렸을지도 모르겠다.”1

 

직접 가볼 수 없는 명승지의 산수를 집에서 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그린 산수화를 와유산수화(臥遊山水畵)

라고 한다. <금강전도>의 제시 7, 8구가 와유(臥遊)의 의미이다.

 

縱令脚踏須今遍

설령 내 발로 직접 밟으며 두루 다닌다 한들

爭似枕邊看不慳

그 어찌 머리맡에 두고 실컷 보는 것에 비기랴.

 

백석공(白石公)으로 불린 신태동이란 인물이 금강산을 두 번째 여행하면서 정선을 동행하여 금강산의 풍경을

그리게 한 「풍악도첩」도 그림을 가까이에 두고 자신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같은 개념이다. 정선의 스승인 김창흡도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본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다섯 번 봉래산을 밟고 나니 다리가 피곤하여

쇠약한 몸은 금강산의 신령과 이별하려 하네.

화가의 삼매에 신령이 녹아들어 있으니

무명 버선 푸른 신 다시 신어 무엇 할까.“

 

정선과 동시대 인물인 동포(東圃)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은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보고, "꿈속에서

금강산 생각 30년, 와유(臥遊)로 오늘에서 흡족함을 얻어 냈다"고 찬탄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보고 싶은 곳에 쉽게 다녀올 수 있는 오늘날에도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평생 보고

싶은 곳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 대신 사진이나 동영상이라는 대체 수단이 있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다녀온 사람의 얘기를 듣거나 글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이 전부다. 그렇게 마음과

머리로만 상상하던 곳을 그림으로 보게 되었을 때의 감동과 감흥은 지금 시대에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는 것의

느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그런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 자체도 흔하지 않은 일이었을

터이니 지금 우리처럼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고 또 보며 그림과 산수에 수도 없는 감탄사를

쏟아내었을 것이다.

 

[정선 <금강내산도(金剛內山圖)>, 견본담채, 28.5 x 34.0cm, 고려대박물관]

 

고려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강내산도(金剛內山圖)>는 앞의 그림들과는 조금 다르게 토산과 골산을

대비시키는 대신에 토산이 골산을 감싸고 있는 듯한 구도로 그려졌다. 또한 골산의 묘사도 대표적인 암봉들을

부각시키는 대신에 전체적인 산세를 담담히 그려낸 느낌이다. <금강전도>와 「풍악도첩」의 <금강내산총도>

에서는 비로봉 아래쪽 6시 방향에 있던 비홍교가 화면의 오른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오른쪽 상단에 조귀명(趙龜命, 1693 ~ 1737)이 쓴 것으로 알려진 제(題)는 “산을 안과 밖으로 구분하면

하나는 신령스럽고 빼어나게 아름답고 하나는 크고 넓으니, 이것을 합치면 온갖 보물이 모인 것이 된다. 대체로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깝게 보는 것보다 낫고 두 번째 보는 것이 처음 보는 것보다 낫다. 마치 예닐곱 번은 날아서

다녀온 듯한 이 모습은 이 노인께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이룬 것이다.”는 내용이다. 김창흡이 썼다는 왼쪽의

발문(跋文))은 “옛날 초나라 지역의 남쪽에는 사람이 적고 돌이 많았다. 천지가 신령스러운 돌을 사람처럼

길러내는 것은 아마도 그 수를 다투는 것이리라. 나는 이 일만 이천 금강산 봉우리를 잘게 부수어 일만 이천

개의 은하수로 만들어 갖기를 원하노라2” 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위작 논란이 있다. 중국에서 감정학을 공부하여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의 미술품 감정학자로

불리며 온갖 유명작품에 대하여 위작설을 제기하고 있는 이동천이란 이가 이 그림에 대해서도 위작설을 주장했다.

산봉우리 끝의 눈 덮인 부분이 검은 색을 보이는 것에 대하여 호분(胡粉)이 아닌 납 성분의 연분(鉛粉)으로 그려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주지하듯이 정선은 실경을 그렸는데,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金剛內山›을 보면 눈이 쌓여 있어야 할 산봉우리에

흙이 덮여 있다. 이는 위조자가 흙 덮인 산봉우리를 그린 게 아니라 눈 덮인 산봉우리를 그렸는데  1850년 이후에

제조된 새로운 연분을 사용하여 현재 반연(返鉛) 현상이 나타나 마치 흙이 쌓인 것처럼 보이는 것3”이라는 주장이다.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의 <금강내산(金剛內山)>을 보면 이동천박사의 주장이 무슨 말인지는 조금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정선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中 <금강내산(金剛內山)>, 32.5 x 49.5cm, 보물 제1949호, 간송미술관]

 

이 <금강내산> 그림은 고려대박물관의 <금강내산도>와 구도가 상당히 유사하고 산세도 두 그림이 얼핏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고대박물관 그림이 산봉우리들을 더 잘게 나누어 촘촘하게 그렸다. 이 그림의 산봉우리들은

고려대박물관 그림과는 달리  눈 덮인 모양을 묘사하기 위해 칠한 흰 색 부분이 제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동천박사의 주장이 고려대박물관의 <금강내산도>가 위작이라는 증거로 얼마나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그 이후 별 논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해악전신첩」의 <금강내산>은 1747년에 정선이 세 번째로 금강산을 방문하여 그린 것으로, 그간 정선의

금강산 그림의 최종작이자 완성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데 2005년 「겸재정선화첩(謙齋鄭敾畵帖)」이

독일에서 돌아오면서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

 

「겸재정선화첩」온 화첩은 독일 상트 오틸리엔(St. Ottitien)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신부가 1911년에 이어 1925년 두 번째 한국 방문 중에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여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인데, 상트오틸리엔수도원에 80년 동안 비장 되었다가 1975년 당시 독일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경북 칠곡군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의 끈질긴 노력에

힘입어 베네딕도회 한국 선교 100년을 맞아 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2005년 영구대여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반환되었다.

이 화첩은 정선의 작품 21폭의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진경산수화, 고사인물화, 산수인물화, 송학도 등 다양한

화재의 그림들이 있어 정선의 다채로운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작품집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화첩에 정선의 또 다른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가 들어있다.

 

[정선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 견본담채, 33 × 54.5cm,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소장은 이 화첩의 <금강내산전도>를 정선이 일흔다섯 살이 된 1750년도에 그린

것으로 추정했다. 그 주장이 맞는다면 「해악전신첩」의 <금강내산>보다도 3년 뒤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림의 구도는 고려대박물관 그림과 유사한데 산세의 표현은「해악전신첩」과 더 닮았다. 너럭바위를 넓게

자리 잡아 그린 것도 유사하다. 다만 색을 사용한 덕에 「해악전신첩」그림 보다는 훨씬 온화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험준한 산세 속에 있는 유명한 절들을 빨간색으로 칠해놓아 쉽게 알아보도록 한 것도 특이한 점이다.

 

베버신부는 1925년 6월 2일부터 12일까지 금강산을 기행하고 6점의 그림을 직접 그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한국을 방문한 뒤에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책까지 집필했다. 베버 신부는 그 책에서 정선의 그림이

사실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고 채색을 하지 않고 먹의 양과 붓놀림만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도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서양 그림에 익숙한 베버 신부의 눈에 정선의 그림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기이한 일일 것이다.

 

누군가가 이 그림에 대하여 “전체 그림을 원형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비로봉에서 장안사에 이르는 흐름을

태극선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없어진 비홍교는 그림에 넣었는데 일점투시법이나 등거리투시법에도

맞지 않아 그림의 유일한 오점이 되고 있다”는 평을 했는데 특히 마지막 문장은 옛 그림을 현대의 눈으로 보는

우(愚)를 스스로 드러내 보인 것 같아 민망할 뿐이다.

 

  1. 간송미술36 - 회화(백인산, 2014. 컬처그라퍼) [본문으로]
  2. 그림으로 그려내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본문으로]
  3. 조선서화 감정과 근거 자료의 운용: 1850년 이후에 제작된 안견몽도원도, 제첨 ‘몽유도원도’와 위작 정선 계상정거도 등을 중심으로, 이동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