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 3

從心所欲 2019. 1. 24. 00:22

정선의 금강산 화첩 중 「신묘년 풍악도첩」은 정선이 36세이던 1711년에, 「해악전신첩」은 그로부터 다시 36년 뒤인 1747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알려진 대로 1712년 8월에도 정선은 이병연의 초청으로 이병연의 아버지인 이속, 동생 이경성 등과 금강산을 여행한 후 30여 폭의 《해악첩》을 만들어 이병연에게 주었지만 그 화첩은 전하지 않는다. 1747년 정선은 그 해에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상심하다가 세 번째 금강산 여행을 하고 지금 전하는「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남겼다.

 

「해악전신첩」은 1712년 화첩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은 21점으로 줄었지만 이병연은 이 화첩에 자신이 1712년의 화첩에 썼던 제화시를 다시 썼고, 이미 고인이 된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시는 홍봉조(1680년 ~ 1760)가 대필해 넣었다. 화첩은 총 38폭 중 산수화가 21폭, 나머지는 제목, 서문, 시문, 발문 등으로 구성되어있고 그림마다 김창흡과 이병연의 시가 수록되고 장첩 경위를 알 수 있는 서발문까지 갖추어져 완전성 면에서도 그 가치가 높다 한다. 또한 「해악전신첩」은 정선 특유의 다양한 필묵법과 옅은 청록색의 선염법이 고른 수준으로 능숙하게 구사되어 금강산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대표작으로 노년의 무르익은 필치가 집약되어 있어 금강산 그림 중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보물 제1949호로 지정되었고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반면 36세에 그린 「신묘년 풍악도첩」은 정선의 가장 이른 금강산 그림으로 ‘위대한 습작’이라는 평가도 있고, 북방화법과 남방화법을 고루 수용하고 주역음양원리의 조화를 구현한 작품이라는 평가도 있다. 비단에 엷은 채색의 그림 13폭과 화기(畵記) 1폭 등 총 14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역시 보물 제1875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6세의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리고 36년 뒤 72세의 정선이 그린 금강산.

무슨 차이가 얼마나 있을까?

 

예전에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강원도 철원으로 가, 김화(金化)에서 금성(金城)을 거쳐 단발령을

넘었다고 한다. 그 길목의 금성 남대천가에 피금정(披襟亭)이 있었다.

 

[정선「풍악도첩」中 <피금정> 견본담채, 35.7 × 33.6㎝, 국립중앙박물관]

 

「풍악도첩」의 <피금정>은 진산(鎭山)인 경파산(慶坡山)을 미가운산식(米家雲山式)의 남방기법과 남대천의

가로수 및 피금정을 그린 북방기법이 모두 법도 있게 배운 정법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정선이 대립적인 양대

기법을 한 화면에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대담하게 혼용 조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그림에서 이미

정선이 장차 진경산수화풍을 확립해 놓는 화성(畵聖)으로 대성할 기미를 엿볼 수 있다는 평도 있다.

 

[정선「해악전신첩」中 <피금정> 견본담채, 32.1 × 24.9㎝, 간송미술관]

 

「해악전신첩」에서는 피금정과 그 주변의 가로수도 모두 미가수법(米家樹法)의 남방화법으로 대담하게

일원화시키는 노숙함을 보이고, 구도도 과감한 생략을 시도하여 위아래에 하늘과 물을 상징하는 공활한

여백을 남김으로써 무궁한 시정(詩情)을 유발하려고 했다는 평이다. 실로 “마음먹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從心所欲 不踰距)”는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 되었다는 극찬도 있다.

 

<단발령망금강(斷髮令望金剛)>은 단발령 고개에서 처음 금강산을 대면하는 장면이다. 정선 뿐만 아니라

김홍도, 이인문도 이를 화재로 그렸었다. 단발령에서 먼 동해 쪽 금강산을 바라보는 인물들을 근경(近景)으로

하고 안개 너머 멀리 솟아오른 비로봉과, 이를 둘러싼 금강 연봉(連峯)을 원경(遠景)으로 그린 작품이다.

 

[「풍악도첩」中 <단발령망금강> 견본담채, 36.0 × 37.4㎝, 국립중앙박물관]

 

[「해악전신첩」中 <단발령망금강> 견본담채, 32.0 × 24.8㎝, 간송미술관]

 

「풍악도첩」그림은 백색 암봉은 북방계의 강한 필묘(筆描)로, 수림이 우거진 토산은 부드러운 남방계의

부드러운 묵묘(墨描)로 처리하여 극단적인 음양 대비를 보이면서, 화면 구성에서는 반드시 토산[肉山]이

암산[骨山]을 포근히 아래에서 감싸는 음양 조화의 성리학적 우주관이 적용되는 새로운 화풍을 창안하였다는

평이 있다. 이는 성리철학을 바탕으로, 이제껏 중국에서는 대립적으로만 발달해온 남북화법을 이상적으로 조화시켜

우리 산천의 표현에 가장 알맞도록 만들어낸 획기적인 화법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음양대비와 조화에만

 집중하여 그림이 단조롭다는 평도 있다.

 

반면 「해악전신첩」은 금강산의 묘사가 훨씬 세련되고 원숙해졌다는 평이다. 비로봉과 사자암, 금강대, 혈망봉 등

금강산 봉우리들의 모습이 각기 그 특징이 드러나도록 묘사되었다. 「풍악도첩」에서는 암봉의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봉우리마다 호분으로 하얗게 칠했었지만 「해악전신첩」에서는 그런 채색 없이도 준법만으로 암봉의 특색을

살려냈다. 금강산 산행을 기록하는 의미의 인물 묘사도 간략해진 것 또한 달라진 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단발령에 올라서면 당연히 금강산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보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 1820 ~1882)는 그의 금강산 기행문인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에 이렇게 적었다.

 

【금강산 구경은 단발령에서 시작된다. 단발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맑은 가을날 저녁별이 동쪽에서 비출 때, 멀리 하얀 금강산을 바라보면, 마음은 저절로 감동되고 정신도 황홀해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입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발령에서 금강산까지는 아직도 40리, 금강산의 그윽한 면모는 사람을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20리를 더 가면 철이령(鐵彛嶺)이다. 이때 처음으로 금강산을 볼 수 있다. 정상에는 흰 눈이 내린 듯하고, 바위는 수백의 늙은 신선들이 구슬모자와 흰 옷을 입고 열 지어 서서 절하고 있는 듯 장엄하다.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 허리를 숙이고 마음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에 감동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초탈하는 안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슴은 옻을 칠한 것처럼 캄캄할 것이다.】

 

이 글 대로라면 단발령에서는 아주 드물게 날 좋을 때나 금강산의 자취를 볼 수 있었던 듯하다. 그것도 금강산 전체가 아니라 금강산 봉우리들 끝만 보일 듯 말듯 한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단발령망금강>이라는 화제에 그려진 금강산의 모습은 실제로는 철이령이나 다른 곳에서 본 금강산의 첫 모습을 옮겨놓은 것일 가능성이 더 클 듯하다.

 

[「풍악도첩」中 <장안사> 견본담채, 35.6× 36.0㎝, 국립중앙박물관]

 

[「해악전신첩」中 <장안사비홍교> 견본담채, 32 × 24.8㎝, 간송미술관]

 

정선은「풍악도첩」의 <장안사>에서도 계속해서 중국의 북방화법에서 취한 상악준법과 남방화법에서

취한 토산수림법의 조화를 시도했고 또 그것을 이루어냈다. 그 점은「해악전신첩」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정선은 더욱 원숙한 필치로 그려냈다.

 

[「풍악도첩」中 <불정대> 견본담채, 37.2 × 34.3㎝, 국립중앙박물관]

 

[「해악전신첩」中 <불정대> 견본담채, 33.6 × 25.6㎝, 간송미술관]

 

두 그림 모두 뒤편에 십이폭(十二瀑)을 배경으로 그렸는데「풍악도첩」에서는 가능한 주변풍경을 많이 담으려

배경을 원경으로 처리한 반면「해악전신첩」에서는 좀 더 불정대에 초점을 맞추고 토산과 골산의 대비나

조화보다는 여러 가지 부벽준을 이용하여 암봉의 장쾌한 기상을 더욱 강조하였다.

 

 

 

이 글의 그림에 대한 평은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최완수, 1999, (주)대원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전통회화의 감상과 흐름 [이동주, 1996, 시공아트), 옛 그림의 수장과 감정 (2008, 한국고미술협회) 등의

내용을 참조,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