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 4

從心所欲 2019. 1. 25. 14:57




[「풍악도첩」中 <총석정> 견본담채, 37.8 × 37.3㎝, 국립중앙박물관]



[「해악전신첩」中 <총석정> 견본담채, 32 × 24.3㎝, 간송미술관]


역시나「풍악도첩」의 <총석정(叢石亭)> 은 총석정과 일대의 경관을 충실하게 사생하였다. 그러다 보니

총석주(叢石柱)와 총석정이 근경 중앙에 자리 잡게 되고 북쪽 언덕의 환선정(喚仙亭)까지 화폭에 담기면서

나머지는 넓은 바다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멀리 있는 묘도(卯島), 천도(穿島) 등의 섬들과 세 척의 배로

원경을 삼았다. 결과적으로 이런 과도한 표현 욕구가 구성의 긴밀성을 잃게 하여 산만한 구도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평이다. 어쩌면 이러한 결과는 정선의 구상보다는 정선에게 그림을 부탁한 의뢰인의 요구 때문에

생긴 결과였을 수도 있다. 이후로 겸재는 다시는 총석정 그림을 이처럼 산만한 구도로 그리지 않았고

총석주와 총석정에 집중하는 화면 구성을 택했다. 「해악전신첩」의 <총석정>이 그렇다.


음양의 대비와 북방화법과 남방화법의 조화로 특징지어지는「풍악도첩」에는 그런 특성에 전혀 걸맞아 보이지

않는 그림들이 있다. <사선정(四仙亭)>이 대표적이다.



[「풍악도첩」中 <사선정> 견본담채, 36.0 × 37.0㎝, 국립중앙박물관]


사선정은 금강산 해금강지역 삼일포에 있는 정각(亭閣)이다. 삼일포(三日浦)는 자연호수로 호수의 서북쪽에는

멀리 외금강의 여러 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가까이에는 국지봉(國枝峰)을 비롯한 여러 작은 봉우리들이 있어

예로부터 36개의 봉우리가 삼일포를 병풍처럼 둘러쌌다고 말하여 왔다. 호수 한가운데는 와우(臥牛)섬을

비롯한 여러 개의 섬들이 있는데 이 삼일포의 경치는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혔고 호수풍경으로는

전국 제일이라는 명성을 얻어 왔었다. <사선정> 그림은 그 삼일포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는 삼일포 대신

삼일호(三日湖)라고 적혀있다.


겸재정선기념관은 매년 겸재 학술논문을 공모하고 있는데 수년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경화씨의 ‘겸재의 신묘년 풍악도첩-1711년 금강산 여행과 진경산수화풍의 성립’이라는 논문을 최우수상으로

선정하였다. 이경화씨는 이 논문에서 정선을 금강산 여행에 동행시킨 백석공(白石公)이 신태동(1659∼1729)

이란 인물임을 밝혀냈다. 이 논문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처음에는 실경으로 시작했다가 갈수록 개성이

강해지는 겸재의 필치로 보아 그의 금강산 여행 경로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피금정-단발령-백천교-해산정-

문암관-옹천-총석정-시중대 순이 아니라 시중대에서 피금정까지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됐다는 주장이다.

<시중대>나 <사선정>같은 그림과 <금강내산> <단발령망금감> <장안사> 같은 그림의 차이를 두고 하는 주장인 듯하다.



[「풍악도첩」中 <시중대> 견본담채, 36.5 × 26.4㎝, 국립중앙박물관]


<시중대>나 <사선정>에는 음양과 남북방화법의 대비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경화는 정선이 처음에는 그림을

이렇게 그리다 금강산 여행 중 필법이 개발되고 변화를 거치면서 결국 내금강을 그린 필법이 성립되었다는

얘긴데 그 말은 정선이 금강산 여행 중에 득도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이경화의 추정이 옳을 수도 있지만

다른 추정도 가능하다. 소위 말하는 ‘겸재의 개성’이 이 그림에 나타나지 않는, 아니 나타날 수 없는 이유는

화재(畵材) 그 자체 때문일 수도 있다. <총석정>, <시중대>, <사선정> 모두 물이 중심이 되거나 비중이 큰

그림들이다. 정선은 의뢰인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그리러 따라간 사람이다. 실경이든 진경이든 같이 동행하는

의뢰인이 수긍할만한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없는 암봉을 세우고 토산을 높여 자신의 필법이나

자랑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삼일포 일대의 풍경은 눈으로 봐서는 아름다운 경치지만 어쩌면 정선은 그림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넓은 물의 광활함과 푸른빛이 주는 청명함을 어떻게 먹만으로 살려낸단 말인가?

하지만 와유지자(臥遊之資)라도 삼겠다는 의뢰인의 부탁으로 할 수 없이 붓을 잡아 호수 주변의 경물을 그리고

꼼꼼히 지명을 적어 넣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36년 뒤 다시 그린「해악전신첩」에는 사선정 그림이 없다.

<시중대>는 다시 그렸는데 「풍악도첩」과 기법상의 큰 차이는 없고 다만 구도를 긴밀하게 가져가면서 시점의

변화와 경물의 가감을 통하여 그림을 더 그림답게 만들었을 뿐이다.



[「해악전신첩」中 <시중대> 견본담채, 33 × 25.5㎝, 간송미술관]


<사선정> 그림 상단 왼쪽에 문암(門岩)이라고 표시해 놓은 곳이 보이는데 <문암관일출(門岩觀日出)>은

이곳에서 동해 일출을 바라보는 정경을 사생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풍악도첩」中 <문암관일출> 견본담채, 35.9 × 37.6㎝, 국립중앙박물관]


<사선정> 그림에서는 문암과 멀리 떨어져 있던 사선정이 이 그림에서는 문암 옆으로 옮겨왔다. 문암(門岩)은

돌로 만든 문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두 개의 돌이 깎아 자른 듯 서있고 그 위에 너럭바위가 덮여

있다. 이 그림에서는 문암의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해악전신첩」에는 따로 문암을 그린 그림이 있다.



[「해악전신첩」中 <문암> 견본담채, 56 × 42.8㎝, 간송미술관]


깎아지른 절벽 같은 모습이 앞의 그림에 나와 있는 문암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두 바위

위에 걸쳐진 너럭바위를 그리지 않았다. 정선은 안 그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런데「해악전신첩」

의 <문암관일출>에는 이 문암을 또 다른 모습으로 해석하여 그려 넣었다.



[「해악전신첩」中 <문암관일출> 견본담채, 33 × 25.5㎝, 간송미술관]


둥근 바위 세 개로 문암을 형상화하였다. 문암 앞의 높은 바위도 낮게 반석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문암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또한「풍악도첩」에서는 낮게 드리워진 호수 주변의 봉우리들을 있는 그대로 바다의 일출

중간에 그려, 화면 구성이 옹색하고 산만한 점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봉우리들을 생략하여 일출을 바라보는

시계를 활짝 열어 놓아 새벽 일출의 기상이 화면에 가득 차는 느낌을 만들었다. 사자암을 문암 앞 호수 가운데로

옮겨다 놓은 것은 중경(中景)의 허전함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렇듯 진경산수화는 산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단순히 옮기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감흥과 해석을 통하여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 글의 그림에 대한 평은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최완수, 1999, (주)대원사),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전통회화의 감상과 흐름 [이동주, 1996, 시공아트), 옛 그림의 수장과 감정 (2008, 한국고미술협회) 등을

참조하였고 지리에 대한 것은 북한지리정보(2004., CNC 북한학술정보)에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