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4

從心所欲 2019. 2. 6. 12:50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은 조선 후기를 대표할만한 화가이면서도 김홍도와 신윤복이라는 두 거물에 묻혀 그 실력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화가다. 김득신은 김홍도와 같이 금강산을 방문했던 김응환의 조카로 역시나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는 김홍도보다는 9살이 아래고, 신윤복 보다는 4살 위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생몰연도가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김득신의 본관은 개성(開城)으로, 개성 김씨는 18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서리, 역관, 의관 등을 배출한 중인 가문이었다. 그러다 김득신의 큰아버지인 김응환이 처음으로 화원이 되었고 그 이후 김득신 본인을 비롯하여 김득신의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집안에서 배출된 화원이 10여명을 넘는 화원 가문이 되었다.

 

유재건(1793 ~ 1880)은 <이향견문록>1에 김득신에 대하여 “정조 임금이 그의 부채그림을 보고 ‘김홍도와 더불어 백중하다’고 했다. 당나라 시대 화가인 오도자(680~759)와 동진시대의 화가 고개지(344~406)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기록하였다.

 

김득신은 1772년『육상궁시호도감의궤(毓祥宮諡號都監儀軌)』부터 의궤에 이름이 나타난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8세였고 이후 꾸준히 의궤에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 1791년 정조어진의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에는 이명기(李命基), 김홍도(金弘道), 신한평(申漢坪)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득신은 도화서 화원이면서 또한 풍속화를 여럿 남겼다. 그의 풍속화를 대표할만한 작품으로는「김득신필풍속도화첩(金得臣筆 風俗圖畵帖」, 또는「긍재풍속도첩(兢齋風俗圖帖)」이라고도 부르는 화첩이 전하는데,  화첩에 있는 그림 8점이 모두 고르게 높은 회화적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야묘도추(野猫盜雛)>가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이다.

 

[김득신 「긍재풍속도첩」中 <야묘도추(野猫盜雛)>, 지본담채, 22.4 x 27.0㎝, 간송미술관]

 

순간의 상황을 구성해내고 그려낸 김득신의 솜씨가 놀랍다. 우리 옛 그림에 이렇게 돌발적인 순간의 상황을

그린 그림도 드물지만 또한 그것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그림도 없을 듯하다. 병아리를 문 채 달아나는 고양이와

그 고양이를 향하여 장죽을 들고 몸을 날리는 남자, 마음과는 달리 고양이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마당에

나둥그러지게 생긴 남자의 상태에 놀라 다급하게 쫓아가는 아낙의 모습이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시선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현대 영상에서 사용하는 타임 슬라이스 포토그래피

(time-slice photography)로 담아도 손색이 없을만한 상황이다. 벗겨져 나뒹구는 탕건, 마당에 나동그라진

자리 짜는 틀과 재료, 고양이를 향해 날개를 활짝 펴고 달려드는 암탉, 정신없이 도망가는 병아리들이 모두

상황의 긴장감을 한층 더 고조시켜 준다. 그 와중에 병아리 네 마리 중 한 마리는 세 마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냅다 뛰고 있다. 상황의 혼란스러움을 강조하고 화면구성의 묘미도 살려낸 절묘한 배치다. 여기에 병아리를

물고 도망가면서도 고개를 돌리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은 화룡첨정이다. 호들갑을 떠는 부부와 암탉을 놀리기라도

하듯 여유 있는 모습이 이 그림의 해학적 요소를 배가시켜준다.

이 그림은 <파적도(破寂圖)>로도 불린다.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훔치다’라는 뜻의 ‘야묘도추(野猫盜雛)’

보다는 ‘(평화로운 집안의) 고요와 적막을 깨다’는 의미의 ‘파적(破寂)’이란 말이 그림의 내용에 더 적합하고

격조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에서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맨발의 아낙 오른쪽 발이다. 왼쪽 발의 형태로

그려졌다. 김홍도의 <점심>이나 <씨름>, <담배썰기> 에도 반대편의 발과 손이 그려진 모습이 있다. 김홍도를

따라한 것일까?

 

<야묘도추> 같은 그림에도 불구하고 김득신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데는 김득신의 그림이 개성이 부족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을 평하는 글에는 빠짐없이 김홍도가 등장한다.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득신의 그림 중에는 김홍도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그림들이 꽤 많고 「긍재풍속도첩」에도

그런 그림들이 있다. <야장단련(冶匠鍛鍊)> 같은 그림이 그렇다.

 

[김득신 「긍재풍속도첩」中 <야장단련>, 지본담채, 22.4 x 27.0㎝, 간송미술관]

 

[김홍도 「단원풍속도첩」中 <대장간>, 지본담채. 27 x 22.7㎝, 국립중앙박물관]

 

김득신의 <야장2단련>은 김홍도의 <대장간> 그림과 많이 닮았다. 간략하나마 배경이 그려졌고 김홍도의

그림에 있던 낫을 갈던 인물이 빠지는 등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김홍도 그림과의 연관성을 쉽게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이다. 그러면서도 김득신은 이 그림에 자신만의 특징을 남겼다. 집게로 달궈진 쇳덩이를 잡고 있는

인물이다. 마치 요즘 사진 찍힐 때 카메라를 바라보듯 얼굴을 돌려 정면으로 화폭 밖을 바라보고 있다.

옛 그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시선처리다. 이 또한 김득신 특유의 해학이 발동된 결과일 것이다.

 

[김득신 <자리짜기>, 개인소장]

 

[김홍도 「단원풍속도첩」中 <자리짜기>, 지본담채. 27 x 22.7㎝,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짜기> 역시 김득신이 김홍도의 그림을 참조하여 그린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한다. 문을 그려 넣어

방안이라는 배경을 나타냈다. 김홍도와는 달리 김득신은 배경을 적극 활용하는 편이었는데, 이는 그림의

현실감을 높이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공교화를 그리던 화원풍의 그림 습관을 과감하게

탈피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김홍도가 문인화풍의 풍속화를 그렸다면 김득신은 화원풍의 풍속화를

그렸다는 평이나 김득신의 선(線)이 김홍도의 것보다 좀 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는 평 같은 것들이

모두 같은 맥락이다.

<자리짜기>그림은 당시 서민가정의 희망이 지금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고 있는데, 집안의 유일한 희망인 아이는 그런 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라도 자녀가 학업에 전념해 성공하기를 기대하며 자녀에 희망을 걸고 사는 부모의 모습은

언제나 변함없는 서민가정의 세태다.

 

「긍재풍속도첩」의 나머지 그림은 <추수타작> <강상회음(江上會飮)>, <목동오수(牧童午睡)>, <밀희투전

(密戱鬪錢)>, <성하직구(盛夏織屨)>, <송하기승(松下棋僧)> 이다.

 

[김득신 「긍재풍속도첩」中 <추수타작>, 지본담채, 22.4 x 27.0㎝, 간송미술관]

 

[김홍도 「단원풍속도첩」中 <벼타작>, 지본담채. 39.7 x 26.7㎝, 국립중앙박물관]

 

지금은 농촌에서 그 모습이 거의 사라진 탈곡기만 봐도 ‘옛날’이라는 말이 떠오를 지경인데 ‘개상’ 이라 불리는

통나무에 볏단을 내리쳐 타작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친근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김홍도의 그림에는

자리 깔고 누워 곰방대를 물고 있는 마름의 모습이 방자하고, 김득신의 그림에서는 지주 노인네의 잔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야장단련>과 <자리짜기>는 김홍도의 이름이 거론될만해도 <추수타작>은 굳이 김홍도와 연관시킬 일은 아닌

듯싶다. 타작은 누구라도 그릴만한 농경사회의 전형적인 풍속 중의 하나이다. 김득신은 김홍도가 그린 그림만

따라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화재로 그림을 그렸다.

 

[김득신 「긍재풍속도첩」中 <목동오수>, 지본담채, 22.4 x 27.0㎝, 간송미술관]

 

[김득신 「긍재풍속도첩」中 <성하직구>3, 지본담채, 22.4 x 27.0㎝, 간송미술관]

 

[김득신 「긍재풍속도첩」中 <송하기승>4, 지본담채, 22.4 x 27.0㎝, 간송미술관]

 

[김득신 「긍재풍속도첩」中 <밀희투전>5, 지본담채, 22.4 x 27.0㎝, 간송미술관]

 

[김득신 「긍재풍속도첩」中 <강상회음>, 지본담채, 22.4 x 27.0㎝, 간송미술관]

 

<강상회음>은 우리 풍속이라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 드는데, 역시나 중국 당나라 화가인 염입덕(閻立德, 596 ~ 656)의 <강변회음도> 그림을 본으로 한 것이라 한다.  나무 가지가 살랑대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술을 마시고 즐기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김득신은 등장인물을 중국인이 아닌 조선 사람으로 바꿨다. 하늘의 빈 공간에 그려 넣은 검은 새들은 백로일텐데 오히려 중국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가마우지를 연상케 한다.

 

 

  1.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 조선 초기 이래의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조희룡이 쓴 서문에 의하면 유재건이 ‘금강산의 절경을 탐승하고, 그처럼 절경이 심산유곡에 파묻혀 있듯이 이항(里巷)에 묻혀 있는 유능한 인사들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한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인용한 서책은 52종이고, 수록 인물은 모두 308명이나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2. 야장(冶匠) : 쇠를 생산하고 생산된 쇠를 주조하거나 벼리고 단련하여 각종 무기, 농기구, 연장 그릇 등을 만드는 장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야철장(冶鐵匠), 철야장(鐵冶匠), 노야장(爐冶匠), 철장(鐵匠), 철공(鐵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모든 장인의 대장’이라는 뜻의 대장장이라고도 하였다. (역주조선왕조실록,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3. 성하직구(盛夏織屨): 한 여름에 짚신을 삼다 [본문으로]
  4. 송하기승(松下棋僧) : 소나무 아래에서 장기 두는 스님 [본문으로]
  5. 밀희투전(密戱鬪錢) 은밀히 노름을 즐기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