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5

從心所欲 2019. 2. 9. 17:12

 

조선에는 긍재 김득신 말고 또 하나의 김득신이 있었다. 백곡(栢谷) 김득신(1604 ~ 1684)이다. 백곡은 긍재

김득신과 한자 이름까지 같아, 간혹 같은 인물로 혼동되어 소개되기도 하지만 동명이인이다. 정확히 긍재

김득신 보다 150년 전의 인물로 시인이었다.

그는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해 노둔한 편이었다. ‘노둔(駑鈍))'은 둔하고 어리석어

미련하다는 뜻이다. 백곡의 아버지 김치(金緻)는 이러한 아들에게 "학문의 성취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저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대문장가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백곡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중 「백이전(伯夷傳)」을

좋아하여, 무려 1억 1만 3천 번 읽었다고 자신의 「독서기」에 밝혔다. 이 때문에 자신의 자그마한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고 이름 짓기도 했다. 예전에 1억이라는 숫자는 10만을 뜻하는 것으로 지금으로 치자면

11만 3천 번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다산 정약용이 『다산시문집』의 '백곡 김득신의 독서에 대한 변(金柏谷讀書辨)' 이란 글에서

이를 팩트체크한 것이다.

 

“백곡 김득신은 자신의 「독서기」에 여러 책을 읽은 횟수를 기록했는데, 『사기』「백이전」1을 무려 1억 1만

3천 번이나 읽었다고 했다. 또한 사서(논어·맹자·대학·중용)와 삼경(시경·서경·역경), 『사기』와 『한서』,

『장자』 그리고 한유의 문장 등 여러 책 가운데 어떤 것은 6만 내지 7만 번씩 읽었는데, 아무리 적게 읽어도

수천 번씩은 된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문자와 책이 존재한 이후 위아래로 수천 년과 종횡으로 3만 리를 모두

뒤져보아도 부지런히 독서한 사람으로는 단연코 김득신을 으뜸으로 삼을 만하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리

독서를 잘하는 선비라고 해도 하루 동안 「백이전」을 100번 넘게 읽기는 힘들다. 하루에 100번을 읽는다면

1년 동안 3만 6천 번을 읽을 수 있다. 3년으로 계산하면 겨우 1억 8천 번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3년의 세월

동안 병을 앓거나 사람들과 왕래나 문답이 어떻게 없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김득신은 진실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도리를 실천하는 군자였다. 어버이를 효도로 섬겨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묻고 살폈으며,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는 일에 아낌없이 시간을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4년의 세월이 걸리지 않고는 도저히 1억 1만 3천 번을 읽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처럼「백이전」 읽는 데만도 4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어느 틈에 그토록 많은 책을 수천, 수만 번씩이나

읽었다는 말인가? 진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추측해 보건대, 「독서기」는 김득신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그가 죽고 나서 누군가가 전해들은 말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김득신이 지은 시에 "한유의 문장과 사마천의 사기를 천 번 읽고 나서,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할 수

있었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김득신이 독서한 실제 내용을 말하고 있다. 김득신이 읽었다는 한유의 문장과 사마천의 사기 또한

전체 내용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일부 내용을 말한 것이겠으나 이 또한 장한 일이라고 할 만하다.”2

 

백곡은 이렇게 책을 반복해서 읽고도 자기가 읽은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노둔함으로 인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김득신은 젊어서부터 늙어서까지 부지런히 글을 읽었지만 사람됨이 오활(迂闊,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다)해서 쓰임 받지 못했다”3는 인물평이 실릴 정도였다. 그렇지만

노둔함에도 불구하고 백곡은 다독(多讀)을 통해 문장으로 크게 이름을 높였고 당대 제일의 시인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긍재 김득신은 비록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그림의 화제에 적은 글을 보면 그 감성은 어느 시인 못지않은 데다

해학도 있었다.

 

[김득신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 지본수묵담채, 25.3cm x 22.8cm, 개인 소장]

 

 

一犬吠 二犬吠 萬犬從此一犬吠

개 한 마리가 짓고, 개 두 마리가 짓더니

모든 개가 따라 짓기에

呼童出門看 月卦梧桐第一枝

아이를 불러 문밖에 나가보게 하였더니

달이 오동나무 제일 높은 가지에 걸렸단다.

 

사방이 고요한 밤에 갑자기 온 동네 개 짖는 소리에 밖으로 나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달빛이 가득한 마당 풍경에

놀라고 감탄해본 경험이 없다면 이 글과 그림이 주는 정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화제 덕분에

먹뿐인 화면에 금색 달빛이 가득한 황홀한 정취가 느껴진다. 이 그림은 <출문간월도(出門看月圖)>로도 불린다.

 

 

[김득신 <노상알현(路上謁見)> 지본수묵담채, 27 x 33cm, 북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반상도(班常圖)>라고도 불리는 그림이다. 길 가던 상민부부가 양반을 만났다. 하인을 대동한 채 나귀를 타고

행차하는 양반을 향해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상민 남편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런 모습이

그 당시의 일상인지 아니면 김득신이 반상(班常)의 세태를 비판하기 위하여 과공비례(過恭非禮)의 모습을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만일 의도를 갖고 이렇게 그렸다면 이 또한 김득신의 독창적인 해학이다.

 

김득신의 <놀란 물새>는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中 <과교경객(過橋驚客)>에서 화재(畵材)를 얻은 것이

틀림없다. 긍재 대신에 홍월헌(弘月軒)이란 김득신의 초호(初號)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초기 그림이다.

 

[김득신 <놀란 물새)>]

 

 

[김홍도 「행려풍속도병」中 <과교경객(過橋驚客)> , 90.9 x 42.7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그림 왼쪽 상단에 강세황은 “다리 아래 물새는 당나귀 발굽소리에 놀라고 당나귀는 날아오르는 물새

소리에 놀라네. 사람은 당나귀가 놀라는 것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 가히 입신의 경지에  들어섰다.”

 평을 했는데 이에 비하여 김득신의 그림은 역동성이 부족해 보인다.

 

[김득신 <귀시도(歸市圖)> 지본담채, 27.5 x 33.5cm, 개인 소장]

 

그림만으로는 이들이 시장에서 돌아오는 모습인지 시장으로 가는 모습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제목은

귀시(歸市)로 되어있다. 생소한 말이지만 「맹자」‘양혜왕장구’ 하(下)편에 귀시자부지(歸市者不止)라는

구절이 있어 ‘(장사를 하러) 시장에 가는 무리가 그치지 않는다’ 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으니 제목을

‘귀시도(歸市圖)’로 붙인 입장에서는 시장에 가는 풍경으로 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행 중 갓 쓰고 도포를 입은 두 인물은 복장 때문에 양반으로 보는데 과연 그런지는 의문이다.

두 사람은 어깨에 전대(纏帶)를 메고 손에는 장죽을 들고 있다. 양반이 그런 행색으로 나들이를 했을까?

도포에 매는 술띠도 없다. 또 데리고 가는 하인도 없다. 장에 가서 물건이라도 사면 저 양반들이 직접 들고 온다는

얘긴가?

복장은 양반 차림이더라도 이 두 인물은 그저 돈 좀 있는 상인(商人)들일 가능성이 높다. 세상의 어떤 기득권도

자진해서 밑으로 내려오진 않는다. 어느 양반이 스스럼없이 상민(常民)들과 어울려 장에 가겠는가? 등짐을 진

인물들도 패랭이가 아닌 갓을 쓰고 있다. 도포는 원래 천민은 입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조선 말엽에는 그 금제가

 지켜지지 않아 하류계급에서도 도포를 착용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갓이나 도포가 더 이상 양반의

전유물이 아닌 세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中 <장터길>,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장터길>, 또는 <길 떠나는 상단(商團)>으로 불리는 위 김홍도 그림의 인물들은 짐을 싣기 위해 어디론가

가고 있는 마부 일행이다. 얼핏 안장 위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들이 깔고 앉은 것은 안장이 아니라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하여 소나 말의 등에 얹는 ‘길마’라는 것이다. 하층민이었을 이들이 말 위에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다. 맨 뒤편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물은 갓을 쓰고 있다. 수백년을 내려온 신분의 벽은

이렇듯 사회 곳곳에서 조금씩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김득신의 풍속화로는 이외에 <수하일가(樹下一家)>와 <농촌풍일(農村豊日​)> 이 있다.

 

[김득신 <수하일가(樹下一家)> 지본담채 27.5 x 33.0cm 호암미술관]

 

 

[김득신 <농촌풍일(農村豊日​)> 지본담채 32 x 41cm 개인소장]

 

<수하일가>에서 짚신을 삼는 인물의 얼굴이 「긍재풍속도첩」<성하직구>의 인물과 판박이다. 자세도 거의

동일한데 남자의 몸이 말라보이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만 다르다. <농촌풍일>은 초기 작품이어서인지

풍속화이지만 산수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 ‘백이전’은 ‘사기(史記)’ 중에서도 ‘열전(列傳)’에 있는 권명(卷命)이다. ‘사기열전’은 주나라 붕괴 후 등장한 50개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백이전’은 70권으로 이루어진 ‘사기열전’의 첫 권으로 전설적인 형제성인(兄弟聖人)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다룬 것이다. 두 사람은 형제로 본래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 : 河北省 昌黎縣 부근)의 왕자들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끝내 사양하다가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고, 그래서 가운데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그 무렵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멸하여 주왕조를 세우자, 두 사람은 무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는 내용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사기, 두산백과) [본문으로]
  2. 조선 지식인의 독서 노트(한정주, 엄윤숙, 2009. 고전연구회 사암), 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 선비들 (이수광, 신동민, 박윤정, 2012) [본문으로]
  3. 숙종실록 1684년(숙종 10년) 10월9일 기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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