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7

從心所欲 2019. 2. 15. 13:14

긍원(肯園) 김양기(金良驥)는 김홍도의 아들이다. 생몰년도 알 수 없고 조희룡과 교유관계가 있었던 사실

이외에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조희룡은 그의 「호산외기 壺山外記」에 “그림에 가법(家法)을 전수한 바

있어 산수와 집과 수목을 잘 그렸는데, 아버지보다 뛰어난 안목도 있다”고 하였다. 헤엄치는 오리를 그린

김양기의 <유압도(遊鴨圖)>이다.

 

[김양기 - <유압도(遊鴨圖)> 지본담채, 92.4 x 49.3cm, 국립중앙박물관]

 

산수, 화조(花鳥) 등의 소재를 잘 다루었다는 말대로 김홍도가 그렸던 몇 점의 유압도와 비교해도 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아래는 김양기의 <투전도> 이다.

 

[김양기 <투전도> 지본채색 56 x 37.5cm, 개인소장]

 

 

노름이 벌어지고 있는 풍경을 부감으로 세세히 그려냈다. 횃대에 걸린 도포와 남바위, 벽의 자명종, 둥근

바탕에 화조도가 그려진 화초장까지 배경이 아주 풍부하다. 거기다 소반에 음식을 받쳐 들고 들어오는 두 아낙과

바닥에 누워있는 두 남정네까지 곁들여 노름판의 풍경이 생생하다. 하지만 그림으로서는 구성이 산만하여 그다지

강렬한 느낌은 없다. 옷 주름 처리도 번잡하고 필선도 굳세 보이지는 않는다. 

 

조선 말(末)이 되면 외세의 압력에 의해 개항(開港)이 되면서 개항장 풍속도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한다.

개항장 풍속도란 원산, 제물포, 초량의 개항장에서 외국 상인이나 선교사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그린 풍속화를

말한다. 김준근(金俊根)이 그 대표적 화가로 1880년대 후반에서 1890년대 초반까지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업 용도로 대작(代作)을 겸하여 다작(多作)을 하였기에 그의 풍속도는 지금도 유럽과 미국의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래서 조선의 풍속을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는 평도 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고, 그 보다는 조선의 그림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이 조선 회화의 품격을 낮춰 보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까가 더 염려된다.

 

김준근은 외국인이 관심을 가질만한 조선의 갖가지 풍속을 그렸다. 그림의 작품성은 따로 논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조선 말의 여러 가지 풍습을 알고 이해하는 데는 지금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국수 누르는 모양>은 그 중에서도 특이한 풍속을 그린 그림이다.

 

[김준근 <국수 누르는 모양>, 독일 함부르크인류학박물관 소장]

 

 

사다리에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지렛대에 등을 대고 국수틀을 누르고 있다. 사다리난간을 한 칸씩 발로 뻗디뎌

밀면서 그 힘으로 등에 댄 지렛대를 누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뽑혀 나온 국수사리는 바로 펄펄 끓는 솥으로

들어간다. 솥 앞의 남자는 국수발이 엉키지 않게 막대기로 젓고 있고, 주인으로 보이는 방안의 여성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소위 냉면과 같은 압출면(壓出麵)을 뽑는 평양식의 국수 뽑는 장면이다. 반면에 서울에서는

여러 사람이 지렛대 위에 타고 앉아서 내리 눌렀다고 한다. 옛날에는 국수 뽑는 일도 이렇게 힘이 들고 또한

요령도 있어야 했으니 ‘국수 뽑는 기술자’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쇠로 만든 반기계식의 제면기는 1930년대에야

등장했다고 한다.

 

[김준근 <조인회시허고>, 23.2 x 16 cm]

 

 

이 그림은 예전에, 목을 벨 죄인을 처형하기 전에 얼굴에 회칠을 하고 북을 지운 뒤 북을 두드리며 사람들 앞에

내돌려 경각심을 주던 ‘회술레’라는 형벌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 제목은 ‘죄인 회시(回示)하고’의 뜻이다.

옛날 경상북도 북부 지방과 전라남도 지방의 민간에서도 죄인에게 북을 메워 회시하는 풍습이 있었다.

조리돌림이라는 것으로, 마을의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을어른들이 발의하고 마을회의를

거쳐 처벌을 결정하는데, 죄를 지은 사람의 등에 북을 달아매고 죄상을 적어 붙인 다음, 농악을 앞세우고 마을을

몇 바퀴 돌아서 그 죄를 마을사람들에게 알리던 풍습이다. 조리돌림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창피를 줌으로써

그와 같은 행위의 재발을 방지하고 촌락사회의 동질성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가진 소극적인 사회제재의 한

방식이었다. 그래서 조리돌림은 창피를 주는 것으로 끝나지만 회술레는 이후에 사형이 집행된다.

 

[김윤보 『형정도첩』中 <부고회시례(負鼓回示例)>]

 

 

부고회시례(負鼓回示例)는 ‘북 지워 회시하는 법식(法式)’이라는 뜻으로 김준근의 <조인회시허고>와 같은

내용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일재(一齋) 김윤보(金允輔, 1865 ~ 1938)의 『형정도첩(刑政圖帖)』에 실려 있다.

형정은 형사(刑事)에 관한 행정을 뜻하는 말로 『형정도첩(刑政圖帖)』은 조선 후기의 범죄, 소송, 오형(五刑),

고문 등 형정 전반에 관한 내용을 그린 특이한 화첩으로 모두 48점의 그림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화첩은 개인 소장품으로 화첩 전체 그림이 다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공개된 그림 중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들이 많이 실려 있다.

 

[김윤보『형정도첩』中 <포교포잡기인(捕校捕雜技人)>]

 

 

<포교포잡기인(捕校捕雜技人)>은 포교들이 노름 현장을 급습하는 장면이다. 방안에는 노름꾼 세 명이 노름에

한창인데 밖에서는 포교 하나가 사립문을 열려고 하는 사이에 다른 포교는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담을 넘고

있다. 

 

[김윤보『형정도첩』中〈군수초달죄녀(郡守楚撻罪女)]

 

 

군수가 여자 죄인을 초달한다는 그림이다. 초달(楚撻)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린다는 뜻이다.

태형과 달리 죄인을 형판에 묶지 않고 형틀 위에 올라서게 해서 종아리를 때리고 있는데, 발목이 묶여 균형을

잡기 어려운 여자 죄인을 포졸이 부축하고 여자는 또 그런 포졸을 껴안은 모습이다. 상황이 파악되기 전에는

얼핏 남녀의 애정행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달은 조선 시대에도 아동과 학도들의 비행과 학습 부진에 대한

체벌용으로 주로 이용되었으며, 간혹 신분이 낮은 관노와 관비의 간통을 처벌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한다.

조선시대에 태형과 장형에 쓰는 형구(刑具)는 중국의 『대명률(大明律)』을 따라 가시나무를 다듬어

만들도록 되어있었다. 가시나무는 예로부터 “풍증(風症)을 제거하고 울혈(鬱血)을 발산시켜 매를 맞은 자가

비록 한기(寒氣)와 부딪쳐도 병이 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을 만들 때는 이렇게 형구에 까지 배려를

했지만 매를 맞고 장독(杖毒)으로 죽는 사례도 빈번했던 것을 보면, 법을 집행하는 자가 법이 만들어진 취지를

이해 못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반사였던 모양이다.

 

[김윤보『형정도첩』中 <태벌죄녀(笞伐罪女)]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태형이나 장형을 집행할 때는 볼기와 넓적다리를 나누어 치는데, 이때 죄인은

거의(去衣)라 하여 반드시 벌거벗겨 맨살을 때리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그림에서 여자 죄인은 치마와 속바지를

벗기지 않고 속바지를 볼기 아래까지 최대한 걷어 올리고 형을 집행하고 있다.

 

[김윤보 『형정도첩』中 <차식어수포청죄인(差食於囚捕廳罪人)>

 

 

포도청에 갇혀있는 죄수에게 가족이 찾아와 음식을 들여보내는 장면이다. 음식은 늘 창을 통해 들여보내는지

창살 하나가 빠진 만큼의 공간이 비어있는 게 이채롭다.

 

[김윤보 『형정도첩』中 <금부난장(禁府亂杖)>]

 

 

의자에 묶여 앉아있는 죄인을 여러 명의 나장(羅將)들이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둘러싼 채 빙빙 돌면서 망나니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다. 이것은 형벌이라기보다는 고문의 방법으로 보인다. 언제라도 취조관이 명령만 내리면 주위의 나장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죄인에게 인정사정없이 몽둥이세례를 내려 부을 분위기이니 죄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겠는가! 간이 작은 사람은 없는 죄도 술술 불어댈 분위기다. 제목에 ‘의금부의 어지러운 몽둥이’라고

했으니, 실제로도 몽둥이세례는 있었을 것이다.

 

[김윤보 『형정도첩』中 <사죄인학무(使罪人鶴舞)>]

 

 

그림 제목은 ‘죄인에게 학춤을 추게 하다’인데, 죄수의 팔을 뒤로 묶어 매단 뒤 발을 회초리로 때려 이중의 고통을

주는 고문 방법이다. 웃기도 하고 여유도 있어 보이는 형리들의 표정으로 인하여 고문이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김윤보 『형정도첩』中 <사약어양반(賜藥於兩班)>]

 

 

양반에게 사약을 내리는 장면이다. 방안에 관복을 입고 서있는 인물은 의금부 도사(都事)거나 형방(刑房)

승지로, 형을 집행하는 집행관이다. 그 뒤편에 전립과 도포 차림의 인물은 의관(醫官)으로 형 집행 후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형정도첩』에는 이 그림말고도 효수, 참수 등 죄인을 사형시키는 그림이 넷이나 더 있다. 가장 압권은

<안피지쇄수이살(顔被紙灑水而殺)〉이란 제목의 그림인데 죄수의 얼굴에 종이를 붙이고, 물을 뿌려 호흡이

막히게 하는 일종의 물고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고문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제목에서

보듯 결국에는 죄수를 죽이는 데 그 목적이 있어 여간 섬뜩하지가 않다.

 

[김윤보 『형정도첩』中 ​<착거무뢰소년한타파존장의관급구타죄인(捉去無賴少年漢打破尊丈衣冠及毆打罪人)]

 

 

그림의 제목이 무척 긴데 사건내용까지 기록해서 그렇다. 제목은 어른의 의관을 망가뜨리고 구타까지 한 무뢰배를

잡아들인다는 뜻이다. 포졸에게 끌려가는 범인과 그 뒤로 망가진 갓을 들고 있는 노인을 통해 전후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김윤보의 『형정도첩』 그림들은 조선 총독부에서 1937년 발간한 『사법제도연혁도보(司法制度沿革圖譜)』에 흑백도판

45점이 실려 있는데, 이로 미루어 김윤보가 조선 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도첩일 가능성이 높다.

김윤보는 〈조선고시속도(朝鮮古時俗圖)〉를 그려 일본 천황에게 바치기도 한 인물이다. 김윤보는 일제에 협조하면서

활동하다가 별 탈 없이 1938년 평양 자택에서 죽었다. 그 와중에 김윤보는 23점의 그림이 수록된 『풍속도첩』도

남겼다고 하는데 그림은 그 중 몇 점만 공개된 상태다.

 

[김윤보 『풍속도첩』中 ​<대지주소작료납입>]

 

 

[김윤보 『풍속도첩』中 ​<처가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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